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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고의 지도자는 간섭하지 않는다”

신영복 고전강독 <92> 제8강 노자(老子)-12

2) 노자 예제(例題)-8

太上 下知有上 其次 親之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故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 (17장)

太上(태상) : 최고의 정치. 無治, 德治(王道),
悠(유) : 유유하다. 그윽하다.
猶(帛本, 簡本) 오히려. 머뭇거리다. 조심하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일이 성취되다.
自然(자연) : 스스로 그러함.

이 장 역시 노자의 정치론입니다. 특히 지도자론(指導者論)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군주(君主)에 관한 설명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 즉 태상(太上)의 정치는 백성들이 다만 위에 임금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력하유어아재(帝力何有於我哉)
임금의 권력에 내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할 정도로 백성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임금입니다.

그 다음이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는 임금입니다. 물론 임금이 백성들을 자상히 보살피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애하고 칭송하겠지만 이러한 임금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임금만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두려운 임금입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는 패권정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임금보다 못한 임금이 바로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임금입니다. 멸시의 대상이 되는 임금이지요. 이를테면 임금을 풍자하는 바보시리즈가 유행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故信不足焉 有不信焉입니다. 언(焉)으로 강조하여 매우 단정적인 선언을 합니다. 백성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불신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품성은 백성 즉 민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함으로써 신뢰받는 일입니다. 백성들을 믿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상(太常)의 정치이며, 이를테면 무치(無治)입니다. 무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임금은 백성을 신뢰하고 백성은 임금을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인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曰 我自然입니다.

명심해야 하는 것(悠兮)은 첫째 귀언(貴言)입니다. 즉 말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2장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와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불언(不言)은 말없음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간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간섭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간섭하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카메라만 잡아도 요구가 많습니다. 더구나 정치권력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자면 불가피하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정치권력은 처음부터 간섭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자가 불간섭을 요구한다는 것은 권력의 사당적(私黨的) 성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공(功)을 세우고 일을 성취하더라도 그 공로(功勞)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공로(功勞)를 차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功成而弗居 제2장)은 물론입니다.

공명(功名)을 이루었더라도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成名遂 身退 天之道 제9장)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百姓皆曰 我自然 즉 모든 성취는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믿게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간섭하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다름아닌 민주주의 사상입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노자의 이상적 정치와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이와 같습니다.

좌전(左傳)의 “太上 有立德 其次 有立功 其次 有立言”이 이 장(章)을 부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80장에서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신뢰의 문제입니다. 정치가는 진심으로 백성들을 신뢰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백성들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CF광고는 물론이며 문화와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勸力)을 생각한다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 매몰되고 지배담론에 포섭되어 있는 백성들이 과연 독자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이기까지 하지요? 나 역시 여러분만큼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믿어야 합니다. 신뢰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과 한번쯤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전강독은 1, 2학년에게는 수강신청이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1학년 2학년의 정서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겪은 시절이지요. 1,2학년은 고3터널을 겨우 빠져나온 직후의 짧은 반동기(反動期)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에 깊숙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특히 의상과 헤어스타일과 음악에서 찬란한 자기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3, 4학년이 되면 어떻습니까?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나는 해마다 신입생 몇 사람을 점찍어 놓고 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변화합니다. 여러분도 인정하지요? 그런데 변화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활이 그대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삶의 골목에서 현실에 부딪치고 그 충돌을 통해서 현실의 벽을 몸으로 터득해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실도 하나의 골목이기를 바라지요. 여러분들이 걸어가는 한 개의 골목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삶의 결론으로서 여러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돈하게 되는 작은 계기로서 여러분들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 장에서 좀 더 논의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자연(自然)은 ‘Nature’가 아닙니다. 서구적 개념의 자연은 문명 이전의 야만(野蠻)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광물이나 목재를 얻는 자원(資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으로서의 존재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外部)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는 한강을 생각해봅시다. 한강의 그러한 모양은 수많은 세월을 겪어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북한산의 모양 역시 수천만 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친 가장 안정된 형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연의 질서는 가장 안정된(stable)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는가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이즈만 하더라도 원래 에이즈 바이러스(virus)는 침팬지에게 안정적(stable)으로 서식하던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옮겨오면서 결정적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에이즈뿐만 아니라 지구 도처에서 나타나는 소위 바이러스 브레이크(virus break)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생물의 세계뿐만이 아니지요. 생태계의 질서가 엄청난 규모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간섭인 것이지요.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하여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삶은 한강이나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많은 패배와 환희로 점철된 것입니다. 장구한 역사를 겪어 온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하여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노자의 도(道)이고 노자의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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