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던 남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흑백 인종차별(Apartheid)은 이제 전설(傳說)이 됐지만, 중동 땅에서는 21세기 이스라엘 판(版) 인종차별이 진행되는 중이다. 인종말살 정책을 폈던 독일 히틀러 정권의 '최대 피해자'라고 여겨온 이스라엘이 히틀러에게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인종적으로 우수한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며 동성애자, 집시,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히틀러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중동 땅에서는 군사력에 바탕한 비인간적인 점령정책들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 1. 서안지구 라말라를 봉쇄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 초소(사진 -김재명)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이 세운 검문소와 방벽(防壁)으로 이동의 자유가 제한돼 있고, 농민들은 대대로 지어오던 농토에 다가갈 수가 없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진행중인 147km에 이르는 이른바 '보안 장벽' 공사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지만, 가자 지구는 이미 콘크리트와 철망으로 둘러싸인지 오래다. 열려진 출구라곤 지중해 바다뿐이고, 그 위에는 이스라엘 해군이 초계 중이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팔레스타인 경제는 붕괴 직전 상태고 남는 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절망감이다.
그들 상당수는 미국이 중재한 중동평화안(이른바 road map)에 대해서도 큰 희망을 걸지 않는다. 강경파 아리엘 샤론 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트집을 잡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최종 단계로 삼는) 중동평화의 길목을 막으리라 여긴다. 현지 취재길에 팔레스타인 북부도시 제닌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아낙네들은 "우리는 창살만 없을뿐, 거대한 집단수용소에 갇혀 사는 처지"라고 눈물지었다. 평생 노동으로 꺼칠한 피부에 주름진 그녀들의 얼굴에서 일제하 식민지 시절 고난 어린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할머니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결혼해도 이스라엘에 살 수 없다"**
뉴욕 맨해튼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1시간쯤 차를 달리면 뉴저지주 패터슨 카운티가 나온다. 이곳 거리에는 아랍어로 쓰여진 간판을 내건 상점들이 많다. 아랍계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회교사원도 보인다. 금요일이면 이들은 이곳에 모여 예배를 드린 다음 친교 시간을 갖는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알라 신에게 기도할 때마다 중동 땅에 두고 온 가족들의 안전을 빈다. 그리고 중동 땅에서 뭔가 사건이 터졌다 하면, 전화통을 붙잡고 안부를 묻곤 한다.
<사진> 2. 이스라엘 군에 초토화된 제닌 난민 수용소. (사진 -김재명)
왈리드 가삼(39). 필자의 팔레스타인 친구로, 헌책 판매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가삼은 서안지구 베들레헴에 있는 가족들 걱정으로 매주 한번씩은 전화를 건다. 한달 내는 국제전화료는 50달러쯤으로 그의 소득에 비해 만만찮다. 그래도 노모의 목소리를 듣는 게 큰 위안이자 그 나름의 효도라 여긴다. 왈리드에겐 최근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그의 여동생이 서(西)예루살렘에 사는 한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결혼을 하더라도 함께 살기가 어렵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31일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가 이스라엘 국적을 지닌 아랍인이 비국적자(피점령민)인 팔레스타인 사람과 결혼할 경우, 이스라엘 국경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가 없고 시민권을 받지 못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킨 탓이다. 일부 연인(戀人)들은 결혼을 해도 함께 살 수가 없는 딱한 처지로 내몰렸다.
샤론 정권은 이미 지난해부터 사실상 이 정책을 시행해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스라엘 내 이동을 막아오다가 아예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1년 시한의 한시법으로 통과된 이 법은 내년 이맘때쯤 다시 연장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샤론의 리쿠드 당을 비롯한 이스라엘 우파 정치인들은 법안에 대한 비판이 안팎에서 일자,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전쟁중"이란 반론 한마디뿐이다. "전쟁이란 비상시국이므로 인도주의적 차원이니 뭐니 안 먹히는 한가한 얘긴 꺼내지 말라"는 투다. 샤론 정권은 지난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 봉기) 뒤 "결혼으로 합법적인 주거허가를 받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진 20건의 공격으로 49명의 이스라엘 시민이 죽은 데에 어떤 형태로든 연루돼 있다"고 주장한다(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이 맺어진 뒤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획득한 팔레스타인 사람은 약 10만명이다).
샤론 수상이 '좌파''배반자 집단'이라고 몰아부치는 이스라엘 평화운동단체들은 새 법안에 매우 비판적이다. 중도적 성향을 지닌 '지금 평화'(Peace Now), 급진적 성향의 구시 샬롬(Gush Shalom) 배트 샬롬(Bat Shalom) 같은 단체 활동가들은 "100만명 가운데 단 20명이 자살폭탄공격 등에 연루됐을 뿐이데, 보안을 구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집단적 징벌을 가하는 악법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현재 이스라엘 인구는 620만. 이 가운데 100만이 아랍계, 즉 팔레스타인 출신들이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샤론의 보안 논리는 겉치레 구실일 뿐이다.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로 유지 발전시키려면 '이물질', 즉 팔레스타인계가 끼어들게 해선 안 된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인구지도를 어떤 수단으로든 유대인 다수로 유지해야 한다는 그들 나름의 정책적 판단이 깔려 있다.
***아랍계의 높은 출산율이 변수**
<사진> 3. 인티파다(봉기) 과정에서 죽은 팔레스타인 전사의 포스터.(사진-김재명)
중동 지역의 인구분포 변화는 격동의 중동사(史)만큼이나 참으로 무쌍하다. 제1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17년 영국의 외상 아서 발포어가 "아랍인의 희생이 없는 범위 안에서"라는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부로 유대인 국가설립에 찬성한다며 '발포어 선언'을 낸 뒤 유대인들의 중동 이주가 본격화됐다. 그 5년 뒤 1922년 이 지역 인구는 아랍인 59만, 유대인 8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엔 아랍인 110만, 유대인 55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절대적으로 머릿수에서 밀렸다. 그러나 이스라엘 독립선포로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던 1948년 앞뒤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 난민 신세로 전락했고, 이스라엘 내 인구분포는 유대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1967년 6일전쟁이 벌어질 무렵 이스라엘엔 유대인 191만, 팔레스타인 원주민 16만5천명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 영토에 남아있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6일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하자, 이스라엘은 이들 피점령민들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배우자(아랍계)와 결혼할 경우, 이들에게 영주권을 주고 이스라엘 내 거주를 허용해 왔었다. 그동안 이스라엘 유대인은 동구권과 러시아 등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와 520만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아랍계도 왕성한 출산율로 지금 이스라엘 내 합법적 거주자는 100만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 410만(서안지구 310만, 가자지구 100만)과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계를 합하면 500만을 넘는다. 이스라엘 유대인 인구와 팔레스타인 인구를 비교하면, 거의 1대 1이다 (이웃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뺀 비율이다).
그러나 이 균형은 곧 무너질 전망이다. 아랍계 가정은 산아제한 개념이 없다. 필자가 중동 현지취재를 갈 때마다 새삼 놀랐던 것은 10명 넘는 아들딸을 두고 있는 집이 흔했다. 반면 유대인 가정은 종교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 빼고는 자식이 2-3명 또는 하나가 일반적이다. 지금 출산율 추세대로라면 2020년에 이들이 이스라엘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0%가 넘어설 전망이다. 이는 곧 팔레스타인 계 유권자 비율이 30%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좌파로서 1993년 오슬로 평화협상의 주역이었던 노동당에겐 잠재적 지지기반이 되겠지만, 아리엘 샤론 같은 인물들이 버티고 있는 리쿠드 당에겐 우울한 소식이다. 팔레스타인 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력한 아랍계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이스라엘 우파들은 인구지도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해왔다. 이스라엘 하이파대학의 아논 소퍼 교수는 "2020년이 되면 이스라엘과 점령지에서의 아랍계 인구가 거의 60%에 이를 것"이란 보고서를 냈었다. 소퍼 교수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샤론 수상에게 별도의 브리핑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랍계 이스라엘 인들의 고민**
4.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전사의 장례식(사진-김재명)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1백만 명의 아랍계는 심리적 갈등으로 괴롭다.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 시절을 떠올리면 이스라엘 군의 무단(武斷)통치와 동족 학살에 그들이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2000년 9월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된 이래 지금껏 16명의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이 이스라엘군에 시위로 맞서다 피살됐다. 중동취재 길에 만났던 아랍계 시민들은 "나서자니 힘이 없고, 가만있자니 답답하고 무력감을 느낄 뿐"이란 푸념들을 털어놓았다.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의 경계선에 가까운 다마스쿠스 문앞 광장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만났다. 모두 이스라엘 시민증을 갖고 있었다. 이 젊은이들이 털어놓은 고민은 "이스라엘 인도 아닌, 그렇다고 법적으로 팔레스타인 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에서 오는 불이익"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처럼 병역의무는 없다. "이스라엘 정부도 우리들 손에 총을 쥐어주고 싶지 않을 것"이라 한 젊은이는 말한다. 이것도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이다. 병역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번듯한 취업이 어렵다. 이른바 이스라엘 주류사회에 진입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지난 2001년 12월 이래 서안지구 라말라 집무실에 갇혀지내면서 샤론의 탄압을 견뎌온 인동초(忍冬草)다. 그는 "시오니스트(Zionist)들에 대항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랍여성의 자궁"이란 말을 남겼다. 유발 스타이니츠(리쿠드당 총무)같은 이스라엘 우파들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했던 말을 물고 늘어지면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내부에서 흔들어대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인구문제에 이스라엘이 생각해낼 수 있는 묘안이란 별로 없어 보인다. 아랍계 출산에 특별세금을 물리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기껏 이 글 앞에서 살펴본, 결혼 뒤 이스라엘 내 이주 금지 같은 비인도주의적 조치 정도다. 현재 서안지구에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무릅쓰고 강행하고 있는 '보안 장벽' 공사로도 중동 인구지도가 이스라엘에 불리하게 바뀌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국제평화유지군 파병 왜 못하나**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두 건의 자살폭탄이 터졌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른바 중동평화 이정표(road map)는 곳곳에 지뢰밭이다. 1967년 이래 이스라엘 군이 불법 점령해온 팔레스타인 땅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중동사태는 자살폭탄-응징-보복이라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어느 날엔가 대폭발의 극점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중동 취재길에 만났던 도어 골드(전 유엔대사, 현 샤론 수상 보좌역)는 "우리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었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우파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에 별로 뜻이 없다. 이른바 중동평화 단계적 이행안(road map)에 까다로운 갖가지 조건들을 제기하는 걸 보면, 뜻이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샤론 같은 극우파 정치인들이 이스라엘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한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의 자살폭탄 공격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12억 인구를 지닌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을 말로만 비난할 뿐 이렇다할 도움을 팔레스타인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한결같이 비(非)민주국가들인 이들은 국내 반대세력 억압에 반 이스라엘 정치정서를 이용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었으나, 정치적으로 거의 사망상태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비롯한 이웃국가들은 입으로는 "아랍형제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돕자"고 하지만,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다.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면서 <아라파트 죽이기>에 열중하고 있는 부시 미 행정부도 중재자로선 '자격 미달'이다.
필자의 결론은 중동평화의 길을 제대로 닦으려면, 이스라엘이 점령중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제평화유지군 파병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는 중동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지구상에는 많은 평화유지군이 나가있다. 아프리카 시에라 리온같은 작은 나라에도 현재 1만4천5백에 이르는 유엔평화유지군(UNAMSIL)이 배치돼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주권 침해를 이유로 두 손을 내저으며 반대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제평화유지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 UNASIL 병력의 3분의 1 규모(5천명)만 보내도 중동 상황은 확 달라질 것이다. 이를 가로막는 큰 장벽들은 국제사회의 이기적 무관심도 한몫 하지만, 유엔을 지배하는 초강대국 미국이다. 미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 샤론정권과 손을 맞잡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제적인 민간 감시단을 보내려는 유럽 국가들의 노력조차 막아왔다. 중동 평화의 길은 참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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