"죽음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노동자들을 무한히 분노케 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 자본의 횡포에 대한 일말의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이 나라 노동자들의 현실을 호소하고 있는 상대를 향해 깊은 아픔을 표현하기보다는, "생명을 투쟁수단화" 운운하고 있다. 그 절통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모독하고 비난조의 훈계로 경찰의 유혈(流血)진압을 정당화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은, 이제 이 나라 노동자들에게 <절망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도심에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화염병의 난무(亂舞)"는 그 절망의 몸짓이 마침내 만들어낸 막을 수 없는 춤이며, 자본과 권력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 이들 노동자들의 가슴에 무섭게 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이다. 물론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화염병 시위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나, 상황이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현실의 근본을 우리는 이 솟구치는 화염(火焰) 속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틀이 바로 서지 않으면 "희생자들이 가해자가 되는 모함"이 성공하게 된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들에게 "절망 그 자체"**
지금 권력은, "해결의 길이 이미 다 열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격한 노동운동이 불법적 폭력 시위로 사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서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시대는 이미 달라졌는데, "구시대적 노동운동의 투쟁방식"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희생자들이 가해자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은 자신이 "특허상표"인 양 그토록 부르짖고 있는 새로운 개혁정치의 산물인가? 노동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정치의 틀을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적 저항으로 문제를 푸는 일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단 말인가? 정직하게 현실을 보자. 개혁정치는 명분만 그럴 듯한 채, 경쟁세력을 제거하고 독점적 지위를 가진 자본의 권력이 되는 과정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찌하여 그 개혁에는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특권적 자본의 위상을 혁파하는 과제는 고스란히 빠져 있는가?
"노동운동이 문제다"라는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고 성립하려면, 그것은 노무현 정권이 어떻게든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 정권의 관심은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있지 않았다. 독점 대자본가들과는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은 그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혼신을 다해 아우성을 쳐도 일관해서 외면해왔던 것이다. 그리고도 대화의 통로는 엄연히 뚫려 있다고 세상을 속이고 있다.
그에 더하여,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문제로 들끓고 있는 부안에 이어 서울에서도 이 나라의 권력은 "국가 테러리즘의 수준"에서 사태를 처리하고 있다. 정당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머리를 겨냥하여 내려치고 있는 경찰봉과 방패 끝은 마치 "노동운동에 대한 토벌작전"을 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본의 대리인이 되고 있는 권력의 추악한 얼굴을 보여준다.
***기만적 포퓰리즘의 진상 드러나**
이 나라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서민대중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했던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약속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폐기처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기만적인 포퓰리즘(populism)"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그 약속을 믿고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은 어떻게든 막자", "독점자본의 국가장악은 일단 저지하자"면서 자신의 후보에게 돌아갈 표를 노무현 후보에게 돌린 민주노총 소속원들, 또는 민노당 지지 유권자들의 수가 무릇 몇이던가? 그 대선 결과에서 보인 간발의 차이에 이들 노동자들의 정치적 선택은 무시할 수 없는 기여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배신의 정치>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선자금 공방의 본질은 권력이 대자본의 이해관계 위에 성립했으며 자본과 권력이 공조하여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아갔다는 점인데, 그에 대한 고백과 성찰은 없는 채로 정치권 내부의 세력 재편문제로 사안의 성격을 왜곡, 변질시키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한 진정한 개혁의 요체는 서민대중을 비롯한 노동자, 농민들의 권리를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현실을 바꾸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의 개혁사고에 이러한 관심과 목적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개혁은 권력투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해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정세의 근본적 성격이다. 그러니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민생을 위한 정책은 실종되었으며 경제와 대외정책은 국내외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문제 대응자세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상황에는 눈을 감고, 권력이 정한 질서에 이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만 집중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진실한 해결 의사와 의지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인식과 자세가 그대로 지속될 경우, 우리는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 <자본과 권력의 동맹체>로서 오늘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고강도로 탄압하는 파시스트의 단계로 전화(轉化)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개혁은 권력투쟁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하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정세의 진행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 즉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권리가 강력하게 보호되고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포함한 특권적 기득권 질서가 철폐되며 공동체적 자산의 사유화를 저지하는 가운데, 국가의 주권적 존엄성과 평화적 대외관계의 추구를 하는 정치를 만들어 가는 것은 누구에게 그 역사적 책임과 역량이 맡겨졌는가?
노무현 정권은 노동에 대한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다.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에도 철퇴를 가하고 있다. 자신들의 주거환경의 안전을 지키려는 주민들을 진압작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파병결정은 민주적 참여와 공론의 과정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 발표했으며 그 절차는 기만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존립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고 있다.
냉전수구세력의 집결 집단인 한나라당과 그와 동일한 노선을 가진 정치적 기아(棄兒)에 해당하는 자민련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연이 없고, 분당 이후 민주당이 보이고 있는 행보는 장차 처참한 몰락까지 예상하게 하는 자신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열린 우리당의 경우도 개혁적 의지를 밝히고 있으나 정작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파병거부를 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의 아우성에 아무런 대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은, 이 나라 보수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자, 자본과 제국주의 세력의 영향력에 깊이 유착된 정치의 기존질서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행태라는 점에서 여기에 더 이상 새로운 시대를 만들 희망을 건다는 것은 어리석다. 정치는 정치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이러한 정치 속에서 민중들의 삶은 저버려지고 있다.
***민주주의 혁명의 근본적 성취단계로 들어서야**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 혁명의 근본적 성취단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그 사명은, 기득권 질서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아니 그와는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세력의 역사적, 정치적 역량의 강화와 결속, 그리고 행동에서 완성되어 갈 것이다. 이들은 이른바 이 땅의 부르조아 세력의 보수적 패권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정치의 실체, 즉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위선적이고 착취적인 질서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생존권 투쟁에서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굴종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권력과 맞서고 있으며, 노동/농민 운동의 국제적 연대까지 확보하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들 노동자, 농민들은 자신들 내부에 형제애, 자매애로 이해될 수 있는 동지적 결속을 강화하고 있으며 진정 이 나라의 현실과 미래를 절절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용기 있게 투쟁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거대한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 위기 돌파의 최종 선택인 미국 부시정권의 파시스트적 군사주의 노선도 파산의 지점에 서 있다. 그 틀의 하위단위로 편입되어 자신의 정치경제적 생존을 구하려 하는 노무현 정권은 이미 파국의 전조가 보임에도 그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노동운동의 탄압을 통해 국내외 독점 자본의 대리 권력으로서 그 입지를 굳히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연속되는 고난의 투쟁 속에서 역사와 계급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해지고 있는 노동운동은 이러한 권력의 기만에 더 이상 속지 않으며, 그 위협에 두려워하면서 물러서지 않는다. 도리어, 보다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기르고 하나가 되어,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을 향한 길로 놀랍게 약진(躍進)하고 있다.
진정 낡은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변화의 기류를 직시하지 못한 채 자본과 권력의 폭력적 동맹으로 노동운동을 분쇄하려는 노무현 정권 자신이며, 새로운 역사의 주체는 바로 이들 노동자들이다. 노동운동이 절대적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물질화시키고 공동체 전체의 이해를 배제시키는 자본의 지배를 혁파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이 사회의 인간화, 공동체 회복, 그리고 민주주의 완성의 진정한 동력이다.
***희망의 등불 끄려는 자, 역사의 반격 예상해야**
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와 함께 하나가 되는 우리가 되어갈 때, 이 나라는 그 누구도 배타적 특권으로 인간을 짓밟지 못하며 모두가 존엄한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 사회와 역사에 헌신할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되어갈 것이다.
실로, 오늘의 절망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이 나라의 운명을 권력에게만 맡기는 안이함을 단호하게 버리고, 그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던 노동자, 농민들을 포함한 민중들이 투철한 자존의식을 가진 채 누구나 나서서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뜨겁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누구도 이 주인을 깔보거나 능멸할 수 없다, 나의 권리는 곧 이 공동체 전체의 권리다."
1848년에 이어 1871년 파리 꼬뮨의 실험과 좌절 이후, 세계 노동자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고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민주주의 혁명의 투쟁에 나섰다. 그것이 때로는 패배로 끝나 파시즘의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으나, 때로는 국가권력의 성립에 성공하기도 했으며 "국제주의"의 성장으로 이어져 세계사를 바꾸어갔다.
일어서는 노동자들, 결속하는 농민들, 그리고 하나가 되어가는 이름 없는 민중들. 그에 더하여 이들은 세계민중들과 단결, 연대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다.
그 희망의 등불을 끄려는 자, 역사의 반격을 받게 되리라.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대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남은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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