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9.11사태 이후 첫 유럽 순방에 나서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이번 행보는 결코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그가 이번 방문을 통해 이라크와의 대테러전쟁에 대한 유럽의 협조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유럽인들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군사 외교를 달가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첫 방문국인 독일의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은 최근 '얼마전 독일을 방문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환영했던 만큼은 부시 대통령을 우호적으로 맞이하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베를린의 보수적 대중지인 BZ로부터 "고맙다, 요시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한마디로 독일인들은 푸틴보다도 부시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상당수 독일 국민들은 대규모 반대 집회를 통해 부시의 대테러전쟁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부시 대통령, 우리는 당신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전쟁도 바라지 않는다."
'평화의 축'을 주창하며 미국 정부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수만명의 독일 시민들이 지난 20일부터 연일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독일 방문(22일)을 반대하는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취임 이후 처음 독일을 방문하는 부시 대통령의 베를린 도착에 때를 맞춰 22일 저녁에는 베를린 시내 중심가에서 평화운동 단체와 반세계화 운동단체 소속원, 친 팔레스타인계 시민 등 2만여명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친이스라엘 정책 등을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주도한 평화운동 단체 '평화의 축(Achse des Friedens)'은 성명을 통해 "9.11 테러이후 미국은 자위권을 구실로 전쟁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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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50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시위대의 규모는 베를린에서만 2만여명(경찰 추정)에서 10만명(시위대 추정)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함부르크 뮌헨 뒤셀도르프 등 독일 전역 50여개 도시에서도 반미·반권 시위가 벌어졌다.
부시 행정부의 군사정책외에도 사형제도와 환경정책 등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평화시위대는 21일 베를린의 녹색당 행사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2백여명의 시위대는 녹색당이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며 행사가 진행중이던 무대를 점거했는데 체포되는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간 몸싸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의 유럽 방문은 많은 유럽 저명인사들로부터의 비판을 야기시키고 있다. 스위스 출신인 장 지글러 유엔 특별공보관은 미국의 정책을 '백악관 카우보이의 일방적 지시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하고 "부시 제국은 문명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요소"라고 비판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롤프 비시나트 개신교구장은 "이 평화시위는 미국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정책에 대한 것"이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베를린 당행사에 참석했던 연방당 의장인 클라우디아 로트는 "우리는 이라크와의 전쟁모험에 반대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밝힌다"며 "미국에도 많은 시민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민주사회당 가비 침머 의장도 미국의 대 테러정책을 비판하고 독일 정부의 자세는 '친구 앞에서 보이는 비겁함'이라고 비난했다. 침머 의장은 "부시는 현실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도전들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며 "부시의 정책은 대다수 미국 시민들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기민당 산하 청년연합(die Junge Union)은 "고맙다 미국! 베를린에 오신 부시 대통령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친부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1백명 정도의 회원들이 참석했다.
부시 대통령은 21일 방영된 독일 공영방송 ARD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베를린의 시위에 대해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나라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며 개의치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또 "나는 아직 이라크와의 전쟁과 관련해 확정된 군사력 투입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며 "모든 조건을 검증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은 동맹국들과 함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으로부터 야기되고 있는 위험에 대한 분명한 논의를 할 예정이라며 "그 위험은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며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23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대테러전쟁을 비롯해 미국·유럽 관계와 러시아 정책에 대한 연설을 할 예정이다.
독일을 비롯해 러시아와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할 예정인 부시 대통령의 연설은 무엇보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포함한 대테러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질 전망이다.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부시가 '지구상의 냉전종식을 무덤으로 가져가기 위한 마지막 삽을 뜨자'며 동맹국들의 대테러전쟁 참여를 부추기는 연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독일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지난 해 9.11 테러 이후 '무제한적인 동맹'이라고 표현했다가 독일 내의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는 상태다. 그는 이제 '조건없는 동맹'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미국과의 마찰소지를 피하기 위해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독일이 약속한 것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슈피겔은 21일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방문목적이 대테러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미국 행정부의 철강관세 부과 등 일부 정치적·경제적 이슈와 인권문제 등도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슈피겔은 슈뢰더 총리가 미국 정부의 현재 입장을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시가 당면 문제에 대한 미 정부의 시각과 방향을 분명히 제시할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부시의 유럽순방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통해 "부시 대통령의 유럽국가 순방이 방문국들과의 의견차이 없이 진행되리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과 독일은 서로간의 차이점도 인정하며 유지하는 단단한 동맹관계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외교적 수사다.
독일 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대테러전쟁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교토 기후협약이나 수입철강에 대한 미국의 관세부과 조치 등에 대해 부시를 압박함으로써 나름대로 실리를 챙기겠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물론 테러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맹국들의 협조를 얻어내려는 부시 대통령의 순방목적에 이같은 실리추구가 큰 결실을 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이번 순방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영국의 언론들도 부시의 이번 유럽순방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가디언은 22일자 기사를 통해 "부시, 유럽의 불신에 직면해 있다"면서 "그의 이번 순방으로 역사상 가장 저조한 수준에 있는 미·유럽관계가 개선될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다. 또 파이낸셜 타임스도 "이번 부시 순방의 최대 역점은 러시아와의 새로운 관계 형성"이라고 지적, 유럽과의 관계개선은 뒷전임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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