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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과 追憶談 속 만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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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과 追憶談 속 만취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8>

***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과 追憶談 속 만취**

40대 말까지의 주량은 엄청났다. 그때 선거에 출마해서는 회식이다, 초상집이다 하고 돌아다니며 하루에 2홉들이 소주 4~5병씩을 매일 마셨다. 백일쯤 그렇게 마시니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좀 부은 듯 하다가 저녁이면 가라앉고 다시 술이 들어간다.

그렇게 마셔댄 선거전 백일이 몸에 금을 가게 했다. 술실력이 2~3병쯤으로 줄었다. 그리고 70이 가까워지면서 1병이 적정량이 되고, 간혹 1병 반을 무리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음 맞는 젊은 패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 자제를 잃고 2병이나 또는 그보다 약간 더 마시고 만취하여 다음날 후회막급이게 된다.

주간지 <진보정치>의 이광호 편집위원장 등과 술을 할 때 아슬아슬한 고비까지 간다. 인터넷 뉴스 <프레시안>의 이근성ㆍ박인규씨 등 간부와 만나면 으례 내가 기분이 들떠 과음하게 된다.

그들은 언론계 선배인 나의 삶과 생각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하는 쪽이 되어버려 다음 날 듣는 입장이 되었었더라면 하고 후회하게 된다. 나이 들면 회고적이 된다. 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기가 일쑤다. 그래서 “죽으면 늙어야지” 하고 익살을 떨어가며 이야기한다. “늙으면 죽어야지” 가 어법에 맞는 것이지만 요즘 그것을 뒤집어 코믹하게 “죽으면 늙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6.25때와 5.16 당시의 내 이야기는 아찔하고, 잘 엮으면 단편소설 같은 느낌을 줄 만하다. 그러니 회고담을 하다보면 나도 자주 감정이 앙등하고 그럴 때마다 술잔도 계속 무리하게 기울이게 된다. 그 후 이은승 강서문인협회 회장의 곁부축을 받아 귀가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간단히 회고담을 소개하면―.

전쟁이 났을 때 중학 5학년(당시는 중학 6년제). 청주의 북방 50십리쯤 인민군이 왔을 때, 그리고 포격소리가 멀리 들릴 때 소개령이 내려 시민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긴 피난행렬을 이루었다. 반농ㆍ반수공업의 중의중 정도인 우리 집 식구들도 덩달아 구루마(수레의 일본말)에 짐을 싣고 걸어서 나섰다. 50리쯤 가서 산촌 농가에 몇 일 묵었는데 꽁보리밥ㆍ열무김치ㆍ멀건 고추장의 비빔밥이 맛이 있었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 인민군이 앞질러 진격했을 것이다. 우리는 청주 교외 10리쯤의 고향 농촌으로 가서 거기서 난을 피하기로 하였다. 백호 정도의 동네가 같은 씨족 집성촌이고 타성은 몇 집 안되었다. 나는 순탄한 피난 생활을 했다. 청주시내가 혹시 폭격 당할까봐 농촌을 택한 것이지 굳이 숨어 지낸다는 생각도 없었다. 공교롭게 작은 지파(支派)의 종손이기 때문에 의용군 문제에서 암묵리에 보호받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학교선생이 농촌 집으로 들이닥쳤다. 생물을 가르치던 경선생이다. 모두 등교하는데 왜 학교에 안 나오느냐고 학교로 가잔다. 10리가 채 안되는 길을 선생과 함께 걸어서 학교로 갔는데, 선생이 복도에 기다리라며 교무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는다. 그러나 우연히 엿들은 말이 “한 놈 잡아왔습니다.”

느긋하던 나는 긴장이 되었다. 곧 충북도청 앞에 있는 공무원 관사로 인도되었는데 거기는 대기소인 듯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묵고 있었다. 마침 그곳의 책임자가 깨떡이라는 별명인 송형이 아닌가. 그는 나와 청주상업학교를 2년간 같이 다녔는데 그 때부터 공산학생으로 활약했다. 나는 의과대학에 진학할 요량으로 청주중학교로 전학하였지만, 아마 그 송형은 사상적으로는 무색무취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학생으로 나를 기억했을 것이다.

어두워졌다. 나는 송형에게 자연스럽게 “송형, 우리 집이 시내인 거 알지. 불편하게 여기서 자지 않고 집에 가서 자고 새벽에 올게.” 하였다. 참 친구가 좋았다. 그는 그래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관사를 나온 나는 호구를 탈출한 듯 걸음을 서둘러 그야말로 꽁꽁 숨었다. 그래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며 혼자 감정이 파도쳐 연거퍼 술잔을 털어 넣었다.) 그 후 그 고마운 깨떡 송형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그 다음 5.16 때. 민국일보 정치부기자인 나는 군부세력이 혁신계를 때려잡으리라 예측하고 혁신계 친구들이 상의해오면 숨으라고 충고했었다. 당시 민국일보는 민족일보 다음으로 진보적인 신문이었고, 나는 국회출입을 하면서 혁신정당들을 담당하였으며 그 동네에선 꽤나 명성이 있었다. 오죽하면 민족일보의 조용수(趙鏞壽) 사장이 한턱내며 스카우트하려 했어도 나중에 보자고 거절했을까.

그런 내가 내 문제에는 무심하여 태연하게 남대문 옆에 있던 민국일보사에의 출근을 계속했다. 5월 18일이다. 버스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니 골목에서 회사의 운전기사가 나타나며 빨리 도망치란다. 정보기관에서 나를 잡으려 회사에 나타났는데 조동건(趙東健) 국장이 직원들을 팔방으로 풀어 나에게 귀띔하게 했다는 것이다. 조 국장은 연전(延專) 출신의 선비형 언론인으로 나를 각별히 아껴주었다. 4.19후 제2공화국의 초대총리가 누가 되느냐로 장면(張勉), 김도연(金度演)을 놓고 나와 단둘이 술내기를 하였다가 나에게 져서 한턱 쓰기도 하였다. 줄행랑을 치고 완전 잠적. 반년쯤 후에 잡혔는데 쿠테타의 분위기가 가시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니다. 조사 후 불문에 붙인단다. 그래서 예로부터 계(計)중에서 36계 줄행랑이 최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하다 보니 마치 그때가 재현된 듯 격해져서 술잔을 연거퍼 비운다. 그래서 폭음이 되고 만취가 되어 버렸다.)

사실 5.16후 혁신계를 때려잡은 것은 박정희씨가 미국으로부터 좌익으로 의심을 받고 있으니 혁신계를 엄벌하면 그것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계산이 있던 것 같다. 그런 내용을 믿을 만한 쿠테타 주역의 증언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혁신계 정치인들도 억울한 터에 그들의 정치활동을 사실보도한 정치부기자가 무슨 죄가 되겠는가. 물론 아무리 사실보도라 하더라도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에서의 균형감각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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