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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 사봉 그리고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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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 사봉 그리고 비누

최연구의 '생활속 프랑스어로 문화읽기' <8>

경상도의 시골 사람들은 옛날에 비누를 ‘사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분’이 비누의 경상도 사투리인 줄 알았다. 어릴 적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당시 군대를 갓 제대한 사촌형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촌형은 군대에서 있었던 일(겪었던 일인지 군대에서 나돌았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이라며 ‘사분’에 얽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방 어느 초소의 일인데, 북한군 초소가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휴전선 근처인지라 매일밤 초소에서 불침번을 서거나 보초를 서는 일은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보초나 불침번, 순찰병은 매일 저녁 암호를 바꾸었는데, 밤에 순찰하다 수상한 인기척이 나면 암호를 물어보고 바로 대지 못하면 사살했다고 한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사분에 얽힌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하루는 그날 암호가 ‘비누’였다는데 마침 이날 경상도 출신의 사병이 순찰 당번이었다고 한다. 순찰을 돌다가 앞에서 한 병사가 나타나 ‘암호’하고 물었는데 이 경상도 사병이 갑자기 비누라는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 당황한 나머지 ’사분‘이라고 외쳐 결국 총을 맞고 죽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아마 그냥 웃어넘길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비누라는 말의 경상도 사투리가 ‘사분’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경북의 시골에 가면 비누를 ’사분‘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분’은 경상도 사투리나 순우리말이 아니다. 프랑스어 ‘사봉’에서 온 말이다. 내가 프랑스어를 한 지는 참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사분이 사봉에서 온 말이란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곰곰이 그 어원을 따져보니 그랬던 것이다.

비누라는 말도 우리말이 아니라 한자어이다. 원래 한자어는 비루인데 '더러움(陋)을 날려버리다(飛)'라는 의미이다. 비누도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함께 들어왔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몸을 씻을 때 쌀뜨물을 비누 대용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부잣집이나 혼인을 치르는 새색시는 녹두 가루나 창포 가루를 사용하여 몸을 씻었다고 한다. 이렇게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가루를 비루(飛陋)라고 불렀다. 이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비누'라는 말로 바뀌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 서양식 비누가 처음으로 도입된 때는 19세기 초반경인데 프랑스 신부 리델이라는 사람이 처음 가져왔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비누는 ’사봉(Savon)'이다. 이 말이 경상도 지방에서는 사분으로 정착했던 것 같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합성 비누가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말 속에는 프랑스어가 들어오면서 정착되거나 프랑스어가 어원인 말들이 왕왕 있다. 그중에는 오래된 말도 있고 비교적 최근부터 쓰인 말도 있다. 프랑스어가 주로 쓰이는 곳은 화장품이나 요리용어, 미술이나 영화용어 그리고 외교용어 등이다. 화장품의 경우 대표적인 것은 모화장품회사의 아르드뽀가 있다. 아르드뽀(Art de peau)는 ‘피부의 예술’이라는 뜻인데 남의 나라말로 이름을 지었지만 참 예술적으로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용어는 한국의 요리전문잡지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메뉴(Menu)’부터가 프랑스어이다. 영화사의 한 장르(genre, 이것도 프랑스어다)인 ‘누벨 바그(nouvelle vague : 신물결)’나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도 프랑스어이고, 아방가르드(전위) 등의 예술용어도 프랑스어이다. 외교에서는 데땅뜨(긴장완화), 코뮤니케 등의 프랑스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주 쓰시던 용어가 있었는데, ‘캄푸라치’라는 말이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을 때 화장품으로 가리거나 눈에 뭐가 났을때 색안경으로 가리거나 할 때 어머니는 ‘캄푸라치한다’고 표현했다. 얼핏 듣기에는 국적이 모호한 말이어서 나는 일본말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가만히 생각하니 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중 ‘카무플레(Camoufler)’라는 동사가 있는데 ‘위장하다, 변장시키다, 숨기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명사형이 ‘카무플라쥬(camouflage)’인데 아마도 이것을 ‘캄푸라치’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말속에는 알게 모르게 프랑스어가 많이 숨어있거나 사용되고 있다. 그 단어들을 찾아내고 어원을 발견해 내는 것은 남의 나라 문화를 통해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일이니 문화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프랑스어 속담에 ‘ 두 가지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두 문화를 안다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언어는 문화의 출발이다. 프랑스어에는 프랑스문화가, 한국어에는 한국문화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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