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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사실왜곡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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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사실왜곡 유감

김유주의 '방송산책' <21>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비정한 사내들의 세계를 1년여 동안 그려 온 ‘야인시대’가 지난 9월 30일 1백24회를 끝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작년 7월 29일 첫 회를 방송한 이래 14개월 동안 평균 시청률 40%이상을 기록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야인시대’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어야 할 시대극이었지만 다소 사실(事實)에 충실치 못한 점도 있었다.

필자는 김두한씨에 대하여 1969년에 동아방송의 ‘노변야화’ 프로그램으로 인연을 맺어 두 달 동안 방송을 한 후 그 후 서로 연락을 하며 타계 직전까지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신문만 참고했어도 피할 수 있었던 사실 왜곡**

드라마 후반부인 1백20회 전후는 4.19 당시의 신문만 참고했어도 사실에 충실할 수 있었던 사건들이다. 1960년대 고려대생들의 4.18 데모사건에선 고려대가 신입생 환영회를 위하여 준비한 수건을 머리띠로 사용했기 때문에 드라마상의 검은 글씨의 ‘고대’라고 인쇄한 수건이 아니었다.

학교를 출발한 후 고대생들은 태평로 국회 의사당에 집결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한 후 학교 측과 선배들의 만류로 평화적으로 귀교하던 대열을 폭력배들이 습격한 것이 고대 4.18 사건이었다.

이날 경찰은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지도 않았고, 당국과 학교 측의 타협에 의하여 경찰 선도차에 의하여 학생들의 대열이 인도되어 을지로 4가를 거쳐 종로 4가로 가던 중 천일극장(백화점) 앞에서 폭력배들이 습격하여 고대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면서 커졌다.

그 다음날인 4월 19일에도 드라마 상에선 고려대생들이 ‘고대’ 머리띠를 두르고 효자동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이것도 사실과 다르며, 이기붕 일가족의 출현시에도 둘째아들 이강욱이 너무 어리게 묘사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적 우편향**

‘야인시대’는 방영 초부터 역사왜곡이 심했다. 주인공 김두한이 일제에 항거한 민족주의자로 묘사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지난 3월부터 시작된 2부에선 해방직후 좌우익의 대립 중에 생겼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우편향의 시각에서만 조명되어 ‘반공 드라마인가?’ 라는 지적도 있어 당시의 사실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또 김두한의 말년이 아주 어둡게 조명되었으나, 김두한은 말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970년을 전후해선 정능계곡을 종합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과거의 부하들을 규합하여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고 재일교포 사업가 정건영씨와 손을 잡고 원대한 사업계획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외자도입계획이 실패되어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 당시 그는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며 여야 정치인은 물론, 많은 지인들과도 친교관계를 맺어 왔었다는 것을 본란을 통해 밝혀두고자 한다. 말년의 김두한은 드라마 상에서 보여준 것처럼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김두한에 대하여 ‘야인시대’ 열풍의 반대편에선 계속 비판의 목소리가 컸었다. 주먹패를 독립투사인양 미화했고 불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폭력의 우상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왜정시대는 선악의 구분이 분명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거리의 독립군’을 표방한 김두한의 다소 과장된 듯한 캐릭터가 시대적 분위기에 녹아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의 군정기와 이승만 정권기는 이념적 잣대와 판단근거가 모호하고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견이 분분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우 이념의 극단을 오가며 폭력을 휘두른 김두한에 대하여 역사적 과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드라마상의 ‘민족적 의인’ 김두한과 ‘폭력배의 우두머리’ 김두한을 같은 잣대로 과연 평가할 수 있을까?

이제 인기드라마 ‘야인시대’는 끝났다. 만주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의 아들로 태어나 왜정시대와 해방 후 좌우익대립의 한복판에 살았던 인간 김두한을 안방극장에서 되살려내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드라마는 분명히 중-장년층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인터넷과 케이블 등 뉴미디어가 활발한 요즈음,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꿈의 시청률’ 50%를 이룩한 것도 ‘야인시대’ 였다.

이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부천시의 오픈세트는 전체 1만평 규모의 대지 위에 2백여동의 건물을 통해 일제시대와 해방직후의 종로풍경을 복원시켜 부천시의 명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웠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후반부에 좀더 사실에 충실한 취재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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