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끝까지 비판적 리얼리스트로 남겠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끝까지 비판적 리얼리스트로 남겠다"

[윤재석의 '갑론을박'] 13년만에 영화판 복귀한 정지영 감독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여러 화제를 남겼다. 우선 지난 15년 PIFF를 이끌었던 PIFF의 아이콘 김동호 영감이 물러나고, 이용관 중앙대 교수(영화학)가 단독 집행위원장으로 영화제를 이끌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라도 하듯 영화제 영문 이름도 PIFF에서 BIFF로(Pusan에서 Busan)으로 바꿨다. 숙원이었던 '영화의 전당'이 완공돼 영화제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던 점도 화젯거리.

그러나 무엇보다 화제가 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영화 <남부군>의 감독 정지영이다. 13년 동안 야인으로 살다가 문득 세 편의 신작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나 BIFF를 뒤흔들었는가 하면, 영화제 열기가 마악 고조되던 8일엔 영도 한진중공업 농성 현장을 방문하는 결기를 보이기도 했다. BIFF 폐막일이었던 14일 오후 1시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기나긴 휴지(休止)의 전말, 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조망, 영화인으로서의 사회참여에 관한 입장 등 다양한 담론을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쾌도난마식으로 주고받았다. 정지영, 말은 어눌하지만 논지는 뚜렷했다. 개인적으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라 인터뷰는 경어와 반말을 섞어 진행했다.


윤재석=형은 그간 공식 석상에서 항상 '전 감독'이라고 불러달라고 고집했었죠. 1998년 이후 장기간 휴지(休止)기간을 가졌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정지영=작품 <까>를 만들고 난 후 바로 <김산의 아리랑> 준비에 들어갔어. 아리랑을 준비하면서 시나리오 작업에다 중국 왔다 갔다 하다 보니 8년 세월을 보냈는데, 여건상 보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니까 내 또래, 아니 나보다 밑인 곽지균(<젊은 날의 초상> 등 연출)이까지 80년대에 등장한 감독들은 거의 다 쉬고 있더라구. 그렇게 쉬다보니 어언 13년이 흐른 거지 뭐.

거대자본이 13년 쉬게 만들어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거유?


영화산업 환경, 즉 제작 환경이 바뀐 게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죠. 90년대 들어서 영화판에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해. 내 헐키(<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도 대기업 자본으로 한 건데, 그게 일단 빠져나갔다가 다시 펀드로 변신해서 들어와. 예를 들면,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이 그런 류지.

영화판을 펀드가 장악하면 일단 작품성은 신경 쓰지 않고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까만 신경 쓰는 거 아닌가?

그것도 문제지만 그에 앞서 영화 시나리오를 심사하는 주체가 문제지. 금융자본 대리인들이라는 게, 영화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 아냐. 대략 시나리오 보고 재미있다, 재미 없다 판단할 정도 수준의 사람들이 심사를 한다는 거지. 대개 또 젊어. 그런 애들이 나이 먹은 감독 불편해서 어디 만나겠어. 그러니 늙은 감독들은 도태되게 마련이지.

나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형 '원로감독'입디다! 그 얘기 들으면 기분 어때?

뭐 그냥 웃는 거지. 허허.

김수용 정도라면 원로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한창 일할 사람 보고 원로라니. 사실 영화일수록 경륜 있는 감독이 필요치 않나? 예를 들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경우 배우로서 보다는 늘그막에 감독으로서 더 맛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의 경우 그럴 마당이 없는 게 문제 아냐?

나이 먹은 감독이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봐야지. 영화에 투자하는 금융자본가들은 20대를 영화 가장 많이 볼 세대로 보고, 젊은이들을 소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영화감독도 젊어야 젊은 감각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는 거예요.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어. 영화관이 집 근처에 생겼어. 그래서 중년 부부들이 저녁 먹고 난 후 손잡고 영화관을 찾는 세태야 그런데 그 분들이 볼 영화가 별로 없단 말야. 왜 있잖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강풀이라는 사람의 만화를 각색한 저예산 영화인데, 대박 났지. 그런 영화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갈라 프레젠테이션 기자회견에 나온 감독 정지영 ⓒ연합뉴스

작품 3개 들고 恨 풀듯 영화판 복귀

푹 쉬시던 원로감독님께서 한풀이라도 하듯 <부러진 화살(Unbowed)> <아리아리 한국영화(Ari Ari the Korean Cinema)> 옴니버스 <마스터클래스의 산책(A Journey with Korean Masters)> 중 <이헌의 오디세이(Lee Hun's Odyssey)> 등 세 편의 영화를 갖고 BIFF에 오셨죠. 그 중 가장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부러진 화살> 얘기부터 해주슈.


이른바 '석궁 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이라는 르포 소설이 있어. 물론 그건 사실에 입각해 기록한 다큐물이야. 그 책을 문성근 씨가 한 번 읽어 보래. 이거 충분히 영화감이 된다고 하면서 말야. 읽어 봤지, 근데 재밌어.

뭐가, 어때서?

뉴스나 보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재밌고, 석궁 사건의 장본인인 김명호 교수라는 캐릭터도 재밌어. 그 안에 미스터리도 있어. 어, 이거 영화적 소재로 참 괜찮다, 감이 오더군. 그래 김 교수를 만났어. 면회를 간 거지 면회. 감옥에 있었잖아. 만나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런 걸 뭐 허락받고 하십니까? 있는 사실을 영화화하는 데. 그냥 영화 하세요. 영화 봐서 나한테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되면 고소하면 되는 거지, 뭐" 그래도 허락을 받겠다고 하니까 허락을 해줘.

그 다음엔?

우선 '김명호구명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지. 각종 자료가 다 있어. 그래도 역시 사람을 직접 만나서 취재하는 게 중요하잖아. 그래서 김 교수 법률대리인인 박훈 변호사를 만난 거야. 창원에 가서.

웬 창원? 김 교수는 성균관대 교수 아냐?

박변이 노동 사건을 주로 다루는 인권 변호사라 창원에 있거든. 가서 이바구를 해 보니까 얘두 또 물건이야. 히히히. 너무너무 재밌는 거야, 캐릭터가. 그래서 아, 김명호와 박훈 두 사람을 축으로 해서 영화를 끌고 가면 재밌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지. 박훈 변호사한테 공판 기록 다 복사해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어. 박 변호사, 정말 열심히 도와줬어.

BIFF의 거장 감독들 출품 무대인 9일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후 800여 관객들로부터 5분 넘게 박수를 받았을 정도로 호평을 얻었죠. 사회성 짙은 영화를 통한 거장의 화려한 복귀라는 찬사도 나오고. 그런데도 정작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해. 도대체 어디까지 실화고, 어디까지 픽션이냐고.

그럴 땐 이렇게 대답하지. "르포 소설 <부러진 화살>엔 팩트만 있고, 영화 <부러진 화살>엔 팩트 플러스 알파가 있다"고.

지금도 '공식적'으론 '석궁 테러사건'으로 불리는데 정말 웃기는 용어지. 아무튼 그 용어에서도 읽을 수 있듯, 일반에선 김 아무개가 아주 나쁜 놈으로 인식돼 있어서 영화가 혹시 우리 사법부의 훌륭함을 홍보하는 거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잖아.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주인공 김명호로 분한 안성기 ⓒ부산국제영화제

사법부 횡포 고발하려 <부러진…> 제작

아, 이거 얘기 자세히 하면 장사 안되는데. 아무튼 석궁 사건을 조금만 설명하지, 뭐. 91년부터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해온 김 교수가 95년 성대 대입 본고사 수학문제의 오류를 지적하자, 대학 측은 김 교수에게 징계를 내리고 재임용을 거부해. 10년 동안 실업자 신세가 된 김 교수는 사법부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고등법원은 2005년 그를 대상으로 한 성대 측의 재임용 심사 평가는 절차적으로 위법하다고 판결하면서도 교수 지위확인 청구는 기각해버려. 그러자 2007년 1월, 김 교수는 담당 판사를 찾아가 판결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랑이 끝에 격분한 나머지 석궁 사건을 일으키고 같은 해 10월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지난 1월 출소했어. 그 과정에서 사법부는 진실이나 정의를 철저히 외면하고 힘 있는 자 편에서는 비양심적 행태를 보이지.

결국 이 영화가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법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점 아닌가. 심지어 '제2의 <도가니>가 나왔다'라든가, 힘 있는 자에겐 무한히 부드러우면서도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지나치게 엄하고 과격한 사법부에 똥침을 놓은 거라는 분석도 있고….

김 교수에 대한 판결은 재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유죄 확정'이었어. 판사들은 회의를 해서 사법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엄중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혔고, 언론은 앵무새처럼 이를 나불거렸고, 진실을 밝혀야 하는 법정은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르듯 흘러갔고. 요새 흔히 말하는 공정성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지.

"법대로!"를 외치는 법관들이 정작 법을 철저히 외면하고 지들 맘대로 기만하는 상황.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나 정황은 무시되고, 모호한 사설로 일관하는 검사의 주장만 증거로 채택되는 법정. 거기서 오히려 피고가 논리적 진술로 판사를 몰아치는 통쾌한 광경. 그러면서도 결국 피고에겐 괘씸죄가 추가돼 4년이라는 중형을 얻어맞게 된 결과. 게다가 사법부의 영향력은 감옥에까지 침투해 피해자를 괴롭히고. 아, 더 이상 영화 얘기 안할래.

왜?

안성기, 박원상, 김지호, 문성근 등 배우로부터 김민웅(성공회대 교수) 등 카메오에 이르기까지 모두 노 개런티 출연인데, 관객이 좀 들어야 돈도 주고 그럴 거 아냐.

▲<부러진 화살>의 콤비 안성기와 박원상(박훈 변호사 역) ⓒ부산국제영화제

"국민참여재판 조속 전면 시행을"

그럼 사법부 얘기 좀 합시다. 나도 우리 사법부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요. 일전에 <MBC> 이상호 기자하고 술 한 잔 마셨는데, 걔가 지난 3월 대법원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협의로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잖우. 기억하시겠지만 2005년 7월22일 <MBC> 9시 뉴스데스크에, 97년 대선 공간에서 <삼성>과 <중앙일보>가 연루된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을 보도한 것 때문에 기소됐던 건데, 안기부 녹취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법정 출두를 계속 거부하는데도 그냥 방치하고 아예 면죄부까지 주더니, 정작 이상호와 노회찬(떡값 수수 검사 명단 폭로)은 유죄 판시를 내렸단 말이우. 판시 이유가 걸작인데, "실제로 떡값이 오간 것이 아니라 떡값을 줄 것을 논의했던 것이며, 보도시점이 이미 8년이 지난 일이라 시급하지도 않았고, 아울러 보도 내용이 공공의 관심 사안이지만 실명을 써서 대화내용을 직접 인용한 것은 방법의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국민참여재판이 빨리 전면 시행돼야 해. 지금은 참고로만 받아들이고 있잖아. 판사가 국민 배심원 의견을 참고한다고 훑어보고 무시해 버려도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어.

"국민은 우매해, 어쩌구" 하면서 무시하는 사법부 풍토 때문이겠지. 사실 법이라는 게 상식선에서 보면 되는데 말이야.

맞아. 특히 삼성 X파일 사건처럼 권력이나 재벌 등 힘 있는 세력과의 싸움이 개재된 사건들, 또는 석궁 사건처럼 판·검사가 원고나 피고인 경우, 이런 건 반드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거거든. 그러니까 국민이 판단해야 하는데, 왜 지들이 판단하겠다고 우겨.

참, 김명호 교수가 영화 봤우?

아니. 개봉하면 서울에서 보겠지.

안성기를 인터뷰한 한 신문 기사를 보니 "정 감독님은 편집하듯 영화를 찍는다"고 했던데, 이게 무슨 얘깁니까?

아,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예전 아날로그 시절엔 필름 아끼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영화를 콤팩트하게 찍었잖아. 요즘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마구 찍어도 돼. 그래 놓고 편집하면 되니까. 난 아날로그 세대 아냐. 그러니까 찍기 전에 머릿속에 미리 영화 프레임을 편집해 놓고 찍지. 그건 계산이 정확해야 가능한 거야. 촬영이 콤팩트할 수밖에. 안성기 씨가 얘기하는 게 그거야.

임권택 감독도 어디선가 같은 얘길 합디다. 사실 사진작가나 사진기자 역시 마찬가지야. 요즘엔 마구잡이로 셔터부터 눌러놓고 보는 거야. 예전엔 필름 카메라였잖아. 그때 요즘처럼 마구 누르다간 필름 갈아 끼우다 볼일 다 봐. 그러니까 계산해서 아껴서 눌렀고, 그러다 보니 신중했고, 그래서 더 좋은 사진이 많았어.

남발해서 요행을 찾는 거지. 무책임한 짓들이야.

<<이때 이창동 감독이 다가와 정지영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누는 바람에 인터뷰가 잠시 끊겼다>>



▲정지영 감독에게 <부러진 화살>의 영화화를 권했던 배우 문성근(오른쪽)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안성기, 감독 정지영, 배우 김지호, 박원상 ⓒ연합뉴스

<이헌의 오디세이>는 <중앙일보> 이헌익 얘기

이제 거장 감독들의 옴니버스인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에 삽입된 <이헌의 오디세이> 얘기 좀 합시다. 내 개인적으로 꽤 아끼는 신문사 후배, 이헌익을 주인공으로 극화한 영화죠?


이헌익(李憲益)은?

경북 안동을 고향으로 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의 중앙일보 기자. 문화부에 오래 근무했으며, 주로 영화와 종교 취재를 담당했다. 인터뷰는 그의 전매특허. 천성이 느려 터져 민완 기자하고는 한참 거리가 먼 자로 조선시대에나 살았을 법한 인물. 연말 정산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귀차니즘의 거성이었다.

하지만 노동남녀(老童男女) 불문하고 그에게 매료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었으니, 그건 그의 인성(人性)과 주성(酒性)에 기인한 터였으리라. 그러나 가인박명(佳人薄命)인가! 2006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하늘로 보낸 게 서러웠는지 그 역시 이듬해 3월 역시 귀천(歸天)했다. 향년 55세.

헌익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 하나. 때는 96년 여름 어느 날 오후 세시 쯤. 장소는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 앞. 맞은편 순화탕에 목욕 가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저쪽에서 헌익이 오고 있었다. 스티븐 시걸을 닮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에선 마늘 냄새와 소주 냄새가 스테레오로 풀풀 났다. "인간아, 언제 철들래?" 했더니 돌아온 말 "이것두 실존이우. 냅두슈."

난 실존이란 말을 그보다 멋지게 쓴 인간을 보지 못했다.

그에 앞서서 내가 이번에 가지고 온 영화 세 편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야겠군. 기록영화인 <아리아리 한국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부러진 화살>의 크랭크 인 장면이에요. 그리고 <이헌의…>는 <부러진 화살>의 시사를 본 이헌 기자가 정지영을 인터뷰한 내용이에요. 머릿속에 미리 구상을 한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아무래도 작전인 거 같은데.

아냐, 아냐. 정말, 아냐.

이헌익이 <부러진…>을 봤다면

다시 <이헌의 오디세이>로 돌아가죠.

이 영화는 <부러진…>을 찍고 나서 이헌익을 생각해서 만든 거야. 걔가 2000년부터 수년 동안 '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라는 인터뷰란을 맡고 있었잖아. 공교롭게도 그 땐 내가 한참 쉬고 있을 때 아냐. 헌익이 입버릇처럼 얘기했어. "형이 영화를 찍어야 내가 인물 오디세이에 인터뷰를 실을 텐데" 하며 말야. <부러진…>을 끝내고 나니 만약 헌익이가 살아 있어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빚' 같은 거겠지.

그래서 헌익이가 <부러진…>을 봤다면 틀림없이 나를 인터뷰했을 거라는 가정을 하고 영화를 만든 거야.

이건 뭐 장사할 것도 아니니까 내용 좀 얘기해 주슈.

걔가 좀 게으르잖아. 일단 <부러진…>건으로 내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가 안 나와. 그래 가끔 불러내서 언제 나오느냐 말도 못하고 술만 마시고 헤어지고 술만 마시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그러다가 헌익이가 정지영 인터뷰기사를 쓰고 있던 바로 그 날 정지영이 <중앙일보> 근처 카페에 와서 전화를 해. "야 내가 화가 한 사람 소개시켜 준다고 했잖아. 빨리 나와." 그러니까 헌익이 왈, "아, 오늘인가" 하더니 미술담당 기자를 데리고 나와. 근데 사람 만났으니까 또 한 잔 해야 할 거 아냐.

그럼 정지영 인터뷰 기사는 언제 마감 하나?

그래서 한 잔 하다가 가만 보니까 얘가 기사 마감을 하지 못한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야 빨리 들어가서 기사 써!" 그리고 쫓아 보내.

아주 데스크를 하지 그래.

그래 놓고 내가 떠나려고 하는데, 헌익이는 2차 가자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가는데 나가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요. 근데 사실은 동창도 아냐. '대리운전 합니다' 문자 메시지 때문에 알게 된 사인데, 아무튼 서로 동창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런 관계지. 나는 먼저 가버렸고, 둘이서 밤새 푼 거야.

기사 펑크 났네.

헌익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집이야. 와이프는 쪽지 하나 써놓고 나갔어. '밥차려 놨으니까 먹고 나가라'고. '출근할 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배 국장한테서 전화가 수십 번 왔다'고. 휴대전화를 보니까 배 국장 이름이 쫘악~. 부지런히 회사로 가지.

배 국장도 참 불쌍한 데스크지. 헌익이 같은 부원 '모시고' 있으니.

먼저 간 헌익에게 바치는 영화

근데 어제 생각이 나는 거야. 나를 만나기 전에 배 국장이 그랬거든. 꼼짝말고 기사 마감하라고. 그러니까 헌익이가 "정지영 친구 잖아, 배 국장이 대신 메워달라구" 그런 거야. 배 국장 화가 안 나? 분기탱천해 가지고 "차라리 사표를 써라, 사표를" 소릴 질렀어. 근데 편집국에 도착하니까 후배들이 "이 선배 기사 잘 봤어요"이러는 거야. 정작 책상에 있던 정지영 자료는 싹 없어졌고. 켕기는 게 있어서 배 국장 자리에 가보니 거기 있는 거야. 그래서 사표를 써 놓고 신문 한 장 갖고 회사를 나와 버려. 나와서 기사를 보는데 아무래도 내용이 이상해. 어제 동창하고 술 마시던 얘기가 그대로 나와.

뭐야, 이거?

그래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데 수위 아저씨가 비닐 봉투를 하나 주면서 "이거 가져가요. 아니 새벽 3시에 소주 들고 회사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는 거야. 헌익이가 "내가 올라갑디까?" 물으니 수위 왈,, "제가 4시에 순찰 돌며 보니까 일 열심히 하시던데요." 그러자 자기 자리에 가서 컴퓨터를 봐. 거기엔 완성본 정지영 인터뷰 기사가 들어 있는 거야. 그래서 대리운전기사 친구 불러서 다시 술 한 잔하러 가는 게 끝이야.

이헌익에 대한 헌정(獻呈) 영화네.. 헌익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걔가 한국영화판에서 촌지를 없앴다는 전설이 있잖아. 그래서 제작자, 감독, 배우 가릴 것 없이 헌익이를 좋아하게 됐다는. 그 실체적 진실은 어떻게 돼?

헌익이가 영화기자 할 때는 기자들이 기획사한테 자연스럽게 촌지를 받을 때야, <한겨레> 빼놓고. 첨엔 저도 받았지. 아, 새로 들어온 놈이 왕따 될 일 있어? 세월이 흘러 헌익이가 최고참 영화기자가 되자 어느 날 일간지 기자들 모아놓고 "야, 우리가 연예신문기자냐? 한국영화 촌지 받지 말자" 이렇게 강제 결의를 해버려. 그런데 영화기자들 한동안 죽을 맛이었지. 회사 데스크 중에 구악(舊惡) 영화기자 출신이 더러 있었거든. 자기한테 떡고물이 들어와야 하는데, 안 들어온단 말야. 영화기자를 달달 볶았지. 그러다 헌익이의 무용담을 듣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재미있는 건 그때부터 영화인들이 영화기자들한테 술을 얻어마시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야.

영화판 촌지 없애고 감독에게 술까지 사

연극판이라면 몰라도 영화판까지?


헌익이가 한국영화한텐 촌지 받지 말자고 해 놓고, UIP 등 외국 배급사들한테는 계속 받기로 하자고 한 거야. 그래 놓고 왈, "외국 영화 촌지 받은 거 쪽 팔려서 어디 쓸 데도 없으니 감독들 술이나 사주지, 뭘" 그러면서 술 사더라구. 나도 여러 번 얻어 마셨어.

<부러진…>도 사회성이 짙은 영화이긴 하지만 한국영화의 어제, 오늘, 그리고 암담한 내일을 다룬 <아리 아리 한국영화>가 어느 면에선 사회성이 더 깊은 것 같아. 그리고 포커스를 영화에 맞추긴 했지만, 결국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인 자본의 횡포 또는 지배 행태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영화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라고 보거든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할까 뭐 그런 거?

한국영화사를 꿰뚫는 다큐멘터리가 없다는 현실에서 착안해 만들게 됐어요. 아주 없지는 않지. 뉴욕대 교수인 중국계 여자 크리스티 초이가 만든 게 있긴 해. 그걸 한국영화 교재로 쓰고 있다는 거야. 그걸 봤더니 못만들었다기보다 한국영화가 이런 식로 알려져서는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 그래서 우리 시각으로 한국영화사를 만들어서 외국인들이 한국영화를 공부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컨셉으로 출발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기획하다 보니까 역사를 훑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한국영화가 무엇인가, 한국영화의 정체성은 뭔가가 화두로 떠오르는 거야. 그걸 찾아가기 위해서 현재 영화를 하지 못하고 있는 감독 정지영과, 영화를 열심히 하고 싶지만 후배들에게 서서히 밀리는 여배우 윤진서가 함께 한국영화의 과거는 어땠고,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그리고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한국영화를 찾아가는 거야. 그렇게 천착하다 보니까 한국영화가 정치검열에서 자본검열로 서서히 넘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 87년 이전까지 영화검열이 심각했잖아.

그렇네. '가위질'로 운위되는 정치검열에서, 거대자본이 시나리오를 검열하는 상황으로.

한국영화는 현재 자유롭지 않은 상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지만 절망할 건 없다. 영화인들의 열정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어려움도 극복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극복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의 앞날은 밝다. 뭐 이런 논지지.

영화 얘기만 하자고 하셨지만, 다른 얘길 안할 수 없는 게 이른바 '비판적 리얼리스트'소리를 듣고 있잖아요. 그 동안 역사성과 사회성 짙은 작품을 찍어 왔고, 실제 활동에서도 첨예한 사회적 담론에 목소리를 내는데. 그런 활동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해요?

남이 뭐라고 하는데 신경 쓰다간 아무것도 못해. 그건 얼마든지 무시할 수가 있는데, 감독은 영화로 얘길 해야지. 다른 건 사회운동가들이 해야하고.

그런데 지난 8일 '제5차 희망버스'에 동참한 문화다양성 포럼 멤버들과 영도 한진중공업에 갔잖아.

그건 사람들이 날 필요로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사실 지금쯤은 후배들이 "일은 우리가 할 테니 형은 영화에 전념하십쇼" 이러면 좋겠어. 난 영화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거든.

지난 6일 배우 김꽃비와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 여균동 감독이 BIFF 개막식에 입장하면서 한진중공업사태,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에 대한 플래카드를 치켜드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그들이 선택한 액션이기 때문에 비판할 일은 아니지. 아니 좋은 일했어. 하긴 나한테도 요청이 오긴 왔거든. 일종의 프로파갠다를 해달라는 얘긴데, 내 캐릭터와 좀 다른 거 같아서 사양했지.

다시 한진중공업 사태로 돌아가죠. 그날 현장에서 어땠어요?

이미 네 차례의 희망버스가 돌파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나도 솔직히 기대를 안했어요. 그런 점에서 내가 김진숙 지도위원과 통화를 한 건 망외의 소득이었어요. 처음엔 경찰과 대치하다가 회의를 했지. 우리가 경찰과 한판 붙는 게 목적이냐, 아니면 김진숙 위원을 위로, 격려하는 게 목적이냐 물었더니, 결론은 두 개 다로 났어.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지. 경찰과 협상을 해 보자고. 대표 3명만 현장으로 가서 김 위원과 전화통화를 하겠다고 경찰에 제안했더니 처음엔 거부하다가 윗선과 통화한 후에 오케이하더라구.

그래서 정 선배가 김 위원하고 통화를 하게 된 거구만. 통화 내용은 뭐였어요?

마침 전날 밤 국회에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여야 의원들의 요구를 수용했잖아. 그걸 알고 있더라구. 그러면 내일이라도 내려와서 나하고 같이 영화나 보자고 했지.

정부에서 바라는 바를 비판적 리얼리스트가 말해 버렸구만.

그렇게 된 셈이네. 그랬더니 당장 그렇게는 못한대. 노조와 상의도 해야 하고, 노조가 국회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지켜봐야 한대. 서운했지만 반가웠던 건 열 달 가까이 고공 투쟁을 하면서도 김 위원의 목소리가 참 밝고 씩씩했다는 거.

아들 상민(36)이가 감독입디다. 2006년 단편영화 시리즈 <다세포 소녀>로 데뷔했던데, <오아시스>(2002년), <황산벌>(2004년),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 <궁녀>(2007년), <차우>(2009년)까지 조감독 생활도 많이 했고. 할 수 없지, 뭐. DNA에 감독 인자가 있다면. 아무튼 아들이 동업종에 종사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상민이는 감독 생활이 어렵다는 걸 어릴 때부터 체험한 애야. '생활'말이야, 생활. 초등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겼어요.

형이 무슨 군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자주?

전세금 올려달랠 때마다 줄여서 가야하니까 학교도 계속 옮겨야지. 그런 걸 몸소 겪은 애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영화과 가겠다고 하더라구.

이건 엄마가 뒤집어질 사건이네. 우리집에 영화쟁이는 한 명으로 족한데.

엄만 당연히 반대했지. 나는 지가 자라면서 본 게 있는데도 그 길을 선택한 데 대해 용인해줬어. 중앙대 영화학과에 들어가더라구.

보시기에 어때? 물론, 아비 입장에서 보면 미흡한 게 많겠지만.

난 정반대로 생각해. 나보다 외려 상민이가 낫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난 타협이나 조정 능력이 부족해. 근데 걘 반대야. 난 영화하고 싶지만 시나리오 갖다 주고 "검토해 보쇼, 아니면 말고" 이건데, 걘 조정 능력이 나보다 나아.

마지막으로 뻔한 질문 하나. 앞으로의 계획은 뭐유?

<부러진…>이 (흥행에) 실패하면 관객이 나를 원하지 않는구나, 생각하고 극영화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거야. 다큐나 만들면서 소일하고.

관객한테 거의 협박을 하는구만. 아무튼 그렇게 되면 돈 하고 다시 담을 쌓는 셈인데, 디큐 해서 돈이 되나?

언젠 뭐 돈 벌었나!

정지영 filmography

-1946년 11월 19일 충북 청주 출생
-1969년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
-1990년 <남부군>으로 청룡 영화제 감독상
-1990년 <남부군>으로 예술평론가협회 영화부문 최우수예술가 선정
-1992년 <하얀전쟁>으로 동경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1992년 <하얀전쟁>으로 대종상 영화제 각색상
-1994년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로 산세바스찬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
-1994년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로 청룡 영화제 작품상, 대상
-1997년 <블랙 잭>으로 대종상 감독상
-1997년 <블랙 잭>으로 백상 예술대상 감독상
-2008년~현재 문화다양성포럼 공동대표
-2009년~현재 고려대 전문교수(미디어학부)

필자의 트위터 : http://twitter.com/blest001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