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쓰오일(S-oil)은 이른바 '기업지배구조 모범기업'이다.
증권거래소가 2년 연속 에쓰오일을 지배구조 모범기업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에쓰오일의 장석환 사외이사는 지난 7월 증권거래소와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가 선정한 모범 사외이사로 꼽히기도 했다.
기업지배구조개선지원센터는 4단계에 걸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에쓰오일을 선정했다고 밝혔고, 증권거래소는 인터넷을 통해 수상내역을 1년간 홍보하고 국내외 IR(기업설명회)에 우선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그러나 이번에 에쓰오일 주가조작 및 분식회계 의혹이 제기되자, 증권거래소는 한발 뒤로 발을 빼는 분위기다. "수사결과가 나오면 우수기업 지정을 취소하고 특혜도 회수하겠다"는 해명을 내놓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자신없다'는 분위기다.
증권거래소의 이같은 발뺌은 일종의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기업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에쓰오일의 지배구조가 과연 모범적인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돼 왔었기 때문이다.
***내국인 사외이사 4명중 3명이 쌍용 출신**
에쓰오일 이사회는 사내이사 8명과 사외이사 8명 등 모두 16명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1월 개정된 증권거래법이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의 경우 이사 총수의 2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해야 한다"고 사외이사 절반 이상 선임을 의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의무규정에 따라 에쓰오일은 현재 내국인 4명, 외국인 4명 등 8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4명의 내국인 사외이사이다.
4명의 내국인 사외이사는 이봉서(전 동력자원부장관), 장석환(전 쌍용정유 사장, 연세대 객원교수), 이상온(전 쌍용화재 사장), 정선기(전 쌍용제지 사장)씨 등으로, 이 가운데 3명이 전직 쌍용 계열사 사장 출신이다.
현행 증권거래소법은 사외이사 자격과 관련,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당해 회사 또는 계열회사의 임·직원(상무에 종사하는 자) 또는 2년 이내에 임·직원이었던 자"이다.
이같은 제한 규정을 둔 이유는 "사외이사가 경영진과 이해관계가 없을 때에만 엄격한 경영감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법의 취지에 따라 볼 때, 과연 에쓰오일의 사외이사 구조가 적법한지는 의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쌍용 출신 사외이사들이 쌍용 경영진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을까"**
법적으로 에쓰오일은 2000년 3월 최대주주가 사우디 아람코로 바뀌면서 쌍용그룹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따라서 사외이사들 가운데 3명이 쌍용정유, 쌍용화재, 쌍용제지 등 쌍용그룹의 전직 계열사 사장이라 할지라도 법적으론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이 법의 취지가 이해관계가 없는 사외이사들로 하여금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그렇지 않다. 김선동 에쓰오일 대표이사 회장은 지난 74년 쌍용정유에 입사한 이래 91년부터 쌍용정유 사장을 맡아온 '골수 쌍용맨'으로, 쌍용 전직 사장 출신인 사외이사들과 밀접한 친분관계를 맺어온 사이였기 때문이다.
IR전문 컨설팅기업인 IRISIR의 김민태 대표는 이와 관련, "사외이사의 기본자격이 경영진과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에쓰오일의 사외이사 구성은 적잖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며 "과연 쌍용 출신 사외이사들이 쌍용 출신 경영진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정부가 지난해초 사외이사 규정을 강화하자 대기업 일각에서는 '측근 임원들을 조기에 퇴진시켜 2~3년 쉬게 한 다음 사외이사로 영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흘러나왔었다"며 "아직도 기업들이 사외이사 도입의 진정한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금융계에서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측면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한 대형 시중은행의 고위임원은 "쌍용그룹 부실화 때문에 지금까지도 조흥은행 등 채권은행들은 부실채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국민의 혈세인 거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쌍용 출신 사장들이 에쓰오일에서 당당히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탄식했다.
***상공회의소, 사외이사 의무조항 폐지 움직임도**
사외이사제도는 IMF사태 직후인 98년 2월 한국경제의 최대취약점인 '기업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도입됐다.
초기에는 전체이사의 4분의 1이상만 사외이사로 채우도록 했었다. 그러나 20조원대의 분식회계가 드러난 대우사태 등이 터지면서 다시금 한국기업의 투명성이 의심받자, 정부는 지난해 1월 자산 2조원이상 대기업의 사외이사 숫자가 전체 이사의 절반이상이 되도록 규정을 강화했다.
문제는 이같은 규정 강화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사외이사제도를 투명성 제고, 경영 견제, 주주가치 극대화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기업들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경우 얼마 전 "사외이사 제도는 기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투명성 제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외이사 의무조항의 폐지를 건의하기까지 했다. 거꾸로 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경제는 미국의 분식회계 쇼크로 공황적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해야 할 일은 '투명성 제고' 노력이다. 4강 신화를 이룩한 한국축구가 '순수한 축구'를 하고 있다고 격찬받았듯, 이럴 때일수록 한국기업은 '순수한 경영'을 하고 있다는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 길만이 한국 기업들이 당면한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한국 경영진들이 절감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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