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명운을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 서게 하는 정세 속에서 치른 2002년 대선은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평화지향적 성격을 강화할 수 있는 근거 하나를 최소한 확보하게 되었다.
냉전수구세력의 치열한 반동적 결집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적으로 극복함으로써 탈냉전 평화개혁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시종일관, <한반도 남쪽 지역의 대북ㆍ대미 관계에 대한 국민투표(referendum)>라는 관점으로 집약되었다. 그것은 이번 대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정확히 내다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 정권 등장은 '대북ㆍ대미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의 산물**
이러한 준(準) 국민투표 과정을 통해 등장하게 된 노무현 정권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인식의 기본 틀은 <자주와 평화>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이 시대의 정신을 바르게 반영한 것이자 이번 선거의 요체가 그대로 확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전국적으로 최대의 관심을 모은 사안은 미국 문제였으며, 이에 대한 입장 정리가 대선 후보들 모두에게 고강도의 압박을 가했고 마지막 순간에 기습적으로 요동친 정몽준 변수도 속사정과는 달리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역시 이 문제와 관련되었었다.
신임 노무현 정권의 대북, 대미 정책은 결국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의 사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북한, 그리고 미국의 입장 차이가 빚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냉전체제의 힘겨루기 속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적대관계를 군사적 방식으로 정리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인가로 압축된다. 한국전쟁의 역사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군사적 선택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현재의 정전(停戰)체제는 그 실패의 사후 처리가 완료되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사후 처리를 완결 짓고,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일차적 관건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매우 간략하게 정리된다.
즉, (1) 현재의 정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하여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어왔던 일체의 정치, 군사적 관계를 재정립하고 (2) 미국의 전쟁 정책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3)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한반도 질서에 대한 합의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미완의 한국전쟁 결과 정리 작업이 일차적**
정전협정체제의 본질적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준 전시ㆍ군사적 대치상태이다. 준 전시ㆍ군사적 대치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 상대로부터 침략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는 상호 불가침 체제를 만드는 것으로 일차적인 해결을 볼 수 있다.
이미 남북 상호불가침 조약은 1992년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방식으로 존재해 있고, 이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인 6.15 선언으로 그 정신과 자세, 그리고 실천에서 보다 명료하게 그 수준을 향상시켰다.
그런데 정전협정체제에 또 하나의 당사자가 있으니, 그것은 미국이다. 그러므로 정전협정체제의 평화협정체제 전환에 불가결하게 요구되는 것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불가침 조약체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북한이 제안했던 바였으나 미국이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서 바로 이 대목에서 신임 노무현 정권의 역할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과 함께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장 체제의 포기를 비롯한 군축협상에 전격적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전략을 포기해야 하며, 북한은 핵, 미사일, 기타 대량살상 무기 체제와 관련한 자세 전환과 함께 이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절차를 밟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당면한 북핵 문제는 이 맥락 속에서 해결되어 갈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현재 미국 부시정권의 전쟁정책이 확고한 상황에서 쉽지 않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미국에 대한 자주적 자세를 굳건하게 견지하고 평화체제 건설에 관한 한 6.15 남북정상회담 합의 정신에 기초한 북한과의 민족공조 차원의 노선을 명확히 한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반전평화 운동의 역량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이를 미국의 전쟁정책에 대한 방어진지로 삼는 전략이 필요하다.
***군축, 동북아 집단안전보장체제, 그리고 영세 중립화 프로젝트**
그리고 이 작업의 단계와 수준이 높아지면서 군축문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논의를 진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남북 상호 군축과 함께, 동북아시아 전체의 집단안전 보장체제의 사안과 결합시켜 풀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군축이라는 고리가 자칫 민족전체의 방위력을 과도하게 약화시켜 주변 열강의 포위 전략에 희생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라는 논리로 정당화될 미국의 군사력 주둔환경을 점진적으로 소거해나가는 작업과도 장기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노력이 축적되면서 또 한편으로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불가침조약의 다자구도로 이루어지게 될 <한반도의 영세 중립화 구상>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정책에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고, 남과 북의 체제적 결합이 평화적으로, 그리고 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을 확보하는 방도인 동시에 주변 열강 간의 담합으로 인한 한반도에 대한 다국적 공동관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 구상은 기본적으로 미국에게 한반도 문제에 손을 떼라는 요구가 된다는 점에서 미국의 반발강도가 매우 강한 사안이 되겠지만, 국내적으로는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임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확고한 자신감과 민족적 주체성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대미 관계에 있어서 군사문제만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지배 전략에 대한 대응 또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김대중 정권의 성립 과정과 그 유지의 근본에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적극적 내지는 굴종적 수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사회적 양극화와 민족경제의 기반 약화,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카지노 자본주의에 끌려들어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이 이에 대하여, 탈 신자유주의 선택에 관심을 갖고 한국사회 내부의 자본의 권력과 계급적 모순에 대한 해결에 노력하지 못하면 김대중 정권이 노정했던 매판적 유산이 그대로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포섭전략 강화 경계해야**
그리고 이러한 탈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택을 강화하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의 심화는 물론이고 민족경제의 자주적 수립이라는 통일체제의 구상도 자유롭게 전개시킬 수 없게 된다. 자칫 초국적 자본의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허용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미국 월가의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시각은 노무현 당선자가 그간 부시 정권의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언급을 했던 반면,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한 바는 없다는 것에 대한 호의의 표시이기는 하나, 이제 우리는 미국의 초국적 자본이 노무현 정권 포섭전략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예의 주시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총괄적으로 보자면, 이제 노무현 정권은 이번 선거가 민족사적으로 응어리져온 문제의 압축적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막판의 정몽준 이탈 변수가 결과적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향후 부담을 덜어 주었다는 점에서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역사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은 신임 노무현 정권이 민족의 양심과 자주적 의식에 확신을 걸고 대외관계의 자주성과 한반도 문제 해결의 평화적 선택을 보다 자신감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난 12월 14일 광화문 촛불시위는 우리 역사가 매우 새로운 혁명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으며, 노무현 정권의 태동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기류 속에 자리 잡게 된 현실이라고 하겠다.
이제 노무현 정권의 수립으로 그 역량의 기초가 확립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식의 혁명적 변혁은 지금부터라고 하겠다. 외세가 강요하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켜내며 통일의 과정에 필요한 역량을 축적해나가는, 민족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가운데 평화로운 조국의 내일을 신나게 일구어내는 시대가 이로써 전개되어 나갈 것을 뜨겁게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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