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특파원", 플로라 루이스 별세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특파원", 플로라 루이스 별세

<인물> 20세부터 60년간 특파원ㆍ칼럼니스트로 활약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영국의 옵서버 등 세계 주요언론을 무대로 60년간 국제정치에 대해 깊이 있는 칼럼을 집필해온 플로라 루이스(Flora Lewis) 여사가 향년 79세를 일기로 2일 새벽 파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유족들은 2일 루이스씨가 지난 99년부터 치료를 받아온 결장암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온 루이스는 국제 문제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예리한 분석을 통해 많은 세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루이스는 1950년대 폴란드, 헝가리의 시민봉기에서 60년대의 베트남 전쟁과 중동전쟁, 90년대초의 냉전 종식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적 사건들이 벌어진 격변의 현장 속에 직접 뛰어든 경험을 토대로 수많은 기사와 칼럼들을 썼다. 특히 여성이었던 그는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남성들의 독무대로 여겨졌던 국제 언론과 정치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9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탄생한 루이스는 1942년 AP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하며 언론계에 입문했다. 영국 등 미국의 주요 외교문제를 취재하던 그는 1945년 런던특파원으로 파견돼 뉴욕타임스 런던특파원이던 시드니 그루선(Gruson)을 만나 결혼한다. 이들 부부는 그후 20여년간 런던 프라하 바르샤바 제네바 본 파리 멕시코시티 등을 다니며 서로 다른 신문에 수많은 기사를 기고했다.

루이스는 이 기간동안 옵서버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스 프랑소와를 비롯한 많은 유럽 신문에도 기사를 썼다. 루이스는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신문사 자체를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루선과 함께 언론인 생활을 하던 루이스는 '부부를 함께 고용하지 않는다'는 뉴욕타임스 내규에 따라 남편이 뉴욕타임스 바르샤바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56년에는 워싱턴포스트 바르샤바 특파원으로 일했다. 당시 구 소련에 대항해 일어난 폴란드 공산당의 정부자유화 시도를 자세히 보도했던 루이스는 최고의 국제문제 분석기사에 주어지는 해외언론클럽(Overseas Press Club)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루이스는 이후 워싱턴포스트의 독일 본 특파원을 비롯, 동유럽, 런던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1965년 워싱턴포스트 뉴욕지국 개설과 함께 지국장으로 발령났다. 다음해 남편 그루선이 뉴욕타임스 파리판 담당자가 되자 루이스 또한 파리로 가 뉴욕에서 발행하던 뉴스데이(Newsday)에 아랍-이스라엘 전쟁 등을 다룬 '오늘의 세계(Today Abroad)'란 타이틀로 첫 칼럼연재를 시작했다.

루이스는 칼럼을 쓰기 위해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을 현장에서 취재했고 베트남 전이 한창일 때는 다섯 차례나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점차 필명을 얻은 그는 72년 뉴욕타임스에 스카우트된 뒤 곧 파리 지국장에 임명돼 역사적으로 중요한 세계 변화의 현장 취재를 담당했다.(루이스는 이때 남편과 헤어진 뒤 후일 이혼했다.)

국제 문제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제공하던 플로라 루이스의 칼럼은 조지타운 대학의 국제문제관련 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캘리포니아 콜롬비아 프린스턴 대학 등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루이스를 파리지국장으로 임명했던 A.M. 로젠탈 뉴욕타임스 편집인은 "플로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특파원"이라고 극찬했다.

남편 그루선과 함께 세 아이를 둔 루이스는 어떻게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관리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둘 다 무시한다"며 조크를 던지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루이스에 대해 "그녀는 미국에서 바쁜 하루 취재일과를 마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몇분 만에 남편에게 뛰어난 가정주부이자 훌륭한 동료로 변신했다"고 묘사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스는 조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루이스는 15세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UCLA 대학에 들어갔다. 3년만에 최우수 등급(수마 쿰 라우데)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루이스는 1942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약관 20세의 나이에 언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루이스는 1980년 잡지 에스콰이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성인이 된 후 거의 모든 삶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후 나는 내 자신이 여러 면에서 외국인이 돼있음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루이스의 칼럼을 정기적으로 게재했던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3일 루이스에 대한 추모기사를 통해 "루이스의 칼럼은 독특한 미국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루이스는 1990년 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예전에는 역사란 왕과 교황, 그리고 전쟁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과거에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극소수 인물들에 한정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역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같은 역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라고 회고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