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제 8>
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年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莊周笑曰 ‘周將處夫材與不材之間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外篇 山木)
材(재): 재목 감. 쓰임이 됨. 不材(부재): 재목감이 못됨.
似之而非也(사지이비야): 비슷하지만 (道는) 아니다.
未免乎累(미면호누): 화를 면할 수 없다.
이 예제도 일부만 취한 것입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길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나무를 베지 않고 있는 나무꾼에게 그 까닭을 묻자 나무꾼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不材)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 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장자 일행이 산에서 내려와 친구 집에 묵었는데 주인은 매우 반기며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거위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으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이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다음은 본문입니다.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 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道)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쓸모가 있으면 천수를 못한다고 하지만, 쓸모가 없으면 취직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생업(生業)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체로 여러분들의 고민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의 고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대학에서 인문학과 교양교육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가 바로 재(材)와 부재(不材)에 대한 현실적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장자가 제기한 재(材)-부재(不材) 논의는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좋다 아니다라고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材)와 부재(不材)를 뛰어 넘을 것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도 재와 부재의 중간(中間)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쓸모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의 하위개념이지요. 다른 것을 만드는 데에 유용한 것인가 아닌가하는 수준의 것이지요. 오늘날은 물론 상품생산에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장자가 중간에 서겠다고 한 것은 재(材)-부재(不材)의 논리를 조감해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간(間)이란 것이 바로 조감(鳥瞰)의 자리를 의미하고, 반성의 자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도 사실은 도와 비슷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장자의 결론입니다. 장자의 주장은 결국 마음을 만물의 근원인 도(道)에 노닐게 하여야 하며 그리함으로써 만물을 부리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아야 화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道)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도(道)를 닦는다는 것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절간의 선방에 앉아 있는 스님들의 일이라고 치부하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재-부재의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입니다.
장자의 논리에 따르면 도(道)는 재와 부재를 조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의 도(道)는 일차적으로 당시의 주류담론이던 부국강병 논리를 반성하고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날의 도(道)의 문제는 문명론(文明論)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서 있는 처소(處所)가 어디이며, 자기가 갖고 있는 소망(所望)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성찰하고,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조감과 각성이 도(道)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예제 마지막 구절에서 장자는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고 하며 빙그레 웃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웃음의 진의(眞意)가 무엇인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제4편 인간세(人間世)에 있습니다. 그 내용만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장자의 진의는 여러분들이 짐작해보기 바랍니다.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 볼만하였다.··· 구경꾼들이 장터를 이루었지만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 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하였다.
‘그런 말 말아라. 쓸 데 없는 나무다. 그걸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 것은 재목이 못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어지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가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