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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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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자화상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

I. 만리장성과 미국-멕시코 국경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는 만리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미국-멕시코 국경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헬프>는 1963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주의 잭슨 시에서 흑인 가정부와 백인 여성이 서로 손을 맞잡고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헬프>에 등장하는 가정부 흑인 여성 에이블린(바이올라 데이비스 분)과 작가 지망생 백인 여성 스키터(엠마 스톤 분)의 서로 맞잡은 두 손을 보면서 그 옛날 만리장성의 벽을 허물어트리는 아시아 민중의 연대와 그 언젠가 무너질 것이 분명한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가로지르는 미국과 멕시코 민중의 연대를 상상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성이다. 전근대적 풍경의 만리장성을 근대적 풍경의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과 비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이 전근대적인 중화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은 근대적인 백인 중심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미국은 백인 남성, 그것도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남성들만을 위한 나라이다. 그러나 과거의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화주의의 지배를 강화하였지만 만리장성이 허물어지면서 몽골과 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것처럼, 언젠가 미국은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다인종과 다문화의 국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때가 되면, 미국은 서구 유럽의 백인을 대표하는 국가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아메리카 대륙의 한 나라가 될 것이다.

▲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헬프>(2011)

만리장성의 거리는 2700km인데 반하여 미국-멕시코 국경의 거리는 3200km이다. 만리장성이 몇 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처럼,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도 몇 대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가 무엇이고, 미국이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쌓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오랑캐로 치부하며 중국 내부에서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고, 미국이 미국-멕시코 국경의 장벽을 쌓는 이유는 장벽 너머의 멕시코인들을 포함한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치부하며 미국 내부에 있는 그들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 옛날 중국 내부에 중화인들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중화인들보다 더 중화인 행세를 하는 만리장성 너머의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미국에도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행세를 하는 이명박이나 그의 형 이상득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 주의 잭슨 시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아슬아슬하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운 상호 연대의 투쟁을 보면서 마냥 즐겁지 않은 것은 아파르트헤이트를 토대로 한 근대적 지식과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스키터가 에이블린과 그녀의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헬프(The Help)>라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서구·백인·남성 중심의 근대적 지식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미국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들의 국가보안법이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등장하기 이전의 남아프리카 백인 아프리카너들의 국가보안법이었다. 1990년 이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과 1960년대 미시시피 주와 같은 미국의 남부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는 흑인·여성·노동자·어린이·자연의 시각에서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면 악마이고 마녀이며 빨갱이라는 근대적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러한 근대적 지식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백인·남성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 권력을 중심으로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학과 오직 개인주의적인 자본의 이익으로 각각의 삶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적 지식은 근대 이전의 만리장성이나 근대적인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나 베를린 장벽 혹은 한반도의 휴전선 장벽과 같은 지역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을 통하여 유지되고 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근대적 상식의 이데올로기는 자유 민주주의의 정치학과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의 근대적 지식만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사회와 국가 내부의 남성과 여성의 대립, 백인과 흑인의 대립, 어른과 어린이(청소년)의 대립,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구성한다.

II. 근대의 아파르트헤이트와 노예 노동자

흑인 노예제도와 아파르트헤이트가 오늘날의 미국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수정헌법 13조를 통하여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그리고 1964년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남부의 몇몇 주에서 실행하던 인종차별법을 폐지시켰지만, 노예제도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인종차별법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일상의 지식은 오늘날의 미국 중산층 백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가 테이트 테일러 감독을 만나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하기 이전에 미국에서 출판되지 못한 배경이기도 하다. 소설가 캐서린 스토킷과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가 <헬프>를 쓰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영화 <헬프>에서 등장하듯이 끊임없이 현재의 성인이 된 스토킷과 테일러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1950년대나 60년대 혹은 70년대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 기억의 느낌과 감각은 영화 속에서 스키터가 주위로부터 곤경에 처할 때마다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으로부터 듣는 "너는 친절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며, 귀중한 사람이야(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라거나 영화에서 밥 딜런의 노래로 흘러나오는 "두 번 생각하지 마라, 너 자신이 옳다(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라는 탈근대의 지식이다.

▲ 영화 <헬프> 중 한 장면


어른이 되어서, 혹은 성인이 되어서 "두 번 생각할" 때, 우리의 삶에는 근대 자유 민주주의 정치학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게 되거나 자유주의(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손익계산서가 작동하게 된다. 그러한 근대의 정치학과 경제학의 이성이 개입했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힐리 홀브룩(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분)처럼 그녀의 삶은 느낌과 감각을 잃어버린 현실적인 남성 정치의 부속물이 되고, 그녀의 사랑은 그녀 앞에 있는 흑인 가정부는 멸시하면서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라는 경제적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옷의 화려함이나 외모와는 상관없이 스키터가 콘스탄틴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마음이 비열할 때가 정말로 못생긴 것이야(When your mind is mean, that's when you is really ugly)"라는 콘스탄틴의 가르침은 힐리에게 너무나도 잘 적용된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학과 경제학의 이성은 에이블린이 만든 케이크의 동맛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이성이다. 따라서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정치학이나 손익계산서의 경제학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는 힐리 홀브룩보다는 차라리 소녀에서 여성으로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한 셀리아 풋(제시카 차스테인 분)의 천방지축의 순수함이 더 1960년대 미국 중산층 여성의 전형에 가깝다. 흔히 근대적 여성의 백치미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셀리아나 콘스탄틴이 올바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스키터의 엄마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흑인 가정부나 그 옛날 노예 보모 밑에서 자라난 미국 중산층 백인 여성의 전형이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지 못한 셀리아 풋과는 달리 소녀에서 여성으로 성장하였지만 근대 정치학의 이데올로기가 경제학의 손익계산서에 물들지 않고 소녀의 감각과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스키터, 혹은 소설 <헬프>의 저자 캐서린 스토킷이나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의 탈근대적 지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난 500년의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백인·남성이 아닌 비서구·유색인·여성은 노예에서 "이주노동자(cooly)"로, 이주노동자에서 정착노동자로, 그리고 정착노동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끊임없이 변화하였을 뿐, 서구·백인·남성의 세계지배는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적 세계는 비록 그 제국주의 지배권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영국과 프랑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동하였거나 폭력과 전쟁에서 법률이나 국가적 제도들로 변화했을지언정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정치학과 경제학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지식에는 변함이 없다. 소설 <헬프>와 영화 <헬프>는 아직도 그런 서구·백인·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적 이성에 물들어 있는 미국 백인들에게 "너희는 흑인의 똥으로 만든 케이크를 먹고 자라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1960년대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서 영화 <헬프>에 등장하는 스키터나 에이블린 혹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 분)와 같은 탈근대인들의 연대를 통하여 비로소 탈근대의 꿈을 꾸기 시작한 시대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탈근대의 꿈은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이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다. 그 꿈은 "미국이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며, "조지아 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이고,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과 영화 <헬프>에 등장하는 스키터나 에이블린 혹은 미니와 같은 사람들의 탈근대의 꿈은 아직도 미국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지난 500년의 근대화 과정이 노예에서 이주노동자로, 이주노동자에서 정착노동자로, 그리고 정착노동자에서 다국적 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변화되었듯이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제국주의 국가가 근대 제국주의 지배 전략을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농장 노예가 아니라 공장 노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정한 노예해방인줄로 착각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가 근대에서 벗어나는 탈근대로 착각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나와 마찬가지로 "너도 소중하다(you is important)"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모든 지식은 사이비 지식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국 탈근대의 꿈은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내 아이들이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너는 친절하고, 훌륭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 그리고 대한민국이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 서해의 푸른 바다와 연평도의 "붉은 언덕에서 북조선의 후손들과 남한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 그리고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판문점이나 국회나 검찰이나 청와대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이 바로 대한민국과 한반도가 지니고 있는 탈근대의 꿈이다.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남한이 북조선을 야만인으로 취급하거나 지역차별과 학력차별 그리고 이주민 노동자의 차별은 영화 <헬프>가 1960년대 미시시피 주의 진정한 야만인들은 미국 백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진정한 야만인들은 대한민국의 중상류층을 대표하는 강남 사람들이거나 국회의원, 판사나 검사, 혹은 교수나 의사, 그리고 그들의 연인이나 부인들이다. 그러한 근대적 야만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영화 <헬프>의 스키터처럼 대한민국의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이주 새터민들, 그리고 북조선의 인민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III. 탈근대의 꿈

▲ 영화 <헬프> 중 한 장면

영화를 보고 나서 스키터와 에이블린 그리고 미니의 생기발랄하고 유쾌한 반란이 마냥 즐거움과 웃음으로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국회에서 한미 FTA가 날치기로 통과되었다는 소식 때문이다. 미국이 미국 내부의 탈근대의 꿈을 잠재우기 위하여 도입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 자유무역협정이다. 그것은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주나 조지아 주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차별을 통한 값싼 노동력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대립, 백인(내국인)과 흑인(외국인)의 대립, 어른과 어린이의 대립,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멕시코나 중남미의 국가 혹은 한국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마치 미국 백인들의 밥과 빨래와 아이 보육을 해주면서도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는 에이블린이나 미니처럼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맺었으면서도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을 강화하여 멕시코를 다국적 기업을 위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북미자유무역협정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현재 멕시코 민중의 분노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당시의 까를로스 살레나스 멕시코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근대 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 박사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왜 그리도 까를로스 살레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과 유사한 것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농민들과 도시의 소규모 생산직 노동자들은 마치 1960년대 미국의 흑인들처럼 농사를 파기하고 도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해야만 할 것이고, 아니면 멕시코의 원주민들처럼 생업을 팽개치고 머리에 가면을 둘러쓰고 산과 강을 돌아다니며 FTA반대 투쟁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영화 <헬프>에 있다. 1963년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 주에서 그토록 강력한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주의를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의 연대로 저항하였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저항하기 위하여 멕시코 원주민과 시민들이 서로 연대하여 자파티스타 연합(혹은 연방)의 투쟁을 전개하듯이, 우리도 하루라도 빨리 6.15 남북공동선언이 강조하고 있는 남북연합(혹은 연방)을 선언하여 한FTA를 폐기하든지, 아니면 남북연합(혹은 연방)코리아와 미국의 일대 일 관계를 전제로 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오늘날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그리고 영화 <헬프>에서 스키터와 에이블린 그리고 미니의 꿈이 이루어졌듯이, 우리가 희망하는 탈근대의 꿈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탈근대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길은 영화 <헬프>의 스키터처럼, 혹은 소설가 캐서린 스토킷이나 영화 감독 테이트 테일러처럼 소녀나 어린의 느낌과 감각을 기억하여 그 느낌과 감각을 현실의 삶으로 재생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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