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초기부터 파행을 겪고 있는 방송위원회가 디지털방송전환과 방송·통신융합대책 마련 등 산적한 현안을 안고 있는 방송계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지난 10일 출범한 제2기 방송위원회는 15일 현재 이효성 성균관대 교수의 부위원장 선출을 날치기라고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불참으로 상임위원 구성을 위한 전체회의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일부 방송위원들의 임명에 반대하며 2기 방송위원회 전면 재구성을 요구하고 있는 방송위 노조가 10일째 총력투쟁과 3일째 출근저지투쟁을 펼치며 방송위원들의 출근을 막고 있어 이미 3개월간 사실상의 공백기를 겪은 방송위 업무가 아예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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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위, 종이호랑이 넘어 유명무실해졌나"**
한마디로 방송정책을 다뤄야 할 방송위원회가 날치기와 장외투쟁으로 날을 새우기 일쑤인 정치권의 축소판이 돼버린 상황에서 방송과 통신의 융합시대를 맞아 방송계가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방송위는 종이호랑이란 비아냥을 넘어 아예 유명무실해진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같은 사태가 발생한 근본원인과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작금의 사태가 발생한 진원지는 무엇보다 지난 2월 12일 임기가 만료된 방송위원회 구성을 방송위원 배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달 30일에야 그야말로 어거지로 야당몫 상임위원 2명 배정을 골자로 한 방송법 개정에 합의한 여야 정치권이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위한 방송통신위원회 설치 등 방송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문제들은 도외시한 채 젯밥인 방송위원 추천몫에만 관심을 기울인 결과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지난달 4일 "방송위 상임위원 4명중 야당 추천 몫이 한 명도 없는 구조는 불리하다"며 현행 방송법상 대통령과 국회의장, 국회 문화관광위원회가 각각 3명씩을 추천하게 돼 있는 방송위를 대통령 1명, 국회 추천 6명으로 변경하자는 방송법 개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13일 이규택 원내총무의 개정주장으로 다시 불거지고 있는 방송법 개정안 배경에 대해 서동구 전 KBS 사장의 임명파동과 관련해 방송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과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등이 서 전 사장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서 전 사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고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적 독립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물론 집권여당인 청와대와 민주당도 방송위의 파행을 불러온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당 또한 KBS 사장 임명과정에서 불거진 청와대 개입논란부터 방송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방송위원 몫은 물론 상임위원 분배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정치논리를 개입시켜 '한나라당에 밀리면 안 된다'는 당리당략적인 접근방식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사실상 여야 모두 방송의 발전과 독립을 목적으로 출범한 방송위원회의 위상강화보다는 논공행상의 대상, 혹은 방송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방편으로 방송위 구성문제에 접근해왔다는 분석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여온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율배반적 방송위원 추천**
그러나 막상 여야 합의로 방송법을 개정한 뒤 나타난 여야의 방송위원 선임과정을 보면 한나라당에 돌아갈 비판의 몫이 더 크다. 한나라당은 지난 3월 25일 '공영방송 장악기도를 중단하라'는 논평에서 서동구 전 사장의 임명에 대해 자격미달·자질미달이라며 노 대통령의 언론고문으로 활약해 공정방송의 필수조건인 정치적 중립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비판했었다.
한나라당은 또 정연주 KBS 사장의 임명에 대해서도 지난 2일 '청와대의 방송장악 집념, 가히 병적 수준이다'는 논평을 내고 지명관 이사장이 제기한 청와대 개입설을 인용하며 "이 모든 과정은 노무현 집권세력의 부도덕성, 부정직성,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면서 "청와대의 방송장악 도구임이 판명된 정 사장은 이번 달 말로 예정된 재신임에서 당연히 탈락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정 사장의 칼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또 서 전 사장이 당적도 없는 언론고문을 지냈다는 이유로 방송의 정치적 중립이 훼손된다고 비판해놓고는 막상 방송위원을 추천할 때는 상근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언론특보를 지낸 양휘부씨를 상임위원으로 밀었다. 양씨의 경우 한나라당이 추천한 박준영 전 SBS 감사나 윤종보 전 안동MBC 사장과는 달리 당지도부와 국회 문광위 소속 의원들의 의견이 일찌감치 일치돼 있었다.
여기에 한나라당이 추천한 인사들이 모두 지상파 방송3사 출신이라는 점도 방송위에 대한 한나라당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의지를 확인하게 한다. 청와대가 노성대 전 MBC 사장을 방송위원장 몫으로 내정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애초 임형두 전 방송위원과 최창섭 서강대 교수를 추천하려고 했던 한나라당 문광위원들이 당 지도부의 뜻을 좇아 박준영씨와 윤종보씨를 서둘러 방송위원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양휘부 방송위원 상임위원 자격없다" vs "문제 없다"**
지난 10일 처음 열린 방송위 전체회의에서는 조용환 방송위원(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이 양휘부 방송위원에게 방송위 부위원장은커녕 상임위원 자격도 없다는 점을 문제삼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수적 우세로 밀어붙여 통과시킨 방송법 개정안 21조 4항은 "상임위원중 2인은 대통령이 속하지 않은 교섭단체의 대표의원과 협의하여 추천된 자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양 위원은 국회 교섭단체인 한나라당 추천이 아니라 문화관광위원회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법리적·문리적으로 볼 때 상임위원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한나라당 문광위 간사인 고흥길 의원측은 "애초 방송법 개정시 협의주체를 넣기가 애매해 넣지 않았지만 야당몫 상임위원을 2명으로 하려는 입법취지나 한나라당 대표위원이 방송위원을 추천하며 양 위원을 상임위원 몫으로 추천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법 조문에 대한 문리해석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반론했다.
고 의원측은 또 양 위원의 정치적 중립성 논란에 대해 "한나라당 문광위 소속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32명의 후보를 놓고 평가한 결과 전문성과 개혁성, 경륜 등에서 양 위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서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언론특보를 지냈다는 부분은 별개문제라고 생각한다. 또 KBS 보도국 간부까지 지낸 양 위원이 방송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정부여당 독주 막기 위해 방송법 개정 불가피했다"**
고 의원측은 방송법 개정목적에 대해서도 "현재 여당측에서 추천된 방송위원들을 보면 대부분 정부여당의 노선과 가깝다. DJ 정부 당시 여당측에 유리한 방송위원 구성으로 방송계 인사가 이뤄져 이번에는 일부라도 한나라당 몫을 늘려 여당의 독주를 막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며 "이번에도 여당추천 방송위원들이 한나라당 의원들이 없는 자리에서 이효성 교수를 부위원장으로 선출한 것을 보면 방송의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주장은 결국 여당측의 방송장악 기도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야당몫 방송위원을 늘리기 위한 방송법 개정이 필요했으며 양 위원의 방송위원 추천은 정치적 중립성 시비와는 별개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이같은 주장을 바라보는 방송계의 시각은 크게 다르다. 당장 2기 방송위원회 전면재구성을 요구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방송위지부(위원장 김도환)는 15일 민주당이 제기한 양휘부 위원의 "오늘 (대통령과)같이 사진 찍으면서 착잡한 심정이었다. (청와대)주인이 바뀐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는 발언에 대해 '방송위원회를 정치판으로 만들지 말라'는 성명을 통해 "정치인 양휘부씨는 정치판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방송위 노조 "양휘부는 정치판으로 돌아가라"**
방송위 노조는 "우리는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민주당의 주장이나, '농담한 것을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한나라당의 변명에는 관심이 없다"며 "문제의 본질은 한나라당이 주연을 맡고 민주당이 조연을 해 완성한 '개악 방송법'을 근거로, 여야가 당리당략적 관점에 입각해 정치색이 농후한 인사와 무능력한 인사 등 부적격 인사들을 방송위원으로 추천함으로써, 방송위원회를 정치의 축소판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지적했다.
노조는 또 "방송위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는 선두주자격인 양휘부씨의 정치적 행보는 쭉 이어지고 있다"며 "양휘부씨는 부위원장 선출을 놓고 벌어진 무자격자들끼리의 시비를 가지고 친정인 '한나라당 당사'에 가서 기자회견을 했는가 하면 앞서 밝힌 것와 같이 청와대에서 정파성이 있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함으로써 자신이 이회창 전대통령후보의 언론특보였음을 재차 확인했다"고 비판했다.
***"방송위원회 업무와 정치권 이해관계는 전혀 다른 문제"**
한 방송계 고위인사는 자금의 방송위 파행을 지켜보며 "1기 방송위원회도 정치적 영향력을 뿌리치기가 힘들었었는데 2기 방송위원회는 그야말로 정치권의 축소판이 된 꼴이다. 앞으로 방송계 인사 등 건마다 여야 정치권의 입김에 방송위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또 "방송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은 여야의 형평을 고려한 자리 나눠먹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방송위원들의 방송에 대한 전문성과 식견, 방송정책 수립에 필요한 법리적 지식과 해석능력을 바탕으로 이뤄진다"며 "차제에 방송환경이 변화된 점을 고려해 국회가 6명의 방송위원을 추천하도록 돼있는 법규정을 개정해 과거 방송위처럼 대법원장에게 3명의 추천권을 주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국회가 방송위원을 6명이나 추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 법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다른 방송계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방송위원회의 업무중에 정치적으로 해결할 일은 거의 없다"며 "있다면 15일까지 완료됐어야 하는 KBS 이사임명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 등인데 여야가 방송위원 배분문제에 골몰하는 이유는 바로 이같은 방송계 인사에 대한 관심 때문이지 진정한 방송의 정치적 독립이나 중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 2000년 많은 기대를 안고 출범한 1기 방송위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보다 당시 방송위원들의 전문성과 독립성, 업무추진력이 부족했던 점과 방송법의 제도적 미비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의도 국회가 언제 목동 방송회관으로 이사했나"**
그런데 2기 방송위원회는 아직 검증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파열음만 요란하게 내고 있다. 전체회의를 열자마자 부위원장 선출을 둘러싼 '날치기' 소동이 일더니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방송위 상임위원이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이제는 장외투쟁으로 돌입한 것이다. 국회와 정치인들이 왜 국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지를 이제는 방송위원들이 재연하고 있는 꼴이다.
"여의도 국회가 언제 목동 방송회관으로 이사했느냐"는 비판도 나올 법하다.
이같은 사태가 지속될 경우 '국회 식물론'처럼 '방송위 무용론'과 '해체론'까지 거론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새로 탄생한 2기 방송위가 한시라도 빨리 제자리를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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