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하반기 마지막 시기에 들어서서, 북한 핵문제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최대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연일, 이라크 문제를 다루었던 비중 못지않게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 구체적이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조는, 북한이 당장 핵무기 개발 단계로 들어가 미국에 대해 군사적 위협과 도발을 감행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간 안보상에 중대한 사태가 즉각 벌어질 것 같은, 긴급사태의 느낌을 주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미 언론들, 북한의 호전적 이미지 확산**
미 언론들은 북한이 미국에게 “위협(threat), 협박(blackmail), 경고(warning)”하고 있는 것으로 표제를 달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시 정권은, “미국은 경고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기본자세를 천명하는 것으로 압축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북한이 미국에 대하여 그토록 강경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황설명은 배제되어 있다.
이렇게 되니, 미국의 대북 강경책은 북한의 이러한 '도발적'인 자세 때문에 정당하고 타당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 족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전쟁 도발 움직임, 위기의 진원지, 위험한 행위를 함부로 하고 있는 국가, 등등 부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이로써 북한에 대한 일종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 목표로서의 요건을 구비해가고 있다는 여론 조성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북한 핵 문제가 중대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정작 이 문제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발생하고 있으며 서로의 충돌지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료한 정리는 되어 있지 않다.
북한이 미국의 강경책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제네바 합의 하의 핵 관리체제를 변화시키려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해설이 없다. 게다가, 최근 미 언론들이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부시 정권의 대응 방식을 비판적으로 짚지 않고 있는 것은 차기 노무현 정권의 대북 문제에 대한 전열이 가다듬어지기 전에 미국의 틀을 기정사실로 해서 풀도록 압박, 내지는 제동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일각에서 일고 있다.
부시 정권의 대북 대응을 대변하고 있는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지난 12월 23일, “한 전선에는 결정적으로(decisively) 승리한다, 그리고 즉각, 신속하게(swiftly) 다른 곳에서도 적을 패배시킬 것이다.” 라면서, 이와 관련된 전쟁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대북 전쟁정책의 성격이 <속전속결>이라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그것은 최악의 경우, 핵 선제공격과 그에 따른 핵전쟁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대북 속전속결 전략은 핵전쟁까지 포함할 수 있어**
사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그 선택의 폭이 이미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전쟁까지 염두에 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핵정책 반대 운동에 깊이 관여해온 헬렌 캘디콧트(Helen Caldicott) 박사는 부시정권의 핵심세력을 비롯, 이들과 연결된 군수산업자본은 핵전쟁을 통한 패권확보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해왔는데 (새로운 핵 위협: 부시의 군산복합체/The New Nuclear Danger; George W. Bush's Military-Industrial Complex, New York, The New Press, 2002), 부시 정권의 <핵 태세 보고서>을 비롯 부시 닥트린에서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이 이미 공식 전략으로 채택된 사실을 보더라도 이는 심각한 우려 사항이 아닐 수 없다.
핵전략은 그 이전 단계에서 군사행동의 불가피성이 최대한 입증되고 그에 기초한 논의가 상당 정도 축적되어야 하는데, 미국은 지금 바로 그런 과정을 하나하나 거쳐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해서 얼마 전, 부시 정권은 북한의 <핵 동작> 조처가 수위를 높여 가자 “비 외교적 방식” 선택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비 외교적 방식, 즉 군사적 대응의 초기 단계는 이미 지난 번 북한의 예멘행 미사일 수출 선박 나포 사건을 통해서 사실상 드러난 바 있다.
지난 12월 12일, 북한은 제네바 협정 파기 선언과 함께 핵시설 재가동 추진 의사를 밝혔다. 북한 지도부가 제네바 합의의 국제법적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핵 문제 접근의 전격적 변화를 결심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나포 사건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이미 군사적 행동의 초기 단계로 가고 있다는 정세 판단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북한의 불가침조약 요구를 거부한 채, 문제를 그와 같이 군사적 방식으로 접근해가고 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시 정권이 북한의 대응 의지와 그 강도가 어디까지인가를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낳게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얌전한 대응”을 할 경우, 미국의 대북 군사조치는 더욱 가속화되고, 대북 해체전략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할 수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 이미 군사화 초기 단계로 들어섰나?**
미국은 미사일 수출 선박 나포 과정을 통해 (1) 북한이 미사일 수출 국가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2) 북한이 이러한 군사행위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반응할 것인가, 그리고 (3) 북한과 동맹적 우호관계에 있는 나라, 가령 중국이나 러시아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를 보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가장 신경 썼던 것은 중국의 반응인데 중국은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이것이 부시 정권에게 다음 단계의 조처로 나가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시 정권이나 의회 내에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있는가인데, 현재로서는 군비통제위원회 소속 공화당 하원의원 커트 웰던이 강공을 피하고 대북 대표단을 파견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웬디 셔먼 같은 클린턴 정부 시기의 대북 협상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럼스펠드를 비롯한 부시 정권의 강경세력들은 이를 “말도 안 되는 이야기(nonsense)"로 취급하면서“북한은 매우 위험하며, 정치 탄압을 자행하고 정치범을 집단 수용하는 국가이기에 이들의 협박에 넘어갈 수 없다”라고 연일 강경발언만 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 우리의 자세가 가지고 있는 근본 좌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것이다. 현재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당선자 진영, 내지는 국내 언론들은 이 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이 문제는 결코 그럴 사안이 아니다.
중재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책임 당사자로서 풀어나가야 할 중대 현안이며 게다가 북한에 대한 설득만 강조되고 있는데, 그 설득에도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실현성이 있을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북한의 핵 동작,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일차적 관건**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해법의 선택에 있어서 북한의 핵 동작과 관련한 사태의 전말과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일차적인 관건이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우리와 미국의 해석에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해결 방도의 선택이 주도적으로 전략화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북한 핵 동작에 대한 성격규정과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행동반경은 좁아지게 되어 있다.
미국은 현재 핵 관리 체제에 변화를 가하고 있는 북한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핵무기 개발 조처>로 단정 짓고 있다. 하지만, 제네바 합의의 틀, 그 핵심 가운데 하나는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은, 핵 감시 장치를 제거하고 핵 연료봉에 손을 대는 과정은 미국이 제네바 합의에 약속했던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에너지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결의 방안이 조속히 세워지면 북한의 핵 동작은 일단 동작 중지의 명분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북한에 대한 공격적 전략을 앞세우는 것이 어려워지게 된다. 즉, 우리로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핵 동작이 가지고 있는 근본 성격이 장기적으로는 핵무장 프로그램 가동 과정의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보다 급박한 사안은 에너지 문제 해결이라는 점을 핵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북한과 미국의 적대적 충돌의 긴장도를 낮추어 군사적 방식의 선택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면, 그 다음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상호 관심사, 말하자면 북한의 핵무장 프로그램 해체와 미국의 선제공격 정책 철회를 동시에 올려놓고, 그 결론으로 사찰 수용과 불가침 조약 체결의 방식으로 서로 요구 사항을 맞교환하도록 협상의 틀을 짜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남북과 미국 3자가 평화협정 체제로 가는 방안에 대한 논의의 기초를 마련해가야 할 것이다.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결을 핵심에 놓고 접근해야**
에너지 문제 해결은 미국의 중요공급 지속을 설득하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현재 미국 정가의 흉흉한 분위기나 부시정권의 대북 강경 정책으로 봐도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연합과의 협력을 통해 대북 에너지 지원 틀을 새롭게 짜거나, 아니면 우리가 단독적으로 북한에 전력을 공급해주면 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지난 6.15 남북 정상회담의 과정에서 약속되었다가 미국의 제동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던 것인데, 전쟁을 막기 위한 조건형성을 위해서 전력공급 정도의 결단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전력공급이 즉각적으로라도 이루어지면 북한으로서도 더 이상 핵 동작을 그대로 추진할 수 없으며, 미국으로서도 대북 공격 전략의 추진을 내세우기가 어렵다. 그로써 생긴 여지를 가지고 다음 단계의 대화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황이 이렇게 풀리면 미국으로서는 자신이 배제된 새로운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틀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에 합류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의가 미국 내에서 발생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부시정권의 전쟁정책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미국 내부에서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고리가 이로써 확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접근의 기본 틀을 군사적 성격에서 경제 발전전략으로 전환**
이와 함께 그간 북한이 자신의 경제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해온 노력, 미사일 실험 유예조처, 국제통화기금 (IMF)이나 아시아 개발 은행(Asia Development Bank)과의 관계 형성 노력 등의 움직임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도록 미국 정가 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래야 현재까지 형성되어온 북한에 대한 부정일변도의 이미지를 전제로 한 강경정책의 방향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으며, 그로써 우리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전제에 군사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경제발전전략을 중심으로 북한을 지원, 이 체제가 세계 경제와 새롭게 결합, 생존할 수 있는 체제임을 인식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미국 부시 정권의 군사전략이 전제하고 있는 개념과 성격 규정을 하나하나 해체해가면서, 북한의 체제 보장, 체제 생존, 체제 변화에 필요한 중대한 교각을 건설,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싼 핵 위기의 평화 지향적 해결을 도모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패권주의적 전쟁정책의 의지가 막강한 현 부시정권의 미국을 상대로 민족 전체의 생명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향후 민족 통일의 기반을 마련해가는 일은 실로 치밀한 준비와 논리의 점검, 그리고 우리 나름의 해결 수단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현 상황을 비상한 국면으로 파악하고 최대의 민족적 역량을 집결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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