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잘못도 했고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괜찮은 업적도 남겼다. 그 중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의 기초를 마련하고 IMF 사태로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를 그런대로 수습한 것은 높이 평가해줄 만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부분의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국민이 통치자와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많은 반면 정당한 평가에는 인색한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김대중 정권의 통치 스타일 자체에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그동안 우리 국민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너무 인색하다고 생각해왔다. 북핵위기와 같은 이 상황에서도 우리가 이 정도나마 버텨나가는 것은 남북관계가 꾸준히 진전되어 왔기 때문인데, 이러한 면은 보지 못하고 피부로 느끼는 것만 가지고 판단한다고 조금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2월 4일 정부에서 핵폐기물 처분장후보지를 선정하면서 발표한 담화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김대중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더 문제였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담화문은 제목만 부드럽게 ‘국민에게 드리는 글’로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우습게 본 김대중 정부**
그동안 정부에서는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할 때마다 해당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1990년 안면도에서는 수만명이 보름 이상 대단히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발표 때는 덕적도와 인천 주민들이 수개월 동안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들의 반발로 정부의 계획은 결국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담화문을 보면 정부가 이러한 과거 경험으로부터 추호의 교훈도 얻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담화문에는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호소가 전혀 없다. 당연히 국민의 마음을 조금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핵발전이나 핵폐기물 처분과 관련해서 정부는 그것이 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일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지역주민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눈물의 호소를 통해 주민들의 생각을 돌려보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해도 일의 실마리가 풀릴까말까 할 형편인데, 세월이 바뀌어 국민의 의식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정부의 태도는 구태를 전혀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담화문의 요지는 두가지다. 하나는 원자력이 가장 좋은 에너지로서 국가 동력의 상당 부분을 공급하는데,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지 못하면 이 중요한 동력이 끊기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이라는 중차대한 사업에 협력하면 큰 상을 주겠다는 것이다.
담화문은 원자력에 대한 온갖 찬양의 말로 시작한다. “원자력은 온실가스나 공해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이며, 안전성이 거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했고, 화력발전에 비해 발전원가가 저렴”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렇게 좋은 걸 반대해서 만일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지 못하면 원전 가동에 지장을 초래하여 국가동력인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게” 된다는 위협투의 말이 뒤따르고, 그렇지만 협조를 하면 그 지역은 “3천억원 규모의 지역지원금은 물론 각종 국가사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여”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로 끝이 난다.
***환경부 장관이 담화문에 빠진 이유는?**
담화문에는 원자력발전과 핵폐기물의 위험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안 나온다. “위험하지만 우리가 안전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같은 말조차도 없다. 정부로서는 처음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이 나와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완벽하니까 당신들은 협조만 하면 잘살게 돼!” 바로 이것이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이다. 여기에 과거 개발독재ㆍ권위주의 군사정권이 국민을 대했던 태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난 흔적이 있는가? 안면도에서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굴업도 처분장 반대시위 때는 시위도중의 충격으로 할머니 한분이 사망하는 일을 겪었는데도, 김대중 정권은 과거의 낡고 억압적인 접근법을 답습하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어처구니 없는 것은 담화문의 발표자로 되어 있는 여러 장관 중에 핵폐기물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농림부장관은 들어있는데 환경부장관은 없다는 것이다. 핵폐기물이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의미일까? 담화문의 논리대로라면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환경부장관이 들어가서는 안된다.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국제적으로 핵폐기물 처분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원칙으로 여겨지는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핵폐기물을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오랫동안 격리해야 한다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성(equity)의 원칙이다. 정부에서 핵폐기물 처분의 모범사례로 선전하는 스웨덴,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어느 한 나라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핵폐기물 처분에 접근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에서는 원자력이 안전하고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지, 어떤 원칙에 입각해서 핵폐기물을 처분하겠다는 한마디 말도 없다.
***격리의 원칙**
핵폐기물을 격리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핵폐기물이 방사능이라는 강한 독성을 지닌 물질이고, 그 독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핵폐기물 속에는 수많은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다. 가동 전에는 우라늄만 들어있던 핵연료 속에서 핵분열이 시작되자마자 갖가지 방사성 물질이 생겨나 여기저기 쌓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요드-135나 크세논-135처럼 일주일이면 방사능이 다 빠져나와 독성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있지만, 아주 오랫동안 방사능을 내뿜는 것도 있다.
체르노빌 사고 때 유럽에 널리 퍼졌던 세슘-137이나 스트론튬-90 같은 것은 독성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3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이 기간을 반감기라고 부르는데, 핵폐기물 중에는 반감기가 이것보다 훨씬 긴 수십만년, 수백만년 되는 것도 있다. 북핵위기로 우리 귀에 익은 플루토늄-239는 반감기가 2만4천4백년이고, 테크네슘-99는 21만년, 요드-12는 1천5백70만년이다.
이런 독성을 지닌 물질이 환경에 크게 해를 주지 않게 되려면 반감기가 최소 10번은 지나야 한다. 그렇다면 세슘이나 스트론튬만 가지고 따지면 핵폐기물이 3백년 이상 완벽하게 격리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플루토늄-239를 기준으로 하면 격리 기간은 수십만년으로 늘어난다.
반감기가 10번 지났다고 해서 독성이 환경에 해가 안될 정도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기간을 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만명의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힐 수 있는 핵폐기물이 있다고 하자. 반감기가 한 번 지나면 독성은 절반으로 줄기 때문에, 이때는 5천명이 해를 입는다. 두 번 지나면 다시 절반으로 줄어 해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2천5백명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반감기가 10번 지나면 이 물질의 독성은 10명에게 해를 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다. 반감기의 10배의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그 독성으로 아직 10명은 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세슘-137은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극물의 하나로, 관객으로 가득찬 극장에 한방울만 떨어지면 그중 절반이 15분 안에 사망한다. 이토록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반감기가 10번 지났다고 해도 여전히 치명적인 독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핵폐기물을 1만년 동안 격리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스웨덴에서는 거의 영구적으로 격리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변동이 없었던 화강암층에 동굴을 파고 처분한다. 독일에서도 30년 전부터 골레벤을 영구처분장 후보로 정하고 조사를 해왔지만 이제 겨우 파일럿 시설 정도를 운영하며 시험을 계속하는 것은 핵폐기물을 완벽하게 격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1980년에 만들어진 독일의 핵폐기물 처분기준은, “방사성 물질은 그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 사람, 동물, 식물의 생활권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위험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갈 때 일상적으로 받게 되는 방사능 수준, 즉 자연방사능 수준을 말한다. 대부분의 방사능이 없어진 상태까지 격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독일이 원자력발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공정성의 원칙**
공정성의 원칙이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제에서만 공정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다른 영역에서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서울 도심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농촌 지역에 처분하는 것은 공정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이다. 농촌지역에서는 쓰레기를 만들어내지도 않았고, 따라서 쓰레기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맛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쓰레기를 떠맡기는 것은 공정성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공정성의 원칙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유발자부담 원칙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쓰레기를 만들어낸 사람, 유발자가 그 쓰레기 문제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폐기물의 경우 공정성은 지역간,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집단과 계층간의 공정성뿐만 아니라, 핵폐기물이 아주 오랫동안 독을 내뿜는다는 속성 때문에 세대간의 공정성이란 문제도 고려될 수밖에 없다. 유발자부담 원칙에 따르면 핵폐기물은 원자력발전소 운영자와 원자력 전기 사용자가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 유발자부담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핵폐기장을 서울에 건설하자는 주장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원자력발전소 운영자들이 서울에 몰려있고 서울에서 원자력 전기를 가장 많이 쓰면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원칙을 따르면 핵폐기장은 원자력발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서울에 건설해야 한다. 세대간의 공정성이란 원자력발전의 혜택은 모두 현 세대가 누리면서 그 찌꺼기인 핵폐기물은 대부분 다음 세대들이 떠맡게 된다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핵폐기물은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사능을 가지고 씨름을 해야 한다면, 이는 공정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다를까**
핵폐기물 처분장에 대해 새 정부에서도 일언반구 다른 말 없이 계획을 밀고나가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노무현 정권도 원자력에 대해서는 옛 정권과 신념을 공유하는 것 같다. 어쩌면 원자력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신념’이라는 것이 옛 정권의 경우는 5년 동안 원자력에 대한 왜곡된 정보만 접한 결과 만들어졌겠지만, 새 정권은 그럴 시간이 없었을 터이니 아직 무지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새 정권이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켜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만 생각하지,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는 관심이 없기에 옛 정권의 핵 정책을 따르는 것 같기도 하다.
작금의 이라크 침공 지지와 파병 결정을 보면 현 정권이 정말 근원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권에 그러한 철학이 없다면 이는 안타깝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라크 파병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터져나올 많은 문제들이 근원적인 것에 대한 최소한의 철학 없이는 제대로 풀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군인을 보내는 것이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정부의 발표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기회주의적인 처신의 결과일 뿐이다. 핵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지 못하면 국가동력인 전기공급이 끊기기 때문에 핵폐기장 건설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지역이기주의, 세대이기주의로부터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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