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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이야말로 최고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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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움이야말로 최고의 형식”

신영복 고전강독 <93> 제8강 노자(老子)-13

2) 노자 예제(例題)-9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靜爲天下正 (45장)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아주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잘 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이상이 대강의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왕필본에는 躁勝寒 靜勝熱로 되어 있지만 교재에서는 진고응(陳鼓應)의 설을 취한 것입니다. 노자사상이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핵심적인 개념은 '대(大)'입니다. 대성(大成) 대영(大盈) 대교(大巧) 대변(大辯)에서 알 수 있듯이 대(大)는 최고 수준, 최고 형태를 의미합니다.

성(成) 영(盈) 직(直) 교(巧) 변(辯)의 최고형태는 그것의 반대물(反對物)로 전화하고 있습니다. 곧 결(缺) 충(沖) 굴(屈) 졸(拙) 눌(訥)이 그것입니다.

변증법적 구조입니다. 질적 전환에 대한 담론입니다. 노자는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를 통하여 사물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합니다.

인위적(人爲的)이고 상투적인 형식을 부정합니다. 획일주의를 반대하며(反劃一主義), 형식주의를 반대합니다(反形式主義). 이것은 인위(人爲)를 배격하고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노자의 당연한 논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대(大)의 기준, 즉 최고(最高)의 기준은 '자연(自然)'입니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형식에 대해서는 원초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자입니다.

대성약결(大成若缺)과 대영약충(大盈若沖)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는 별로 없는 듯이 차리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허수룩하게 차려입어도 개의치 않지요. 많이 아는 사람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지요.

의상(衣裳)의 경우에 대성(大成)의 경지, 즉 최고의 완성도는 잘 모르기는 하지만 최소한 정장차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자유롭고 헐렁한 코디네이션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이를테면 앙드레 킴의 패션은 헐렁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왕필은 '사물에 맞춰서 채우되 아끼거나 자랑하지 않으므로 비어 있는 듯하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장자(莊子)'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부어도 차지 않고 떠내어도 다하지 않는다(注焉而不滿 酌焉而不竭)는 것은 어떤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닳거나(弊) 다함(窮)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직약굴(大直若屈)에 대해서 왕필은 '곧음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직(大直)을 대절(大節) 즉 비타협적인 절개(節槪)와 지조(志操)로 이해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문제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구태여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대해서는 내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 서도(書道)에 있어서만큼 졸(拙)이 높이 평가되는 분야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拙)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板殿)'의 글씨는 그 서툴고 어리석은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還童)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法)까지도 미련없이 버립니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은,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言)은 항상 부족한 그릇이지요. 말로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지요. 名可名 非常名이지요.

언이 부족한 표현수단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어째서 눌변(訥辯)이 대변(大辯)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예를 들어 '맷돌'이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맷돌이란 단어에서 무엇을 연상합니까? 아니 어디에 있는 맷돌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습니까? 생활사 박물관이나 청진동 빈대떡 집에 있는 맷돌을 연상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밖에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외갓집 장독대 옆에 있었던 맷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소통은 화자와 청자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멧돌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세계의 소통이 없이는 결코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자의 연상세계와 청자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시간적으로 지체되게 됩니다. 더듬는 말처럼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지요.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 청자가 따라오지 못하게 되지요.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될 수 있으면 언어를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라이브 콘서트는 노래 중간중간에 가수가 엮어나가는 이야기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어요. 그 때 느낀 것입니다만 가수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압권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을 깔고 낮은 조명 속에서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것이었어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것을 찾느라고 가끔씩 말이 끊기는 것이었어요. 말이 끊길 때마다, 나도 그랬었지만, 청중들이 그 가수를 걱정해서 각자가 적당한 단어 한 개씩을 머리 속으로 찾아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뜸을 들이던 가수가 찾아낸 단어가 우리가 생각해낸 것보다 한 수 위였어요. 그 순간 청중은 언어감각에 있어서 가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어요. 가수에게 패배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마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더듬는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 말더듬음은 청중들을 지배해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대변(大辯)이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눌변(訥辯)이 청자의 연상세계를 확장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긴다는 것. 그리고 고요한 것이 천하의 올바름이라는 것은 역시 노자사상의 당연한 진술입니다.

천하의 올바름이란 바로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요함이란 작위(作爲)가 배제된 상태를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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