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나라는 영미문화에 익숙하므로 생활 속에서 영어단어는 거의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알게 모르게, 공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으로 국민의 의식과 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교육현장과 언론에서는 특히 영어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영어의 일상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어생활 속에서 프랑스어도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다. 사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지성과 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고 프랑스어는 인류의 언어유산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샤넬, 입생 로랑, 피에르 가르댕 등 고급 브랜드는 대부분 프랑스산이지만, 정작 프랑스어는 제2외국어라는 이름으로 천대받고 있다.
오늘날 식자들은 입만 열면 세계화, 국제화를 이야기한다. 세계화시대에 접어들면 다언어 사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영어편중이 지나친 우리 사회에서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등 제2외국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름아니라 영미권 프리즘의 독선과 편향을 견제할 수 있는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가지, 프랑스어는 문화의 향기와 격조를 담고 있는 문화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어를 통해 우리는 문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세계문화사에 프랑스어가 끼친 영향력은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크다. '데땅뜨'를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국제정치를 논할 수 있으며, '랑데부', '데뷔', '뉘앙스' 같은 일상어를 어떻게 다른 언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소스나 레스토랑, 뷔페, 카페가 없는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할까? 이렇게 프랑스어가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남겨준 언어적 유산이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일상 속에서 쓰이는 프랑스어들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오용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며, 언어사용자들 또한 프랑스어와 그 문화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필자는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사회문화적 시각의 폭을 한층 더 넓혀보고자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
항상 첫 단추가 중요한데, 고심끝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선택했다. 언론이나 지식인들은 심심찮게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이야기하고 있다. IMF가 터지고 지식인들이 사회지도층과 지식인층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이 말이 제법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쨌거나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을 사용하면서 일단 그 표기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마도 프랑스어를 모르는 식자가 영어식으로 읽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표기했던 것 같은데, 프랑스어 발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쥬"이다. '노블레스'는 원래 귀족이란 뜻으로 사회적 상층을 가리키고, '오블리쥬'는 동사인데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블레스 오블리쥬'란 '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의미한다. 고위공직자를 비롯하여 사회지도층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이니만큼 사회적 의무에 대해서도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서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 천년을 지탱해준 철학은 '노블레스 오블리쥬''라고 지적한다. 로마의 노블레스(귀족)는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칼을 들고 피를 흘렸다고 한다. 로마귀족들은 노예와 귀족의 차별성을 사회적 책임이행능력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이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거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이런 사회지도층의 역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오피니언 리더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극심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금언이 아닌가 싶다. 특히 우리 사회 상층의 도덕적 해이는 자식의 병역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의 상층은 사회적 의무에 대해 솔선수범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병역면제를 받으면 '신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사회적 상층들이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영국 최고명문을 자랑하는 사립중등학교 이튼 칼리지 내의 교회건물에는 1차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 이 학교 졸업생 1천1백5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2차대전에서 사망한 졸업생의 명단도 새겨져 있다. 이 학교는 조지 오웰, 셀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고 역대 영국총리 중 19명이나 배출한 명문학교이지만,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전쟁이 나면 대거 참전해 사회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때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한 상징적인 일화이다.
1차대전때 독일의 귀족 리흐트호헨 남작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전투기조종사로 참전했는데 자신이 탑승한 지휘관기가 적군의 눈에 가장 잘 띄도록 새빨갛게 칠해 전투기편대의 최선봉에서 싸우다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산화했다. 사람들은 그를 붉은 남작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기억했다.
총인구 5백60만명이 1억 8천만 아랍인구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국가를 지탱하고 오히려 군사력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도 사회지도층은 솔선수범해 총을 들었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중 대부분은 전쟁공로자이거나 장교출신이다. 한국전쟁당시 많은 외국군인들이 연고도 없는 땅에서 전사했는데 외국인 전사자명단에는 유엔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과 중국 마오쩌뚱 주석의 외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지도층들은 어떠했는가. 가난한 농촌 청년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는 마당에 부자들은 도망가기 위해 부산 앞바다에 배를 띄워 놓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사회지도층, 상층의 도덕적 불감증은 오늘날 병역기피현상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지도층과 일반국민간의 갈등은 지역감정만큼이나 고질적이고 심각하다. 무전유죄·유전무죄의 현실, 사회지도층 자녀의 병역면제, 부유층의 원정출산 등은 우리 회의 골깊은 계급갈등을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이런 사회지도층의 모럴 해저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덕적 혁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이 누리는 명예나 권력, 부만큼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솔선수범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쥬 혁명'말이다.
***필자 소개**
필자 최연구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빠리 7대학 대학원에서 정치사회학 DEA(예비박사)학위, 마르느 라 발레 대학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국제관계전공)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3년간 한겨레 21 빠리통신원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한국판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대학신문> 전문위원을 맡고 있다.
역서:'지정학 입문'(새물결,1997),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의 지성이 전하는 21세기의 메시지'(백의,2001), '위기의 아시아'(삼인, 2002)
저서: '빠리이야기 - 나폴레옹의 후예들'(새물결,1997), '프랑스 실업자는 비행기를 탄다'(삼인,1999), '세계화와 현대사회 읽기(한울, 2000), "프랑스 문화읽기(중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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