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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과 기술혜택의 공유, 무엇이 더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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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과 기술혜택의 공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논쟁> hari-hara의 '위험 없는 성공은 없다'를 읽고

다음은 프레시안 10일자 'hari-hara의 생물학카페'에 실린 '위험 없는 성공은 없다'에 대해 필자 이은희씨와 독자 우철웅씨가 벌이고 있는 논쟁의 기록이다.

필자 이은희씨가 인간복제에는 반대하지만 불치병 치료를 위해 체세포 핵치환 기술이 발전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독자 우철웅씨는 이제는 기술의 발전보다는 기술발전의 혜택을 사회가 골고루 나눠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인간복제 기술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관련 기술의 개발을 금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씨는 이어 "이은희 기자가 다룬 주제는 매우 큰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시안에서는 적절한 논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문제라고 하겠습니다.균형있는 시각을 견지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기사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자들에게 회람하거나 반론을 청취할 수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해 왔다.

프레시안은 인간복제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이ㆍ우씨간의 지상논쟁을 게재하는 것과 함께 관련 전문가, 일반인들의 참여를 적극 환영한다. 반론을 제기한 우철웅씨는 농공학 박사(농업토목)로 현재 서울농대 농공학과에서 박사후(post-doc) 연구과정을 밟고 있다. 편집자

***반론(우철웅): 기술의 발전보다 기술혜택의 공유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안녕하세요.

프레시안에 올리신 님의 글('위험 없는 성공은 없다')을 보고 저의 생각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공학박사로서 생물학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싶습니다.

이은희 님의 주 논지는 '줄기세포를 치료목적으로 이용하여 생명을 연장하거나 불치병을 치료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체세포 복제 기술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개발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도전의 대상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 반론의 논거는 세가지 입니다.

첫째, 기술의 계급성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에게, 인류에게 유익한 것입니까? 기술은 그 기술을 가지고 향유할 수 있는 집단에게만 유익한 것은 아닐까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한줌의 지식과 기술도 없이 한줌의 곡식을 얻기 위해 눈물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현실은 지식을, 기술을 더 얻기 위해 싸우는 것보다는 그 공유에 대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체세포 복제가 대다수 인간의 삶에 유익할까요? 그 많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극소수 인간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금단의 열매가 되지는 않을까요?

두번째, 체세포 복제 기술의 위험성입니다.

체세포 복제 기술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어쩌면 이은희 님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복제양 돌리,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험관 복제가 수행되었는지 또 성공적으로 착상된 배아들 중 또 얼마나 많은 배아에서 기형이 발견되었는지 생각해 본다면 핵치환의 불안정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과연 이 불안정성을 극복하여 정말 안정적인 배아복제가 가능할까요?

세번째,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체세포를 복제하여 이은미 님이 말한 바와 같이 시차를 두고 태어난 쌍둥이를 가질 수 있게 되면, 더 좋은 유전적 형질을 갖는 인간이 선택적으로 복제될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결국, 인간은 제 3의 진화과정을 시작하게 되며 그 결과는 인간의 존재, 그 존엄성에 대한 훼손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기술적으로 끝없이 발전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요? 이미 인류는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과학기술자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 봅니다. 내가 가진 기술이 얼마나 가치있게 쓰이고 있는지. 이은희 님의 진지한 답변 기대합니다.

***재반론(이은희): 기술발전의 자연의 원칙, 기술의 계급성 타파는 과학자의 영역 밖**

메일 잘 받았습니다. 우철웅님.

기본적으로 저는 발전할 수 있는 기술은 발전하는 대로 놓아두는 것이 자연의 원칙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전 진화를 믿습니다. 생물은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고, 인류의 역사는 생물체의 진화라는 역사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창조해내는 모든 것 역시 진화라고 여기는 것이죠.

따라서 인류의 기술 발전은 순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상에서 손과 머리가 자유로운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첫째, 기술의 계급성을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는 제가 대학때 과학기술운동이나 시민과학센터 분들과 조금 어울리면서 들은 이야기와 맥락이 비슷하군요.

물론 과학의 발전의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만큼 이상적인 것은 없을 겁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니 힘들여 기술을 개발하는 데 회의적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금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과학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자체의 구조적 계급성이 문제되는 것이죠.

과학자의 의무는 인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들이 노력해서 일구어낸 성과가 사회로 반영되어지는 순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로 이런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지 기술 그 자체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과학의 성과를 문제시하기 전에 사회의 구조적인 계급성을 타파해야 할 텐데 이건 아마도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나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은 이미 실패작으로 끝났으니까요.

둘째,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인데, 제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인간 복제는 반대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체세포 핵치환 기술 자체일 뿐이지, 인간 복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체세포 핵치환 기술을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살릴 수 있는 생명을 단지 장기 공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에 막연한 생각을 품은 나머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어가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는 것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인 배아와 이미 삶을 시작하였고 가족과 일과 인생이 존재하는 사람의 생명 중 어느 쪽에 가치를 두겠냐고 하신다면 전 후자쪽입니다.

간단하게나마 제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아직 공부해나가야 하는 처지에 있는 제 의견이 자칫 지나친 오만일 수도 있지만, 제 글에는 위에서와 같은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제3 반론(우철웅): "자신의 피조물인 기술에 대해서 정말 기술자는 책임이 없습니까?"**

은희 님은 저의 첫번째 지적 즉, 기술의 계급성에 대한 지적을 '계급성은 과학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계급적으로 어떻게 이용되든간에 과학자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과학자가 과학자의 연구성과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연구성과의 계급적, 사회적 결과에 대해 무지해서입니까? 아니면 순전히 과학은 과학일 뿐이기 때문입니까?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피조물인 기술에 대해서 정말 기술자는 책임이 없습니까? 책임이 없는데 어떻게 그 결과에 대한 권리가 존재하나요? 과학자는 자본가가 대주는 돈으로 연구만 하는 그런 자본가들에게 머리를 빌려주는 고급인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까?

은희님이 적었듯이 인류에게 유익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과학자의 의무라는 점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그 기술이 지금 현실에 반영될 때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에 대해 과학자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을 진화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파괴와 멸종이 있었습니다. 그럼 인간이 창조하지 않고 인간이 파괴한 것들 역시 진화의 과정입니까? 인간이 자연의 진화과정에서 자연이 스스로 행한 일들을 직접 주관하거나 가속시키는 것이 정말 당당하고 자랑스럽고 추구해나가야할 가치란 말입니까?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소중함 앞에 어떤 반론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다만, 은희 님이 말하는 생명에는 한줌의 기술이 없어서 단 한가지의 지식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가련한 많은 생명도 포함되고 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치환으로 전능세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서 가지가지의 장기를 만들어서 이식하는 기술이 개발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할까요?

지금은 노환으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죽어가던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심장과 새로운 허파를 갖지 못한 것에 절망하며 죽겠죠. 이런 상황이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영원히 이런 연구가 금지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구를 진전시키기 이전에 이들 문제에 대한 깊은 논의가 필요하며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할 때까지 연구를 금지하자는 것입니다.

가치있는 토론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제4 반론(이은희): "진정한 평등, 어디까지 가능한가"**

지금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철웅님께 질문부터 하고 싶네요. 과연 님께서는 진정한 평등이란 무엇이고 진정하게 사회를 위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철웅님과 저가 생각하는 평등과 사회에 대한 공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사상 하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나름대로 정의합니다. 똑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도 개인에 따라서 다른 입장으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계실테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니 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다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좋겠군요(모든 과학자가 제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생각은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편입니다. 제 기준에서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을 듣고 제게 공감하시든 아니든 그것은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각자의 의지에 따른 것이고,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방향을 피력한 것 뿐입니다. 제가 다른 의견을 듣고 거기에 공감한다면 동의할테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제 자신이 스스로 내린 사물에 대한 정의와 다른 또 하나의 의견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과학자에게도 윤리적인 잣대는 필요합니다(여담이지만, 전 학생 때 진예모라는 곳을 접해본 적이 있습니다. '진보적 예비 과학기술자들의 모임'의 준말인 그 곳에서 저는 과학자 역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노동자로써 사회에서 어떻게 동화되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배들에게 배우고 스스로 찾아서 읽어도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동의되지 않더군요. 제가 오만과 아집에 가득차서일까요? 이미 결정되어버린 개인의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해졌지요).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과 자기 통제에 대해서는 저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건 과학자가 자신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어놓은 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져야한다고 생각하시냐는 겁니다.

과학자는 신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고, 그들이 내어놓은 결과가 어떻게 사회에 풀려나갈지 그 방향성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전지적인 존재가 아님을 아실 겁니다. 사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일생을 실험실에 바칠 때 그들을 지탱해주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님께서도 공학박사를 하셨다고 하니 그 기분 잘 아실 겁니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가 세상의 이로움에 위반될 경우,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과학자 자신이라는 것도 아실테구요. 과학자의 윤리성은 자신의 결과물이 사회에 이로움이 될지 안될지, 만약 이로움과 해로움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어 내어 놓을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시점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예를 들겠습니다. 노바티스사가 새로 내놓은 백혈병 약제 글리벡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글리벡은 많은 백혈병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어서 기적의 약제로 평가되었습니다만, 너무나 비싼 약값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결과물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염려하여 연구를 접었어야 했을까요? 또한 제약회사를 비롯한 자본가들은 그것으로 인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연구를 지원했을 겁니다. 과연 과학자들이 그걸 몰라서 연구를 계속한 것일까요? 그들의 그런 논리를 알면서 연구를 했으니 자본가의 꼭두각시라고 그들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글리벡은 백혈병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는 물질이고, 약값이 너무 비싸서 많은 사람에게 효용이 돌아가지 않을지언정 그래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손쓸길 없는 절대적인 절망과 상대적인 박탈감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전자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인 박탈과 계급적 불평등으로 인해 세상에 분노를 느끼고 잘못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체체를 전복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술 자체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명의 존엄성 문제 역시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적으로 놓아두면 죽을 삶을 억지로 연장시키고 조금 더 살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맞아들이는 죽음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전 살고자 하는 의지가 타인의 존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말했듯 체세포 복제가 곧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배아는 가능성일 뿐입니다. 따라서, 체세포 복제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장기를 위해서 복제인간을 잉태하는 것은 결단코 반대합니다( 휴우.. 이 글이 프레시안에 올라가면 또 얼마나 지독한 독설들이 돌아올지 조금 우려되는군요...).

마지막으로 전 개인적으로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을 이분하는 것 자체가 사람만이 우월한 존재라는 지나친 인간우월주의의 표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진화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전 사람이 인위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자체가 전 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의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변화를 거듭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우연적인 고리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그 안에서 부대끼고 변화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역시 그 수많은 연결 고리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수많은 존재들이 자연의 냉혹한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했으며 자연은 그들이 있었던 흔적들을 단지 화석 몇 조각으로 남긴 채 그저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진화에서 인간이 태어났고, 인간은 우연찮게도 자연의 힘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획득했다는 것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일이 인류 진화에 도움이 될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게 될지는 시간만이 알고 있겠죠.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는 끊임없이 부딪치고 깨지고 덤벼들어야만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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