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인기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남편에게 야구방망이로 폭행 당한 사건이 한 겨울이라 실내스포츠외에는 별 다른 기사거리가 없어 고민하던 굿데이,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스포츠투데이, 일간스포츠 등 5개 스포츠신문들의 지면을 연일 수개면씩 채워주고 있다. 본인에게는 가슴 아프고 숨기고 싶은 사건이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신문을 팔려는 스포츠신문들에게는 기대치 않았던 '횡재(?)'로 작용한 셈이다.
<사진 이경실씨 폭행사건을 다루며 가정폭력의 본질보다는 재미난 가십거리로 취급하고 있는 12일자 스포츠신문들.> 참조: 사진파일 이름 '이경실보도'
특히 5개 스포츠신문 가운데서도 가장 신생매체인 굿데이는 13일 기자를 가짜 의사로 위장해 이씨 병실에 잠입시켰다가 들통나자 각서까지 써 주고는 형식적 사과문을 통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 부득이 취한 행동"이라고까지 강변하고, 위장의사로서의 잠입취재기를 자랑스레 한면중 반을 털어 보도하는 어이없는 보도태도를 보여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굿데이의 회진의사 사칭 병실 잠입 사건과 각서 및 사과 소동 전말**
굿데이는 13일자 31면 잠입취재기에서 "11일 시장에서 의사 가운과 청진기 등 소품을 준비하고 의료진을 가장해 병실 잠입에 성공한 취재기자 2명은 이씨와 10여분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11일 오후 구속된 이씨 남편 손광기씨가 '이경실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폭로해 이씨 명예에 치명적 손상을 입혔으므로 이씨의 입을 통해 폭행의 진실을 직접 취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의사사칭도, 회진의사를 가장한 병실 위장진입도, 확인되지 않은 부부간의 불화설 추측보도도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식의 뻔뻔스런 변명이다. 11일 병실에 잠입했던 두명의 굿데이 기자들은 행동거지를 수상히 여긴 이씨 가족들이 병원 당직실에 연락해 가짜 의사임이 탄로난 후 각서를 쓴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이 각서에 서명을 하고 쓴 내용은 "이경실씨와 대화내용은 기사화하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빚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goodday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등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굿데이 13일자 1면에 실린 '의사 위장잠입 사과-빠른 쾌유를 빕니다'라는 사과공고와 12일 취재진의 등쌀에 못이겨 병실을 공개한 이씨측의 배려로 물거품이 됐고, 쓰지 않겠다던 대화내용은 특종인양 13일자 1면과 31면을 차지했다.
***폭행사건이 문제의 본질인데 언론의 관심은 부부 스캔들**
독자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고 하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게 취재원의 프라이버시이자 인권이다. 언론이 취재과정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취재의 결과물인 보도를 통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보호돼야 마땅한 사생활까지 발가벗기는 것은 스스로 언론이기를 포기한 행태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씨가 5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을 정도로 인기있는 개그우먼이란 공인의 신분이며, 그와 관련된 폭행사건이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스포츠신문들의 관련보도를 보면 도대체 '가족폭력'이라는 폭행사건이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이씨와 남편 손씨 개개인의 '사생활'이 중요한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9일 발생한 이씨에 대한 남편의 폭력은 원인이야 어찌됐든 가정폭력임에 분명하며 손씨는 이씨의 경찰고발로 인해 긴급체포됐다. 문제의 본질은 가정폭력인 것이다. 그런데 9일 사건 발생 이후 굿데이를 비롯한 스포츠신문들의 보도에서는 가정폭력 사건이란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남편 손씨측이 주장했다는 이씨의 외도(?)가 폭력사건의 주범으로 등장하고 있다. 폭력사건만 갖고는 더 이상 기사가 안 되니까 의도적으로 이들 부부의 사생활을 표적으로 삼아 파경을 보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이 내재된 보도태도다.
이혼을 결정하는 것은 이씨 부부의 몫이지 언론의 몫이 아님에도 스포츠신문들은 이혼을 당연지사로 설정하고 폭행사건보다는 이들 부부 사이에서 발생한 스캔들에 초점을 맞춰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언론에게 평생을 약속한 한 부부의 이혼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했으며, 또 어떤 독자들이 의사를 위장해서까지 병실에 잠입해 심적 육체적 고통이 클 것이 분명한 이씨의 심경을 취재해보라고 요구했단 말인가.
얼마나 취재진의 횡포에 시달렸으면 방송에 비춰지는 개인의 이미지를 생명으로 여기는 연예인이 자신의 병실을 공개하고 사진 찍을 것을 허용했을 것인가. 스포츠신문들은 비단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앞서 최진실-조성민 부부 파문 등에서 보여준 본말전도라는 보도태도를 언제까지 고집할 것인가.
***5개 스포츠지 보도태도 오십보백보**
굿데이가 상대적으로 더 심하긴 했지만 이씨에 대한 스포츠신문들의 보도태도는 오십보백보다. 13일자 스포츠신문들의 머릿기사 제목은 '가슴치며 "남자라니!" 이경실 통탄(굿데이)' '갈 데까지 가자(스포츠조선)' '너도 터뜨려-손광기씨 가족 반격카드 준비' '죄값 치르겠다-이경실 남편 심경변화(일간스포츠)' 등이다.
5개 스포츠신문중 유일하게 스포츠서울만 한국 올림픽축구국가대표팀이 네덜란드와 친선경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머릿기사로 전했다. 하지만 스포츠서울도 이씨 사건에 대해 1면의 조그만 박스기사로는 못내 아쉬었는지 가독성이 높은 30면과 31면 2개면에 걸쳐 손씨가 이씨 폭행에 사용했다는 야구방망이의 법률적 해석 등등 시시콜콜한 기사들을 다양하게 배치해 아쉬움을 남겼다.
13일자 스포츠신문의 시시콜콜한 기사 백미는 일간스포츠가 30면에 보도한 이씨와 남편 손씨의 휴대폰 컬러링(통화 대기음)에 대한 분석기사다. 이씨가 사용한다는 '점점 더 멀어지나봐-(노래제목 '점점'-브라운 아이즈)'와 손씨의 컬러링 '아무것도 해준게 없어, 받기만 했을뿐('화장을 고치고'-왁스)'이 두 사람의 현 처지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의 휴대폰 컬러링이 사고가 난 후의 지금 심경을 예언해줬다는 말인지 참으로 집요한 관심이 아닐 수 없다.
***"가정폭력은 가십거리가 아니다"**
스포츠신문들의 선정적 보도를 참다 못한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연합은 11일 "가정폭력은 가십거리가 아니다"는 긴급성명을 냈다.
성명은 "연예인에 대한 언론의 사생활 캐기가 어느 때보다 극심해지면서 연예인의 사적인 생활이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며 "최근 최진실, 이경실 등 여성연예인이 폭력을 당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연예인이기에 남들은 죽도록 숨기고픈 남편의 폭행이 드러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폭력에 대한 언론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성명은 즉 "연이어 벌어지는 연예인에 대한 폭력에도 언론의 일관적인 태도는 원인이 무엇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돈, 외도 등 확인되지도 않은 소설을 쓰면서 마치 폭력의 원인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폭력에 대한 통념인 '무엇인가 맞을 짓을 했을거야'의 무엇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정폭력 피해자가 입었을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기보다 말초적인 기사로 또 한번의 상처를 주는 일에 언론이 앞장서고 있는 것"이라고 언론의 보도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
성명은 "이미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되면서 가정폭력은 사회적 범죄로 규정되었고 어떠한 이유로든 가정폭력가해자는 처벌받도록 되어 있다"며 "이 사건은 많은 가정이 가정폭력으로 희생되고 있는 것이 현실에서 연예인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에 불과하다. 언론은 단순 흥밋거리로 폭력기사를 다루어 본질을 왜곡하는 일을 삼가고 이를 계기로 뿌리깊은 가정폭력 허용 분위기를 바꾸도록 노력하기를 촉구한다"고 결론지었다.
피해자인 이경실씨도 13일 언론이 이번 사건을 다루면서 남편을 폭력배 등으로 매도하고 있는 데 대해 항의하며, 더이상 선정적 보도를 즉각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끝으로 한 독자가 이경실 사건과 관련한 스포츠신문들의 보도태도에 대해 프레시안에 보내온 이메일을 소개한다.
***"이씨 사건은 국가망신적이고 인권 위협하는 가정폭력인데 스포츠신문에는 재미난 가십거리인가"**
"정말 이젠 글도 안올리고 조용히 내 할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갈려고 했는데 이 온갖 부정과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비합리와 거짓과 사기 위선 강압과 더러운 권위가 판치는 한국사회는 절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전 오늘 이경실씨 야구방망이 구타사건을 다루는 국내 5개 스포츠신문들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이런 국가망신적이고 인권의 그 근본을 위협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정내 만연된 심각한 폭력사태에 대해 그것을 다루는 그들의 태도는 마치 불륜이 있었느냐 아니냐 등등 또는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랸 식으로 재미난 가십거리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명예훼손적인 검증되지도 않은 추측성 글들을 마구 실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대중지를 지향하는 스포츠신문 또한 사회적 공기를 자처하는 언론임에 틀림없으며 대중의 사랑과 독자들의 아픔, 취재원의 고통을 함께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건수만 생기면 연예인들을 난도질하는 보도태도는 지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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