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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평화 외교의 축, 어떻게 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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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반전평화 외교의 축, 어떻게 잡을 것인가?

'김민웅의 반전평화주장' <4> '제국주의 테러리즘'과 결별해야

***외교노선 수정을 위한 '정치적 내전(內戰)' 불가피**

1950-60년대에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였다. 제국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가져다주는 풍요를 인류의 보편적 목표처럼 선전했던 것이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의 민권운동 시위현장에서 마틴 루터 킹이 "내게도 꿈이 있다(I have a dream)"라고 외쳤던 것은 백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허용되었던 아메리칸 드림을 모두가 함께 나누자는 흑인들의 권리주장, 즉 배제(segregate)하지 말고 참여(integrate)하게 해달라는 일종의 청원이었다.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의 가치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을 주도했던 말콤 X는 미국 사회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위선"을 정면으로 공박했던 것이다. "그대의 꿈은 내게 악몽(Your dream is my nightmare.)"이라는 명쾌한 말로 그는 "백인 우월주의 지배의 위계질서(white supremacy)"가 인종주의적 억압의 현실을 낳고 있음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국의 패권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자체가 바로 "악몽"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너무나 타당한 직관적 어법이 아닐 수 없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위선: 그대의 꿈은 우리의 악몽, 그대의 평화는 우리의 죽음**

또한 그는 그런 꿈에는, 그것이 아무리 풍요하게 보여도 여전히 인종주의적 억압의 구조를 연장, 유지시킬 뿐이라 거기에 흑인들이 참여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억압과 지배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흑인들 가운데 일부 극소수만 선택받은 자처럼 치켜 올리고 나머지는 여전히 빈곤과 차별의 현실에 방치하거나 가두어버리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지배전략에 놀아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머리 숙인 청원에도 불구하고 희생은 계속되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이룩하는 꿈은, 그것을 목표로 삼는 인간 자신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황폐하게 된 인간이 만드는 사회는 이미 아름다운 희망을 일구어낼 수 없다.

이후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한계를 절감한 마틴 루터 킹도 이러한 말콤 X의 인식에 점차 동의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제국 아메리카의 베트남 침략 전쟁에 대한 반대에 목소리를 높여갔던 것은 이와 같은 인식 변화의 당연한 결론이었다. 인종차별로 눈 뜬 민권운동의 역량이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본질을 겨냥한 반전평화 운동의 저력으로 발전되어갔고, "진정한 자유"와 "정의로운 평화"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깨우친 미국 사회 내부의 혁명적 변화의 반영이었다.

케네디-존슨-닉슨으로 이어졌던 이 시기 미국 외교 또는 대외정책은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그 비극적 실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베트남 침략 전쟁 반대운동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새로운 평화를, 제국 미국에게는 야만과 국가폭력을 일단 종식시킬 패배를" 안겨다주는 역사의 진보를 이룩하였다.

이는 물론, 우선적으로 베트남 민중들의 반제항전(反帝抗戰)이 주축을 이룬 결과였으나, 이와 함께 반전평화 운동의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제국 내부의 전쟁 통제력이 자라남으로써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설 땅이 좁아지게 된 것이었다. 인류에게 공헌한, "피를 흘린 역사의 진전"이며, 시대의 십자가를 용기 있게 감당했던 이들의 희생적 헌신의 결과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악한 인종주의와 결합한 제국의 오만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제국 미국의 대외정책상의 후퇴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내전(內戰)>에서 반전평화 운동의 승리가 가져온 변화로서, 외교노선의 교정은 치열한 내부투쟁의 지속적인 과정 없이는 불가능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제국의 중심에서 강화되는 전쟁 통제력"과, "제국의 주변부에서 제국의 전쟁 의지에 굴복하는 권력을 변화시키는 힘"이 각기 성장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가 되는 세계사적 합류가 이로써 가능해진다. 안팎으로 제국의 축을 해체시켜나가는 인류적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평화를 이룩하는 길은 그 평화를 위해 애쓰다가 닥칠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열린다. 얻을 평화에 비하면 핍박은 잠시이며 마침내 이길 수 있는 고난에 지나지 않는다.

평화는 그저 "평화"를 말하면 주어지는, 값싼 은총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굴함이 없는 용기와 열정적 투신을 요구하는 자기희생적 쟁투의 산물이다.

따라서, 지금 최대의 관건은 침략전쟁을 둘러싼 "정치적 내전의 헤게모니를 반전평화 운동 진영이 확고하게 장악해나가는 일"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지지와 협력 정책. 그리고 파병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투항적/굴종적 대미자세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생존에도 말할 수 없이 위협적인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지배체제>를 허물어나가는 방책이 여기에 있다.

하여, 지난 세월 오랫동안 변절함이 없이 분명하게 자신을 바쳐온 평화세력의 광범위한 재집결이 이 시기,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는 우선, 반전평화를 중심으로 새롭게 결속되고 있는 정치권의 일부 진영과 사회운동세력간의 견고한 운동적, 조직적 결합을 통해 이룩해나가야 할 긴급과제이다.

***평화세력의 재집결 절실, 겁먹은 권력에게 민족의 생존 맡길 수 없어**

자신의 태생적 요구를 명백하게 배신하고 반전평화의 가치 자체를 국정의 중심에서 아예 접어버린 노무현 정권에게서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반전평화 외교의 추진을 기대하는 것은 이미 깨어질 수밖에 없는 환상이다. 그런 현실에서, 포괄적인 평화세력의 재집결만큼 우리 민족의 생명과 인류적 가치를 지켜내는 방도는 현재의 단계에서 따로 없다.

제국주의 테러리즘이 대외정책의 근본이 되고 있는 나라와의 동맹을, 국가이익으로 포장된 모든 대외정책과 민족문제 해결의 근거로 삼는 정권의 패배주의적 선택에 이 민족의 명운을 이대로 맡길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우리 민족의 생명을 자신들의 전략적 거래대상으로 삼은 제국의 인종주의적이자 강포하기 짝이 없는 협박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이토록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정권으로서는 민족의 생존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제국의 폭거 앞에서 민족 전체의 자기방어력을 상실한, 겁먹은 권력을 어떻게 믿고 안심하면서 이 땅에 살 수 있는가?

2003년 4월 2일,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학살범죄에 공모하는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킨 정치권의 적지 않은 세력들 역시 민족의 정기를 타락시키고 인류적 가치를 짓밟은 전쟁범죄의 종범(從犯)집단이 되고 말았다. 식민지 정치의 예속적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제국주의 테러리즘에 의한 학살 방조 및 학살 보조의 죄는 장래의 역사에서 결코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인류전체의 가치를 "실리"라는 이름의 야만과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진정, 전 세계 인류의 반발에 처한 제국 아메리카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이 나라 젊은이들의 인생과 목숨을 헌납하려는 권력의 판단능력은 철저하게 불신할 수밖에 없다. 세계사적 흐름에 최대한 합류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 역류하고 있는 시대착오적 제국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전쟁범죄를 보조, 공모하려는 파병으로 얻어질 평화는 없으며, 그렇게 해서 획득하게 될 이른바 발언권이란 언제나 제국에 대한 충성서약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노예의 비굴한 청원에 불과하다.

노예의 청원은 그 노예가 아무리 애를 써서 아부한다 해도, 결국 주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나 묵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 정권은 역사의 진실과 정도를 가지 못하고 있는 변명으로 소위 "현실론", 그리고 극단의 전략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 "전략적 판단"을 내세우고 있으나, 정작은 노예근성이 골수에 박힌 사유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노예에게 자유와 생명의 권리는 없다.

더욱이, 그 주인이 폭력의 권능을 숭상하는 제국일진대, 지금 이 순간에도 민간인 학살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고 있는 그 잔혹한 손아귀에 자청하여 들어가고 있다. 평화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감의 상실과 어리석은 생각으로 민족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생존은 이로써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요구에 굴종한 나라의 미래는 거듭 강조하건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는 과정이 된다.

***"제국주의 테러리즘"에 머리 숙인 노무현 정권과 한국의 정치권의 과오**

따라서 앞서 언급했듯이, 이에 대항하면서 평화의 대안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일대 정치적 내전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두려워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자주와 평화의 미래는 없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역사의 중차대한 경계선에서 마땅한 논쟁과 정치적 대결을, 국론 분열 운운의 주장으로 비난, 격하시킨다면, 그것은 모두 결국 이 나라의 식민정치가 결정한 예속적 논리에 따르라는 회유와 협박, 그리고 호도일 뿐이다. 이를 그대로 추종하면 그 결과는, 가공할 폭력으로 군림하는 테러 제국의 지배에게 알아서 굴종하는 식민정치의 비애와 이 제국의 엄지손가락 하나에 달린, 항상적인 침략 전쟁 발발의 긴장과 위협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침략전쟁은 말콤 X가 지적했던 바로 그 소수 백인 지배계급만의 꿈이 인류 전체의 악몽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이른바 <아메리카의 평화>는 이들 제국의 소수 백인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 점령과 지배를 위한 평화일 뿐, 나머지 인류에게는 폭력과 전쟁, 그리고 파괴와 죽음일 따름이다.

우리의 반전평화 외교의 축은 바로 이 악몽의 그림자를 우리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일에서 출발해야한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그에 동참하는 것은 곧 소수 백인 지배계급의 인종주의적 오만과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점철된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하부조직"이 되는 것뿐이다. 그로써 이루어지는 이른바 외교는 이 테러리즘의 종속적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방책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파병"은 바로 그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병력 동원요구에 응한 하부조직의 행태이자, 우리의 국가적 위상이 제국의 야망에 복무하는 "용병체제"로 굴러 떨어지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로써 한반도 평화의 대가를 내세운 침략전쟁 지지와 파병논리는 사실상 우리 내부에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문제 해결방식을 제2의 본성으로 내장(內藏)시켜나가는 과정이 됨과 동시에, 평화정책의 공간을 계속 축소시켜나가는 절차가 된다는 점에서 사뭇 비극적이다.

단적으로, 현재 노무현 정권은 남북 관계의 진전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도리어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그 진상이다. 게다가 미국은 경제제재요, 공격형 무기 한반도 배치요, 하는 식으로 대북 압박정책을 보다 강화시켜나가고 있지 않은가?

주체적인 한반도 평화정책에 대한 사유능력이 없는 권력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백치정권이다.

침략전쟁 적극 지지와 협력으로 노무현 정권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자체적 해법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한 셈이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작업에 역사적 이정표인 <6.15 남북 공동선언>에서 밝혀진 민족적 주도권을 지레 포기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추진될 "외교 정책 내지는 외교 행위"란 이제, 미국이 설정한 틀 속에서 미국의 의도를 대리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다. 기본 방향을 그렇게 잡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제국의 지배가 종식될 때 진정 시작된다**

이라크 침략 전쟁과 관련한 노무현 정권의 유엔 지지 연설을 비롯하여, 북한과 미국 간의 직접 대화의 틀을, 다중적 압박과 봉쇄를 노린 미국의 "다자 대화론"으로 대체해버리고 만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입증해준다. 하여, 소위 "한미공조"에 기초한 동맹외교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미국의 선제공격 정책이나 대북 적대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으며, 반전평화운동의 인류적 가치와 그 현실적 자산의 역량을 "현실을 모르는 명분론에 취한 주장"으로 폄하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오도하고 있다. 평화의 기치를 극대화하는 것만큼 평화정책의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21세기 세계사의 축이 침략전쟁의 승리를 용인하고 이를 기성의 질서로 받아들이게 되는 한, 한반도의 평화 역시 위기에 처한다. 반면에 반전평화의 역량이 인류의 미래를 주도해나가는 기본 흐름이 될 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일극적 지배체제는 조만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는 것이 우리에게 살 길이다. 우리의 외교는 바로 이러한 방향에 발맞추어 이바지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실리 중의 실리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날 "반전평화 운동의 역량 성장 촉진"과 "제국주의 테러리즘과의 결별"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평화롭게 보장할 수 있는 절호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제국의 야만을 규탄하고 있는 전 세계의 여론과 세계사적 흐름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퇴행의 길을 걷고야 말 것이다.

실로, 미국에 의한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역사는 짧지 않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이라크 침략 이전에 이미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 지역의 민중들에게 폭력과 전쟁, 억압과 죽음을 가져온 지 어언 반세기가 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미래는 이제 없다. 세계는 이를 더는 용납하지 않을 만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의지를 믿는 선택이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 되어야 한다.

***제국의 반동적 봉쇄정책을 위한 국제동맹의 문제**

1916년, 비밀거래인 <사이크스-피코 협약(Sykes-Picot Agreement)>에 의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토만 제국 분할정책 이후 이 지역은 서구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점령정책으로 유린당하는 땅이 되었다.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라는 능멸을 받고 있던 오토만 제국의 붕괴는, 프랑스 혁명의 기치를 앞세운 나폴레옹의 유럽 전역에 대한 진격을 봉쇄하고 이른바 "신성동맹(神聖同盟)"으로 불린 반동적 국제결속을 꾀한 1815년 비엔나 회의 시기에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이 당시 유럽은 합스부르그 왕가에 기초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비엔나 회의 체제가 중심이 되었는데, 이로써 나폴레옹 전쟁 이전의 왕정체제를 중심으로 한 구질서(status quo ante bellum)의 국제적 연대가 강화되어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곳곳에서 들끓고 있던 공화정, 민족주의, 혁명 등의 정치적 변혁은 진압되었다.

헨리 키신저는 그의 저서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를 통해 <메테르니히 체제>를 안정과 평화의 전략에 필요한 모범답안으로 규정했다. 그가 미 외교를 주도했던 시기, "반혁명적(counter-revolutionary) 봉쇄체제"의 전략구도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추진해나갔던 것은 이러한 이론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며, 제3세계 민족 해방 투쟁을 "토벌"한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전략이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성격의 국제동맹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 또한 이로써 파악할 수 있다.

키신저는 메테르니히 체제의 패권적 질서의 교훈을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향하는 미국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서, 여기에는 "반동적 질서의 복구"와 이를 위한 "군사력 증강"이 그 축이 된다.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원형적 기획이 여기에 있다. 크리스토퍼 힛친즈(Christopher Hitchens)가 키신저를 전범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심판 The Trial of Henry Kissinger: Verso, London, 2001)가 다른데 있지 않은 것이다.

제국의 지배는 이렇게 전쟁범죄적 테러리즘의 동원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토만 제국의 분할과 식민지화에도 본질상, 동일한 제국주의적 폭력의 현실이 존재하였다.

광대한 오토만 제국의 유산에 대한 실질적인 식민주의적 정복정책은 19세기 초반의 유럽으로서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기까지는, 유럽 내부의 질서가 1830년에서 1848년의 부르주아 혁명기를 통과하고 독점자본의 성장과 함께 1870년대를 기점으로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이 강화되는 동시에, 오토만 제국 내부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하면서 오토만 제국 해체가 가속화되어가는 이후의 약 1백년의 시기가 지나야 했던 것이다.

***미국의 중동원유 지배전략**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중동지역에 대한 각축전과 함께, 아랍 제후(諸侯)들에게 오토만 제국 붕괴 이후의 독립을 약속하고 독립투쟁을 지원하는 듯 하면서 이들을 식민지화했다. 그러다가, 유럽의 내전이자 제국주의 전쟁이었던 1차 대전 이후로부터 1930년대 중반을 거쳐서는 당시 전쟁부채(war debt)로 영국을 비롯한 서구제국의 목을 쥐고 있던 채권국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서서히 장악해나가게 된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필리핀을 점령한 미국은 1910년대부터 다른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중동 지역의 원유에 대한 침탈작전을 계속해서 펼친 결과였다.

현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의 대규모 원유저장지대를 비롯하여 북부의 모술(Mosul)에 대한 미국과 영국 간의 각축은 치열했으나, 당시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영국이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미국의 중동지역 파고들기 전략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22년 제1차 <로잔느 회의(Lausanne Conference)>를 통해 미국은 비서구 지역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다는 이른바 "문호 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의 원칙을 명분으로 내세워, 3년간의 지루한 협상을 벌인 끝에 미국계 스탠다드 오일이 미국-영국-프랑스 간의 콘소시움 지분 25%를 쥐게 함으로써 중동지역 원유 기득권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중동의 철도건설에 막대한 이권을 획득한 <체스터 협약(Chester Concession)>과 더불어 미국에게 있어서는 장차 이 지역 패권체제 수립에 핵심적인 근거가 되었다.

영국이 오토만 제국의 계승자 터키가 지배하고 있던 메소포타미아를 독립시켜 국제연맹의 승인 아래 보호령으로 만든 후 이 지역 원유에 대한 독점권을 확정했던 1920년의 <산 레모 협정(San Remo agreement)>의 골격은 이로써 무너지고 말았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침략 동맹군이 이라크를 침략하고 있는 것은, <로잔느 회의> 이후 이 지역 패권을 놓고 미-영 관계가 점차적으로 역전되어가기 시작한 시기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군사주의 콘소시움의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2차대전 종료 후의 시점에서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패권은 영국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다. 대 오일 그룹인 아람코(Aramco: Esso, Texaco, Mobil, Socal)를 통해 이 지역의 유전 42%나 장악하고 있던 미국은 중동지역 제패의 근거지를 우선 이스라엘로 삼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생존기반을 뿌리 채 흔드는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을 적극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에게만 집중된 안보전략의 위험도를 줄이기 위해 이집트,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아랍권 맹주들을 친미국가화하면서 군사지원을 통해 중동지역의 무장력 증대라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아랍 민중들의 삶은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경제적 억압에 시달리고, 갈수록 피폐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53년 이란의 민족주의 세력 모사데크 정권을 붕괴시키고 이란 민중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팔레비 왕정체제를 복구시킨 것도 미국의 제국주의 테러리즘 정책의 결과였다.

한편,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은 계속 강화시키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국가 독립 문제를 단지 "난민 문제"로 처리하면서 그 본질인 이스라엘의 점령상태 종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이스라엘의 무장력 강화에 일로 매진해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에 의한 팔레스타인 국가 성립 문제는 이따금 외교적 수사로만 거론할 뿐, 그 실천적 조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외교적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비극, 이스라엘의 잔혹행위, 그리고 미국의 폭력체제**

테러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팔레스타인의 대 이스라엘 보복 정책 포기만 강요되고 이스라엘의 폭력은 무제한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과 극도의 보복행위는 이로써 막을 방법이 없게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 일변도의 정책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만 있다.

미국의 대 이스라엘 정책을 보면,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현장을 그대로 목도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 대한 무수한 학살사태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확장을 통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축출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경우만이 아니라, 가령, 1981년 9월 서부 베이루트에 있던 사브라(Sabra)와 샤틸라(Shatila)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를 투입, 3일 밤낮에 걸쳐 3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기관총 사격으로 집단학살한 사건은 당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미국의 무기 지원을 통해 이루어진 이러한 사태는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테러리즘이 결과한 비극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잔혹한 집단학살의 현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 반격으로 나타나, 테러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패권과 그 야만적 욕망을 위해서, 그 지역 주민의 정당한 주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희생시키고 있는 상황은 규모의 차이만 존재할 뿐, 약소민족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과 죽음을 가져다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제국의 군사주의 노선은 언제나, 그 노선의 대상이 되는 약소민족에게 생활근거의 상실(dispossession), 변방으로의 축출(marginalization), 권리의 박탈(disenfranchisement)등을 가져다주고 있다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의 국가적, 민족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권리회복이 이 지역 평화를 위해 가장 긴요한 과제라고 갈파하고 있다. (<상실의 정치>The Politics of Dispossession, The Struggle for Palestinian Self-Determination:Vintage Books, New York, 1995)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결권과 국가수립의 권리는 다만 이 지역에 국한한 정치투쟁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의 민주적 권리의 존중과 관련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국은 언제나 이렇게 약소민족의 민주주의를 짓밟고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미국의 "실리"를 위해 약소민족을 끊임없이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만행에 의한 현실이다.

결국, 우리의 대외정책은 바로 이 야만의 폭력체제를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한 권리와 생명을 지켜내는 세계사적 흐름과 함께 하는 국가적, 민족적 용기로써만이 바로 세워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지금, 정교하고도 치열하며 끈질긴 정치적 내전을 통해서 반전평화 역량의 헤게모니를 굳건히 세워 이 사회의 세계관을 바꾸고 생명의 공동체를 건설해나가는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진정한 민족성 획득의 기회**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상실과 박탈과 변방화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무가내의 제국주의 테러리즘의 희생자들이 될 수 있다. 제국은 애초부터 인간의 생명에 대한 양심의 고뇌를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반전평화운동은 다만 미국의 침략전쟁 지원책으로서의 파병반대 또는 철회 내지는,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 비판으로 그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 대한 일대 혁명이요, 이 사회의 사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선택하는 문제이자 평화를 원하는 인류사회와 뜨겁게 만나는 결의에 찬 행동이다. 이것이 우리의 대외정책에 근본이 될 때 한반도의 평화는 지구촌 인류 모두에게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자산이 된다. 평화는 이렇게 해서 견고하게 수호되는 것이다.

반전평화 운동은 이로써 이 나라의 역사를 세계사적 진보의 축으로 만드는 위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마침내 세계시민의 자격을 갖춘, 진정한 민족성을 획득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호출에 우리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

*다음 글 예고 [김민웅의 반전 주장 5] 반전운동과 세계체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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