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삼일만세운동의 유일한 생존자

민족과 함께 책과 더불어 103년, 최태영 <1>

사람이 1백세를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1백세를 넘긴 나이에 연구와 저술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 그런 인물이 있다. 최태영(崔泰永) 선생이 그 분이다.

최태영 선생은 1900년 3월 28일(음력)생으로 올해 1백3세이다. 우리 나이론 1백4살이다. 일본 유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최태영 선생은 24세때인 1924년 보성전문(현 고려대) 교수가 됐고 해방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해방 후에는 부산대, 서울대 출범에 참여했으며 75세까지 강단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있을 때에는 법학을, 대학을 떠난 다음에는 우리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나이 77세때 쓴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고, 1백2세때인 지난 해 10월에는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는 신저를 펴냈다.

그러나 최태영 선생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이같은 학문적 성과에 앞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지식인으로서의 올곧은 삶이다.

선생은 반일 '투사'는 아니었으나 친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도, 일본어 상용도 거부했다. 조선학생들에게 정신대나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연설도 한 적이 없다.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으나 미국에 빌붙지 않았다. 이승만 이후 역대 정권에도 부닐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법학자이면서도 헌법 제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 탄핵' 조항 삽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물러난 후 상고사 연구에 몰두한 것은 후손에게 바른 우리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일한 생존자이다. 삼일운동 당시 그는 고향인 황해도 장련(長連)에서 장날 3천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연설했다. 이 때문에 해주감옥으로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맹국'이자 '외세'이기도 한 미국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삼일절을 앞두고 일제와 미 군정, 독재정권을 거치며 1세기 동안 지식인의 지조를 지켜온 최태영 선생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지난 1999년부터 최태영 선생이 두 권의 한국상고사 관련 책을 저술하는 일을 도와온 언론인 김유경씨(전 경향신문 문화부장)가 쓴 것으로 4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법학과 역사의 지성**

법학자이며 한국사 연구자인 최태영(崔泰永; 학술원 회원) 선생은 아마 우리 근현대사의 전모를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하는 분일 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 이전의 상황을 증언할 수 있고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유일한 생존자이며. 지금까지의 사회변천을 최고 지식인의 입장에서 겪어왔다. 한국 근대 법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고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몰두해 1백세를 넘긴 나이에 '인간 단군을 찾아서'(2000년)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년) 등 2권의 저서를 펴내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사진 1>

선생은 1900년 황해도 은률군 장련(長連)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최계준의 결단으로 개신교를 통한 신교육을 받아들인 지주집안에서 성장해 김구 선생에게서 배웠고 구월산 종산학교와 서울 경신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서 영미법철학을 전공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 태영이 머리가 뛰어나고 책을 많이 보는 것을 알고는 평생 그가 돈걱정 없이 책을 얼마든지 사보고 신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별도의 재산을 만들어 놓았었다. 이 재산은 공산당이 나오기 전까지 유효했다.

보성전문 법과의 정교수가 되어 상법 민법 행정법 등을 가르치고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법대 학장, 청주대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최초의 대학학술지인 보전논집(普專論集)의 편집인이었으며 보전교수와 겸직한 경신학교의 교장, 영어교사, 설립자로 중등교육을 육성했다. 언더우드 부자(父子), 모펫, 게일, 쿤스 등 선교사들과의 교분으로 한국 개신교의 초기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어만 써야한다는 식민지 어문정책에 공식적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일본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친일 행적이 없는 한국학자의 면모를 지켰다. 건국 대한민국의 법전편찬위원, 고시전형위원이 되어 헌법을 제외한 대한민국 법과 고시령을 제정했다. 그가 관여한 상법 중의 유가증권법은 세계통일법을 취하고 민법 중의 불법행위는 영국법을 참작하도록 했다. 김병로, 이인 등과 함께 그가 헌법 제정에 나서지 않은 것은 대통령 탄핵조항을 없앤 이승만 주도의 헌법작성을 거부한 때문이다.

<사진 2>

법학관련 저작으로는 1930년대에 우리말로 발표한 '바빌로니아 함무라비법' '유가증권 세계통일법해설' 논문을 필두로 1952년 우리나라의 상법관련 최초 저작인 '현행 어음 수표법'을 냈다. 1954년 학술원 창립이래 법학분과 회원으로 199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법철학의 역사적 배경', '동서양 법사상의 유사점과 차이점, '중국의 法家 - 商子의 법치주의' 등을 냈다. 1977년에는 법학관련 명저로 꼽히는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 나왔다. 지금까지 가치가 변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원고지 1만 4천장 분량의 이 책은 서양법철학의 사전 같은 것인데 '카드 한 장 없이 여러 십년 머리 속에서 정리해 쓴 것'이라고 했다. 이 책으로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다.

***"구월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

<사진 3>

그가 역사연구에 뛰어든 것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이 사라진 한국 사학계가 광복 이후에도 일제가 단군의 고조선 건국사를 신화라며 부인하던 그대로 교육하는 것을 보고 '아무도 없다면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 사학의 거두 이병도 서울대 교수가 종래의 사관을 바꿔 단군이 고조선의 실제 건국자인 조상임을 확신하는 글을 발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의 여러 판본 기록중 석유환국(昔有桓國;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이 석유환인(昔有桓因: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으로 왜곡되었음을 동경대와 조선연구회 발행본 등 여러 삼국유사 책을 찾아내 밝혀냈다. 1988년에는 일본의 후지 미야시다(富士宮下)문서를 한국학자로서 유일하게 답방, 확인하였고 고대 일본 법령집 延喜式을 통해 일본 대궐에서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간 조상신을 제사지내는 기록을 찾아냈다.

정인보와 함께 한국사의 출발을 실존 인물 단군의 고조선 개국에서 보는 그는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기 보다는 수천년 동안 교육돼 온 단군의 고조선 개국 역사가 일제이후 신화로 부인된 데 반박하고 그러한 주장의 허구와 배경을 학문적인 입장에서 논했다.

'고조선 개국자 단군 이야기에 환인은 없다'는 것을 삼국유사의 여러 소장본을 통해 밝혀낸 데 이어 고조선이 요동을 중심으로 한 광역국가였음을 동이족을 기반으로 한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 또한 중국 한족(漢族)의 역사서 춘추를 쓴 공자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를 비판했다. 여러 학자의 단군 연구를 밝히고 정인보와 자신의 '한사군론'을 소개하고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단군관을 소개한다. 그 자신은 단군의 홍익인간이념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라는 현대적 법개념으로 해설했다. 1백3세에 이르도록 학자로만 지낸 지식인이 역사왜곡에 대항해 밝히는 학문적 진실의 총체들이다.

선생은 "구월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라고 자평했다.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난 구월산 밑의 장련은 동네에 솟대백이가 있고 구월산 속엔 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좀 떨어진 송관이란 데는 단군사당과 아사달 나루가 있었다. 사당안에는 구리로 만든 말이 몇 마리나 있었다. 일제의 교육령으로 다니던 광진학교가 폐쇄되었으나 공립학교엔 가지 않고 종산학교에 가기 전까지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웠다. 여기서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해에 고조선을 개국했다는 것을 가르침 받았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후일 그가 단군을 연구하게 됐을 때 중요한 기억으로 살아나게 된다. 장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부터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조선'에 나온 농촌경제생활 묘사와 비교해서까지 이야기 들었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언급되는 곳이다.

<사진 4>

"들장미, 철쭉이 만발하구 버들이 푸르구 냇물이 맑구 유명한 은구어두 거기서 잡히구. 그때 세월에 중요한 산물인 솜과 밀, 쌀, 생선, 과일이 많이 나서 장날이면 힘센 황소가 끄는 우마차가 이들을 실어내. 여름이면 원두막이 70곳, 큰 사과농장이 30곳이나 있던 곳, 여름방학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가는 여래냇물에선 생선들이 와서 톡톡 부딪치며 헤엄쳤는데. 산속의 사람들이 못 들어가는 연못엔 이름 모르는 물고기들이 멋있게 헤엄치는 것 보기 유쾌해."

서울과 동경에 유학하던 시절에도 방학때 귀향하면 큰 트렁크 두 개에 책을 가득 담아 지우고 봉황산 넘어 할머니, 고모댁이 있는 피아골(稷田里의 우리말) 산막에 가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할아버지가 이곳의 나무에서 나는 소출을 그의 공부자금으로 쳐둔 곳이기도 했다. 바다에 면해 있어서 고운 세모래가 깔린 해변에 해당화가 붉게 피고 물이 맑았다. 산막에서는 맞은 편 진남포 항구의 전등불빛이 보이고 공장 굴뚝의 연기가 오르는 것도 보였다. 책을 읽다가 싫증나면 바닷가의 해당화 핀 모래밭을 산책하였다. 도회지에서 찾아오는 수영객들이 있었다. 이곳에 살던 고모 카타리나는 가톨릭을 믿었다.

이 때 산에 살면서 가끔 장련 마을로 내려오곤 하던 시라소니(이빨없는 늙은 호랑이를 말함)가 한 마리 있었다. 늙어서 사람을 해치지는 못하고 기껏 닭을 훔치거나 사람들 궁둥이나 할퀴는 시라소니는 반갑지는 않지만 별로 무서운 존재도 아니란 걸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시라소니는 짝도 없이 봉황산을 넘어오는 길목 한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산너머 할머니 산막에 가던 어느 저녁 시라소니가 눈을 화등잔처럼 번쩍이고 나무 사이에 서서 지나가는 그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태영소년만이 아니라 카타리나 고모도 다른 사람들도 장련에 오갈 때 시라소니를 보았을 것이다.

얼마전 한 인사가 이 지방의 가톨릭사를 말하면서 '산넘어 살던 최카타리나는 카톨릭 신앙이 대단한 성녀라서 그녀가 장련에 올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길 안내를 하였고 그녀가 길들여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게 바보 시라소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그리고 최박사에게서 아무 것도 보탬없이 사실대로만 이야기 들었던 것이 매우 즐거웠다.

선생은 "하하 말이 몇 단계 건너가 그렇게 맹랑해졌군. 길들여가지고 다닌다는 게 뭐야. 미쳤어. 산 지나갈 때 어디쯤 사는 것 사람들 다 알았는데."라고 했다. 그 뒤에 시라소니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일본식 공립학교를 피해 11세때 구월산 종산학교로 가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는 한일합방이 되고 한참 된 때였는데도 애국가를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불렀는데 아무도 이를 밀고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구월산 안팎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보았다. 구월산의 집들은 호랑이가 못 들어오도록 모두 ㅁ자형으로 마당을 가운데 끼고 있었다.

구월산에는 패엽사 아래 단군의 조상을 받드는 삼성사가 있었고 종달에는 문화(文化_ 유(柳)씨의 오래된 묘들이 있었다. 나중에 세종실록에서 문화 유씨 출신의 한성부사 유관과 유사눌이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에 삼성사(三聖祠)를 언급하고 계속 단군을 제사지내 받들 것을 말한 것을 알게 되면서 유관과 유사눌이 그때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사는 원래 패엽사보다 높은데 있었다.

구월산에는 그밖에도 여러 절이 있었는데 흥률사 이야기에는 팔구손이네가 등장한다. 어떤 김가가 구월산에 들어와 아들 여덟을 낳고 그 아들이 각각 아들 아홉씩을 낳아 팔구 칠십이명이 되어 배우자까지 백수십명이 세력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이 흥률사 땅을 빼앗으려고 스님들을 못살게 굴고 싸우다 피리부는 형국이던 지세의 피리구멍 자리에 인조산을 쌓아 절을 망하게 만들었다. 중들은 팔구손네 묘자리 산발에다 암자를 지어 팔구손네를 망하게 했다. 절이 폐사되어 부처가 땅에 나둥그러진 절터가 남아있었다. 망한 팔구손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