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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모술수의 대가 韓非子와 李斯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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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권모술수의 대가 韓非子와 李斯의 죽음

신영복 고전강독<146> 제12강 한비자(韓非子)-14

끝으로 이사(李斯)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법가를 끝내려고 합니다. 이사는 한비자를 이야기하기에도 좋고 진시황의 모신(謀臣)으로서 천하통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의 헌책으로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한비자를 직접 만나본 진왕이 한동안 망설였다고 합니다. 아마 한비자의 언변이 매우 서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한 동안의 망설임이 한비자에게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비자를 죽이자는 진언을 합니다.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공자입니다. 그를 중하게 쓰면 진나라를 위하여 진심으로 진력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를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물어 그를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이사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한비자의 역량을 아까워한 진왕은 다시 한동안 망설이게 됩니다. 한비자를 일단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사는 틈을 주지 않고 옥중에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진왕의 뜻이 아님을 안 한비자가 진왕을 만나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한비자를 옥에 보내기는 하였지만 그 직후 진왕은 마음이 변하여 한비자를 사면하려고 옥중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한비자의 목숨이 끊긴 후였습니다. 한비자가 죽고 3년 후에 한(韓)이 멸망하고 한이 멸망한 뒤 10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전하는 이야기가 너무 극적이어서 신뢰감이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극적 구조에 대한 갈증이 없지 않는 것이지요. 스스로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었던 이야기도 역설적이 아닐 수 없으며 특히 경쟁상대를 제거하기 위하여 동문수학의 우정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이사의 비정함을 통하여 전국시대의 사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합니다.

이사는 BC 221년, 진왕(秦王) 정(政)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모든 권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나갑니다. 그때까지의 사회구조였던 봉건적 지방분권제도를 청산합니다.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던 것도 이사의 주도 하에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봉건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이사는 시황제에게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이사는 봉건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비록 왕자나 동족을 제후로 봉하더라도 대를 거듭할수록 혈연이 멀어져 결국은 이반(離叛)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군수, 군위(郡尉), 군감(郡監)을 두고, 군 아래에 현을 두어 현령, 현위, 현승(縣丞)을 임명하여 민정(民政), 군사(軍事), 감찰(監察)의 3권을 분담하게 하였습니다. 치밀한 제도적 개혁입니다. 이들 지방장관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통치자인 황제에 의하여 임면되도록 함으로써 황제의 명령은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하달되었습니다.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중국의 정치제도상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체제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진의 통일과 이사를 이야기한다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방금 언급한 분서갱유(焚書坑儒)입니다. 통일 직후 강력하게 추진되는 중앙집권적 개혁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차츰 봉건제 복원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에 대하여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焚書)관련 내용에 의하면 첫째로 박사관(博士官)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약(醫藥) 점복(占卜) 종수(種樹) 등 과학기술 서적도 제외하였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秦)의 전적(典籍)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의 분서는 차라리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관부(官府)소유의 서적이 서적의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詩書)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갱유(坑儒)에 관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많습니다. 우선 땅에 묻힌 사람의 숫자가 4백60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갱유의 발단이 된 것은 불사약을 구하던 방술사(方術士)인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 도망한 사건이었는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이 갱유의 영을 내린 이유는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사(御使)를 시켜 요괴한 말로서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을 조사하게 하자 서로 고발하여 법령을 어긴 자가 4백60명이었는데,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유학자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분서갱유라는 표현도 한(漢)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사와 한비자의 인생을 일별하면서 느끼는 감회는 역사란 참으로 장대한 드라마라는 새삼스러운 느낌입니다.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애를 끝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 역시 BC 208년 7월(2세 황제 2년)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법가적 단호함과 공평무사함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간신 조고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비명에 가고 맙니다.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는 이사에 대하여 그 공적이 주공(周公)에 비견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주살(誅殺)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하였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간신 조고(趙高)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여 적장자(適長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湖亥)를 옹립한 것은 정도(正道)를 배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公明)함과 공평(公平)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었으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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