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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드림' 4일부터 연재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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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코리안드림' 4일부터 연재 재개

<알림> 필자 리혜선씨가 모국 독자들께 보내는 편지

그동안 중단됐던 '코리아드림'의 연재를 내일(4일)부터 재개합니다. 당초 이 책의 연재를 주선했던 프레시안 김기협 편집위원은 3일 오후 중국 연길에서의 국제전화를 통해 필자 리혜선씨가 연재 재개에 동의했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김 편집위원은 지난 달 말 연길로 출국했으며 앞으로 2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및 중국내 조선족의 삶 등에 관해 연구할 계획입니다.

필자와 김 편집위원은 프레시안에 보내온 편지를 통해 연재 중단 발표 이후 여러 독자들이 보내주신 진지한 의견들이 - 반대의견까지 포함하여 - 당초 생각을 번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과 진지한 의견 개진을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연재 재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필자 리혜선씨와 김기협 편집위원이 프레시안에 보내 온 편지 전문입니다. 편집자

***"'모국'은 저에게 너무도 거대한 존재"/리혜선 작가**

<코레안드림>연재를 일방적으로 취소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프레시안을 열어 본 것에 대해 프레시안과 독자들에 대한 무책임한 행위었다고 보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프레시안 독자들의 반응은 저(조선족)에게 '모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존재로 안겨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거대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저의 마음 속에서 그만큼 크고! 소중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응이 어떠할지 그야말로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제가 <코레안드림>의 필자라는 부담이거나 저 개인에 대한 오해와는 무관한 것이었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반응은 의외로 놀라웠고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한편 감정을 갈아앉히고 찬반 양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토론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함에는 태도가 진지한 반대론을 펴던 독자들도 망라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본 조선족에게 그처럼 '이기적'이고 '돈'밖에 모르는 부분이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우리 조선족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도 정직한 분들과 사기꾼들로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족작가인 저로서는 <코레안드림>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기대했던 것은 사실 조선족 자신의 변화였습니다…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상호 이해의 진지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대는 모국인뿐 아니라 조선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설득력이 있는 글을 쓰지 못했던 점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001년에 중국 도문에 있는 충북마을 정암촌을 취재해 모국에서 장편르뽀 <두만강의 충청도아리랑>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작가의 말>을 첨부하는 것으로 독자들의 논쟁에 설명 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하얀 벼꽃과 백의민족의 숙명 - 조선족과 사과배**

1988년에 처음으로 <한민족의 역사>라는 한국책을 빌려 읽고 내 민족에 대한 아픔이 짜릿하게 닿아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원인,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부분적인 가족사에 불과한 이야기들밖에는 몰랐습니다. 그 때 새삼스레 저의 나이 32세를 떠올렸던 것은 부끄러움이 아닌 아픔이었습니다.

나무 잎사귀가 노오랗게 떨어지는 그해, 1988년 가을에 고구려 제2대왕이 도읍으로 정했던 국내성(중국 통화 집안현)을 다녀왔습니다. 소주 한 잔을 올리고 가을 들국화 한 묶음을 올려놓고 무릎을 꿇고,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 고구려의 숨결을 엿들었습니다. 1989년에 발해의 도읍 네 곳을 두루 다녀왔습니다. 한 줌의 흙과 연꽃 기와 조각을 손에 꼭 쥐고, 발해왕의 풍채와 궁녀들의 예쁜 모습을 그려보며, 이제는 흙무지로 남은 이 땅의 옛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1992년에 6명 친구 문인들로 구성된 <문화연구회>의 일원이 되어 조선족의 중국입주노선을 따라 답사하며 <조선족 이주사 실록> 집필(출판경비 때문에 무산됨)을 위한 취재를 하였습니다. 노인들의 허연 백발과 깊숙한 주름살에서 발해 후 천년만에 이 땅에 다시 나타난 하얀 벼꽃과 백의민족의 숙명을 읽었습니다.

1993년에 한국 방문시 저의 본관인 충남 한산에 다녀왔습니다. 이윤경 시조님과 이곡, 이색님의 묘소에 청주를 붓고, 드디여 고향이 가슴에 뜨겁게 뿌리 내리는 체험을 했습니다. 1994년에는 저의 증조부님의 중국입주 100주년을 기념하는 수필을 발표했습니다. 그 해 청명에 산소에 가서 가족, 친척들과 함께 땅으로 돌아가신 증조부님, 조부님, 아버지께 그 글을 정중히 읽어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울었습니다.

이 땅의 내력은!, 그리고 이 몸에 흐르는 피의 내력은 아픔이고 아름다움이고 생명의 예찬이었습니다. 나라의 역사이고 민족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였습니다. 조부님과 우리의 세대에 있어서는 조선이주민으로부터 조선족으로 길들여지는 <족화>문화의 역사였습니다. 아픔을 모르고는 사랑할 수 없는! 역사였습니다.

그런 아픔과 사랑으로 쓴 책이 <두만강의 충청도아리랑>이었습니다. 충북대학교 임동철 교수님과는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1992년에 정암촌을 취재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우연히 임 교수님을 소개받았고, 임 교수님의 제의에 의해 새천년 구정부터 이 책의 집필과 관련한 취재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기에 인문환경의 선택에 의한 인간의 생존 상태, 인간사쪽에 더 관심이 깊었습니다.

연변역사에는 1924년에 조선 함경북도에서 과수접수지를 가져다가 중국의 돌배나무에 접목해 <사과배>라는 새 과일이 나타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과배와 조선족, 너무 많이 닮았습니다. 조선족은 고국문화와 중국문화가 접목되고, 중국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선택, 부각된 집단입니다. 중국조선족 2백만,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의 사랑이고 자랑이고, 조선족 이주사의 현실입니다. 한방울의 물에서도 태양의 빛을 볼수 있듯이 정암촌은 2백만 조선족사회 및 조선족이주사의 축도입니다.

역사는 숙명이었습니다.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해 많은 사랑을 쏟아주신 고국의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을 굳게 지켜온 정암촌 여러 분들! 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합니다.

지식과 안목의 미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국 독자분들의 따뜻한 사랑을 기대합니다.

2001년 7월 중국에서 리혜선

설명이 된다고 생각 되시면 발표하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3월 1일 중국시간 새벽 3시

***"좋은 스승과 좋은 교재 독자들과 함께 나눌 것"/김기협 편집위원**

(2월) 27일 연길 공항에 도착할 때 리혜선 선생이 류연산 선생과 함께 마중나와 주었다. 그 날은 셋이 함께 저녁만 하고 헤어졌지만, 이튿날과 그 이튿날 다시 만나 프레시안 연재 문제를 의논했다.

27일 아침 서울을 떠나기 전에 연재 중단과 관련된 리 선생의 메일을 몇 번 받고 응답을 보냈었다. 25일 밤 첫 메일을 받았을 때는 인터넷에 으레 있는 무례함 정도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한 정도로만 생각하고 의연하게 연재를 계속할 것을 당부했었다. 그러나 26일 낮 연재 중단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메일에서 개인 감정 문제가 아니라 조선족 전체에 대한 여론 악화를 걱정하는 것임을 알고는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8일 오전에 만났을 때는 피차 연재 중단 후 프레시안에 들어와 보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리 선생에게 연재 중단에 대한 독자 반응을 살펴본 다음 연재 재개 여부를 한 번 생각해 달라고 부탁했다. 연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잘 읽어주는 독자들은 평소에 의견달기를 열심히 하지 않고, 더러 의견을 달더라도 막연하고 간단한 의견만을 표시하는 것이 보통임을 나는 안다. 이런 분들 중에 연재 중단 소식에 접하면 아쉬운 마음을 표하는 분들이 얼마큼이라도 있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리 선생에게 재고를 부탁한 것이다. 리 선생도 이 부탁을 응락했다.

그 날 저녁 숙소 부근의 피씨방에서 프레시안에 접속해 보고 놀라움을 지나 감동을 느꼈다. 긍정적인 의견이 꽤 있으리라 기대는 했었지만, 그렇게 많은 분들이 그토록 열렬한 성원을 보내준 것이 놀라웠고, 연재를 권유한 나 자신보다도 이 연재의 의미를 더 깊고 절실하게 밝혀주는 몇 분의 의견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연재를 반대하는 의견 중에도 귀담아 들을 내용을 적지않게 발견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토요일 오후 리 선생을 다시 만났을 때, 지금 생각하니 연재 재개를 허락하는 확답을 듣지 못했다. 독자들의 반응에서 얻은 놀라움과 감동을 나누기에 너무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오늘 중에 전화로라도 확답을 얻어 내일 아침에는 독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리 선생은 금요일 밤 여간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독자의견들을 훑어본 뒤 프레시안에 메일을 보내고 내게도 참조로 보냈다고 한 것을 조금 아까 열어보았는데, 새벽 3시 14분에 발송한 것이었다. 독자들에게도 전해지리라 믿는다. 그 내용으로 보아 연재 재개를 허락해 줄 것은 믿을 수 있다.

지난 12월에 열흘간 다녀가고 이번이 연변에 두 번째다. 이곳 사정도 조선족의 처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번 연재를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을 형편이 못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 사정과 처지를 공부하려는 나같은 사람에게 리혜선 선생은 좋은 스승이고 ‘코리안드림’은 좋은 교재다. 우리 독자들 중에도 나와 같은 스승을 모시고 같은 교재로 공부할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연재를 권유하고 추천한 것이다.

독자의견 중에 이번 중단이 출판과 관련된 술수는 혹시 아닌가 짚어보는 분이 있는 것을 보고 속이 뜨끔했다. 이번 기회에 해명하겠다. 나는 프레시안 편집위원이자 아이필드 출판사 고문이다. 지난 12월 연길의 서점에서 ‘코리안드림’을 발견하고 이어 저자 리 선생과 인사를 나눌 때 나는 프레시안보다 아이필드를 생각했다. 책이니까. 아이필드에서 출판계약을 맺은 뒤 내용을 다시 검토하면서 프레시안 연재도 바람직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자와 출판사에 양해를 얻고 프레시안에 연재를 권한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인터넷신문 연재를 통해서든 도서출판을 통해서든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접하는 것이다. 이번 연재 중단과 재개를 둘러싸고 독자의 관심이 얼마큼이라도 증폭되는 것을 보며 아이필드 관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의 상황전개에 나 이외의 아이필드 관계자는 아무런 개입을 한 일이 없음을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확인해 드린다. 나도 이 일에 대해 아이필드의 다른 관계자와 의논한 일이 없다.

내가 연변과 조선족, 그리고 중국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기본방향을 리혜선 선생은 호의적으로 이해해 주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연변 체류가 길어질 것 같다. 내가 써 온 칼럼 ‘페리스코프’는 당분간 계속 쓰기 어려울 것 같지만, 공부가 더 익으면 더 좋은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내 공부에서 찾는 좋은 스승과 좋은 교재가 있으면 독자들과 함께 나누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연길에서

(2003년 3월 3일 오전 12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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