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가을바람으로 휩싸여야 할 10월의 거리에, 절규에 찬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뿌려지고 있다. 존엄한 인격과 빼앗길 수 없는 생존의 권리를 짓밟히고 있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어느새 활화산(活火山)처럼 치솟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이 나라 정치권은, 그 돌이킬 수 없는 유혈(流血)의 현장과 성난 노동자 대중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권력과 자본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오늘날 한국정치의 추악한 진상(眞相)은 단지 정치자금의 연쇄폭로 속에서만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탄압함으로써 자본의 축적논리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정책을 고수, 매우 충실하게 <자본의 실무 운영위원회> 역할을 감당해나가고 있다. 이는 대자본으로부터의 정치자금 수수 차원을 넘는, “국가를 자본의 사유화(私有化)된 권력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누구를 대변하는 권력인가?**
언론과 대중들은 권력이 자본으로부터 과연 얼마의 돈을 받아 정치를 하고 있는가를 놓고 열을 올리지만, 정작 이 나라의 권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관철해나가려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는 돈을 받았는가 아닌가를 떠나서, 누구의 이익을 알아서 대변하고 있는 권력이 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달리 말하자면, 누구를 희생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서민대중들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권력이 되겠다고 했던 노무현 정권은, 투기성 금융자본을 포함한 초국적 독점 대자본과 국내 대자본의 목소리가 되고 있다. 권력의 계급적 기초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과 분신, 그리고 절박한 지경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철폐의 요구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 정치권 일반의 현실은, 이 나라 정치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득권 질서를 방어하는 작업에 우선적이고도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지배로 구축(構築)된 특권과 이를 떠받치고 있는 노동 배제적 정책의 청산 없이 개혁정치는 완연한 허구이다.
노동자들의 정치권력이 진압되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란 결국 기득권 세력의 정파적 권력투쟁에 머무를 뿐이며, 서민대중들의 현실적인 삶의 개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된다. 참여와 개혁을 외치는 노무현 정권이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차단하고, 자본의 패권적 지배를 극복해야 하는 개혁의 본질은 거론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권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패권적 지배를 극복하는 것이 개혁의 본질**
설왕설래가 있기는 하나 노무현 정권의 친위대 정당 성격을 지닌 <열린 우리당>의 경우, 그 내부에 중도좌파적인 진보적 정치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땅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명징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그것은 1930년대 독일 사회민주당 우파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지원과 그 정치적 결합을 포기한 채, 이른바 타협적 개혁주의 노선에 매몰되어 대자본의 요구에 하나하나 굴종하다가 결국에는 파시즘의 길을 열어나갔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패퇴는 독점 대자본과 독재적 권력, 군사주의 세력의 동맹체인 파시즘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제1세계에서의 파시즘은 제국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독점 대자본의 전략이지만,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있는 나라의 권력에게 파시즘은 제국주의와 내부 독점 대자본의 요구를 동시에 관철하는 중심 고리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치경제적 승리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가 파시즘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관건적 요체이다.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파시즘은 “노동운동의 패배에 대한 형벌처럼” 도래하고 말 것이다.
니코스 플란차스(Nicos Poulantzas)가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파시즘은 제국주의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문제”이며,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적 상황에서 파시즘은 제국주의의 하부구조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승리는 실로 긴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완성시켜나가는 근본적인 사회정치적 역량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승리가 파시즘을 막는 보루**
노무현 정권이 외양으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정체(政體)>를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보다 강력해진 행정부의 권력으로 의회권력을 약화시키는 가운데 대중들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권력 유지 기반의 강화를 겨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가볍게 간과할 일이 아니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서민대중들의 삶과 함께 하겠다는 애초의 출발과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체제의 특권적 기득권세력의 대변자로 변신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부 극우세력을 제외한 우파동맹의 정치적 결속, 그 중심에 서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냉전 수구적 파시스트 세력의 집결처라고 인식되고 있는 한나라당과, 그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했던 노무현 정권의 대미관계ㆍ노동정책상의 차별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냐, 라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계급적 기반과 제국주의의 요구에 순응하고 있는 권력의 내부적 정파투쟁의 차원에 불과한 정치적 격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 정권이 파병을 결정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하는 것은 그 권력의 본질적 성격이 파시즘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그 권력의 중요 결정에 민주적 참여과정이 봉쇄되어 있음이 확연해지고 있으며, 제국의 침략전쟁에 대한 군사주의 세력의 “협력”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대통령 자신의 공개적 폄하가 이루어진 것 등은 그 증거들이 된다.
***대미관계ㆍ노동정책, 노무현 정권과 한나라 차별성 찾기 어려워**
돌아보면,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이 대자본의 근본적 저항을 받은 바 없으며, 도리어 환영받고 있는 현실은 노동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운 지점에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발표를 했을 때, 전경련의 철회 촉구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이 그간 친자본적 좌표 위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입증해주는 한 간접적 단서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으로 대표되는 이 나라 권력의 계급적 기반에 대한 착각은 이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935년 <파시즘과 사회혁명(Fascism and Social Revolution)>을 출간한 팜 덧(Palme Dutt)은 전쟁을 체제위기의 마지막 수단으로 삼는 파시즘의 등장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겉으로는 개혁을 내세우면서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위장 진보주의세력”이라고 갈파했다. 이들은 현실의 모순을 명확히 파악해야 할 정세인식에 끊임없는 혼란을 가져오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무현 정권과 그 친위세력은 미국과 독점 대자본의 지배에 굴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병결정과 노동운동의 탄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참여와 개혁이 이들의 입에서 외쳐지고 있는 역설 앞에 우리는 서 있다.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묻는 법이 없이 권력은 날로 오만해져가고 있으며, 노동자들을 비롯한 서민대중들의 삶이 백척간두에 서 있어도 관심은 오로지 권력유지에만 집중되어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 나라가 얼마나 근본적인 변혁의 길에 들어서야 하는지를 절감하게 하고 있다.
***빼앗긴 혁명,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가 존중받고 보장되는 사회. 평화의 가치가 그 중심에 놓이는 나라. 민족의 존엄한 자주적 주권이 제국의 요구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는 국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치가 자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 않은 현실에서 가능한 것이다.
하여, 특권적 질서를 위해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권을 혁파하고 민중의 주체적 참여와 권리행사가 그 민주주의의 핵심이 되는 역사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이 시대의 사명일 것이다.
아나키스트인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그의 저서 <프랑스 대혁명사: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면 정치권력을 잡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는 부르조아 계급과,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 직접민주주의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민중 사이에서 대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혁명을 배반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들의 권력 장악으로 역사를 정지시키려는 자들이다.”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민중 자신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로 자율적 권리행사의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혁명”이다.
지난 해 4월 이 땅에 불었던 <노풍>은 바로 그 아나키스트적 민주주의 혁명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그 혁명은 지금 “배반의 고통”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빼앗긴 혁명의 열매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풀은 누었다 다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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