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1일 5㎿(메가와트) 원자로와 22일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8천여개의 폐연료봉 저장시설의 봉인을 제거한데 이어 23일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봉인 제거에도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이에 대해 미국이 '전쟁 불사론'까지 언급하면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사태가 심각한 대치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방사화학실험실은 폐연료봉의 화학적 처리를 통해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핵재처리 시설이다.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의 봉인을 제거함에 따라 지난 94년 북미 제네바합의에 의해 동결된 5곳의 핵시설 가운데 3곳의 봉인이 제거된 상태다.
정부 당국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봉인제거 작업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며 "현재 정부는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의 원자로 봉인제거 이후 추가조치로 원자로 재가동을 위한 연료봉 장전 등을 예상했으나 북한이 폐연료봉 저장시설 및 핵재처리시설 봉인까지 이처럼 빠른 시간내에 제거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체제보장 위해 미국 끌어들이려는 협상카드**
북한이 이처럼 빠른 시일내에 핵시설 재가동은 추진중인 배경에는 무엇보다 지난 94년처럼 핵을 담보로 북미관계 개선과 북한체제 보장을 받아내기 위한 협상 테이블로 미국을 끌어내겠다는 '벼랑 끝 전술'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23일 "조선반도(한반도) 핵문제를 산생시킨 장본인은 미국"이라며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 토마스 파고 미 태평양함대사령관 등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언급한 것은 "저들에 의해 산생된 핵문제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워서 국제적인 압력분위기를 조성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은 또 "미제는 조선반도의 핵문제를 산생시키고 그 해결을 회피해온 핵범인으로서의 정체를 가릴 수 없다"며 "미국이 진실로 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심이 있다면 부질없는 소동을 걷어치워야 하고 우리의 불가침조약 체결 제안에 호응해 나서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통한 북한 체제보장을 미국이 인정해야 북한도 핵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 추진한 북일 정상회담 및 신의주 특구지정 등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내부의 체제결속을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밖에 이라크 사태 등을 지켜본 북한이 체제보장을 위해 실제로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했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예상할 수 있는 북한의 다음 조치는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이 중단된 50MW, 200MW 원자로 재건설 착수가 있다.
***미국, "북 핵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
미국은 이와 관련, 핵 개발 프로그램을 둘러싼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필립 리커 미 국무부 대변인이 23일 밝혔다. 리커 대변인은 "국제 사회는 위협이나 파기된 약속에 응해 대화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미국도 북한이 스스로 서명한 조약과 합의를 준수하도록 흥정하거나 유인책을 제공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리커 대변인은 그러나 "핵개발과 관련해 북한이 초래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우방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해 아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데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음을 내비쳤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북핵 문제와 관련, 세계가 이라크에 집중함으로써 북한이 대담해질 경우 "실수가 될 것"이라고 23일 경고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국방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하나 이상의 군사적 분쟁에 동시 대처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하며 자신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무장해제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이 이용하려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23일 이와 관련,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거듭 확인해 왔지만 북한이 점점 더 핵무기 제조에 근접할 경우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조치 등 '비외교적' 대응을 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부시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가 경고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러시아 또한 23일 북한이 폐연료봉에서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데 사용되는 민감한 핵실험실에 대한 유엔의 봉인 제거에 착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나섰다. 러시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러시아는 핵확산 금지조약에 따른 의무준수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설계된 "감시장비를 제거하는 북한의 일방적 행동"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북한이 IAEA의 핵확산 금지조약의 의무를 엄격히 준수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평북 방사화학실험실과 북한 핵개발 가능성**
북한이 23일 봉인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진 평안북도 영변 방사화학실험실은 폐연료봉, 즉 사용후 핵연료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시설이다. 이 시설은 애초 96년 완공 예정으로 건설중이었으나 94년 북미 기본합의로 중단됐다. 94년 북미 기본합의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 시설을 봉인하고 사찰관을 상주시키며 감시해왔지만 보수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북측 인력은 IAEA 허용하에 출입을 해왔다.
북한은 이미 90년 3월 방사화학실험실 시설 중 현재 거의 완성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진 반입 핫셀(hot cell)에서 소규모 플루토늄 추출실험을 한 바 있다. 플루토늄은 맹독성 방사성 물질이기 때문에 재처리 작업을 할 때에는 핫셀과 글로브 박스(Glove Box) 등 특수 차폐시설이 필요한데 이중 핫셀은 사용 후 핵연료 같은 고준위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기 위해 차폐된 작업시설로 투명 납유리를 통해 작업실 내부를 보면서 원격조종 장치를 이용해 작업을 할 수 있게 돼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따르면 북한은 길이 1백80m, 6층 건물인 방사화학실험실중 반입 핫셀은 거의 완성했고, 중앙 핫셀도 건설중이었으며 폐기물 처리 시설은 40%정도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연합뉴스가 인용 보도했다. 이 실험실의 설계용량은 연간 25t이었지만 최대 용량은 연간 70t 정도로 추정된다.
북한이 플루토늄을 추출하려면 폐연료봉을 5㎝ 길이로 절단해 용해조에 넣은 뒤 용매 추출 방식으로 플루토늄을 분리해내야 하는데 이중 Pu239의 순도가 93% 이상이어야만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있다.
북한이 영변 5㎿ 원자로에서 꺼낸 8천여개의 폐연료봉(50t)에 손을 댈 경우 어느 정도 순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지난해 말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순도 94∼98%의 플루토늄 28∼35㎏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도면 핵탄 4∼6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폐연료봉 자체에 손을 댈 경우 3~4개월 후면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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