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청산과 관련해 한국의 대표신문이라며 스스로 민족지임을 자처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왜곡과 후안무치가 점입가경이다.
먼저 3월 5일로 창간 82주년을 맞은 조선일보를 살펴보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이 발표한 '친일파 708명' 명단에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정책의 하수인"으로 포함된 방응모 전 사장을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는 사업가"(5일자 14면)라며 민족지사로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조선일보가 82주년 특집으로 기획한 5일자 '계초 방응모와 민족지사들-"내 사업은 민족의 훗날을 위한 일"'은 1884년 방응모의 출생부터 1920년대 후반 광산재벌로 성장한 이후 1932년 조만식의 권유에 의해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과정, 광복후 백범 김구와의 인연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기사 옆에는 '만해와 계초의 각별한 우정'을 다룬 상자기사를 싣고 방응모가 만해 한용운에게 바친 존경과 헌사, 우정을 그렸다.
***방응모 "한일합방은 구국의 결단"**
방응모가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한 계기로 알려진 1935년 친일잡지 조광 창간과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여, 1943년 출전학도 격려대회 개최 등의 이후 행적은 조선일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일보 기사의 편향과 왜곡 실상이 이러한데도 6일자 <정도언론의 길>이라는 기획기사는 시모어 토핑 미 퓰리처상 운영위원장과의 인터뷰 제목을 "뉴스 왜곡∙편향 보도하면 독자들이 외면"이라고 뽑고 있다. 이만저만한 후안무치가 아니다.
방응모가 1935년 창간해 사장으로 취임한 친일잡지 조광에 실은 글 하나만 보자. '시정 31주년'이란 제목의 권두언에서 방응모는 "회고하건대 지금으로부터 만 31년 전 동아의 정국은 실로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또한 위급존망지추에 있었다. 이때 명치 43년(1910년) 8월 29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합병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간 조선 역대총독은 선정(善政)을 하여 금일과 같이 경제, 산업, 교육, 등 일반 문화 향상에 자(資)한 바 컸다"며 국치인 한일합방을 구국의 결단이라 칭송하고 역대 조선총독의 탄압을 선정이라고 미화했다.
조선일보가 편향된 정보로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는 친일파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5일자 창간특집 '조선일보의 정도'란 사설을 보면 "조선일보의 정도는 조선일보가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에 충실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며 "조선일보는 이런 정도의 정신으로 2020년 창간 100주년의 영예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섬뜩한 말이다. 과거 친일행적과 독재권력에의 굴종, 정치권력과의 타협 등에 대한 아무런 반성과 단절없이 지금까지 보여준 조선일보의 태도를 앞으로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정치권력의 요구에 순응했더라면 수많은 독자가 지금 우리를 외면했을 것"이라는 태도는 '친일이든 친미든, 친독재든 독자가 많으면 최고 아니냐'는 오만이다. 사실 독자가 많으니 정론이라는 말은 대중지만이 난립하는 한국신문의 특수상황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조선일보 변용식 편집국장은 지난해 6월 1일 취임사에서 기자들에게 "조선일보에 기사가 실려야만 화제가 되고 뉴스가 된다는 생각으로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조선일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인데 그러면서도 조선일보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견해, 다른 접근 방식을 결코 사악하게 보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한다.
***조선일보의 반성은 겉치레성 협박**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일보가 겉치레지만 반성을 한 적도 있긴 하다. 5공 언론대학살 관련 청문회가 한창이던 1988년 11월 25일자 '청문회를 본 우리의 다짐'이란 조선일보 사설은 "조선일보는 지난 세월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기사의 자주적 선택과 편집의 자주성을 지키지 못한 적도 있다" "정부가 배후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편의에 동승했다"고 반성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반성은 "다만 우리에 대한 질타가 조선일보의 거듭 태어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궤멸을 겨냥한 악의적이고 음모적인 것일 때는 조선일보는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되 다 함께 각성해야 할 세력들의 모함과 중상에는 결연히 대처할 것"이라고 초점을 흐린다.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이뤄진 반성이 아니라 오만이 가득찬 협박성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설이 게재되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이틀전인 23일 '청문회를 본 우리의 입장'이란 사설에 대해 조선일보 노조가 "회사측의 일방적 주장만 담았을 뿐 반성이 결여돼 있다"고 항의하자 발행인측이 노조측과 합의해 나온 사설이 25일자다. 또 25일자 초판 사설에는 "조선일보는 반성과 결의속에 그 되찾은 부끄러움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고 끝을 맺었는데 최종판에 가서는 "조선일보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바꿨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언론사상사를 가르치는 김유원 교수(서경대)는 이러한 조선일보의 태도에 대해 <저널리즘, 1988년 겨울호>(한국기자협회가 펴내는 언론전문 계간지)에 실린 '민족지 논쟁의 실상'이란 글에서 "조선일보가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피해의식은 대단한 모양"이라며 "분명한 것은 조선일보를 궤멸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선일보의 도덕성 결여일 뿐이라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김성수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
창업주 김성수가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동아일보의 반성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태도 또한 조선일보와 '오십보백보'다. 오는 4월 1일 창간 82주년을 맞는 동아일보는 지난달 28일 친일파 명단 발표 이후 '친일파 명단에 추가된 16명은 정치적 이유로 추가된 것'이라는 논지를 펴며 광복회가 선정한 692명외의 16명에 대해서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학계 자문위원회의에서도 논란이 있었다는 식으로 친일잔재 청산이란 본질을 흐리고 있다.
동아일보의 태도는 지난 2일자 '누가 친일파인가'라는 사설에 잘 드러난다. 시작부터가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을 "일부 진보성향 국회의원들이 임의로 만든 모임"으로 규정하고 친일청산작업은 "국회의원 몇몇이 모여, 그것도 엄연한 반대의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급히 단정하고 규정할 일이 아니다"고 강변한다.
동아일보는 결론으로 "'민족정기 모임'이 아무리 3∙1절을 계기로 삼았다고 해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조급히 발표를 한 데는 무슨 저의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생긴다"고 난데없는 의혹을 제기한 후 "일부 인사들의 편견이나 어떤 감정적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친일 반민족자'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것이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도리어 어려운 용기를 내어 친일잔재 청산을 들고나온 국회의원들을 나무란다.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의 친일행적과 공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달 28일 명단 발표 때도 명단포함여부에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인물 또한 김성수라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민족정기 모임은 "그러나 일제 말기 그의 친일 활동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그의 활동을 정확히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공개이유를 설명했다.
1891년 태어난 김성수는 이번 명단발표 때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친일자본가'란 평가를 받았다. 김성수가 쓴 글중 대표적인 친일기고로 평가받는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의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을 보자.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표된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영광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하였던 바이다."
김성수는 이외에도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보) 등의 논설을 통해 반도 청년들의 참전을 부추겼고 그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조선인 청년학생들을 학병으로 내몰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김성수의 일제 말기 친일행적은 해방 이후 그가 이승만과 더불어 정부 수립의 한 축을 이루었던 한국민주당을 이끌고 있음으로써 면죄부를 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단절없는 자칭 민족지 동아∙조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 강점기에 나름대로 항일논조를 보였으며 항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비하하려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 역사의 공과 과를 정확히 기록해 다시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굴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고 친일잔재에 대한 엄격한 청산작업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워 떳떳한 나라를 물려주자는 것일 뿐일진대 무슨 정치적 음모가 개입됐다는 것인지 두 신문의 음모론이 난데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비판이 집중되는 이유는 두 신문이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를 이용해 '과'는 외면한 채 '공'만 내세우며 독자들을 우롱하면서도 반성은 하지 않은 채 스스로 '정론지'이며 '민족지'라고 내세우는 데 있다.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역사에 남기자는 것인데 공과를 가려 공이 있으니 과는 감싸주자는 주장은 두 신문이 평상시 지면을 통해 보여주는 태도와도 어긋난다.
***프랑스 드골의 친나치 언론인 대숙청**
동아∙조선 등 언론의 친일잔재 청산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이와 대비되는 예로 흔히 인용되는 게 프랑스의 나치협력 언론에 대한 가혹한 응징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중 나치독일에 점령된 조국이 해방되자 대대적인 나치협력자 숙청작업을 벌였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은 1백50만-2백만명의 나치협력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99만여명을 체포했으며 15만여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재판결과 7천40여명이 사형선고를, 2천7백22명이 종신강제노동형을, 1만4백34명이 유기강제노동형을, 2만6천5명29명이 유기징역형을, 10만여명의 공직자들이 파면 조기퇴직 감봉조치 등을, 7만여명이 국적박탈 등의 응징을 당했다.
언론인들은 수적으로는 적은 1백여명에 불과했으나 제일 먼저 재판정에 서 가장 가혹한 응징을 받았다고 한다. 주섭일 내일신문 주필 겸 고문이 언론개혁시민연대가 펴낸 '언론개혁'(계간지 2001년 봄 창간호)에 기고한 '한국언론의 반면교사 서유럽언론'이란 글은 당시 드골의 나치협력 프랑스 언론인에 대한 숙청과정을 일부 묘사하고 있다.
일부만 발췌해 살펴보면 "일간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쥬 쉬아레즈는 공산주의로부터 프랑스를 지켜줄 나라는 나치독일뿐이며 히틀러가 절세의 영웅이라고 찬양했다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아 총살당했다. 히틀러의 나팔수로서 라디오 파리의 해설가로 유명했던 장 에롤 파키와 일간 '새 시대' 발행인 쟝 뤼세르도 사형선고를 받아 총살됐고, 일간정치신문 '내가 도처에 있다'의 편집국장이며 천재작가로 문명을 날린 로베르 브라지야크도 총살됐다. 특히 그는 파리고등사범을 나온 천재로 이를 아깝게 여긴 저항운동에 참여한 지식인들과 '전투'지 주필-노벨상 수상작가-알베르 카뮈 등이 연명으로 드골에게 구명탄원서를 제출했으나 결국 드골이 사형에 서명한 에피소드를 남겼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외에도 칼럼니스트 폴 샤크, 나치 선전방송 내 프랑스어 방송 책임자 폴 페르돈네 등이 총살됐고 다른 많은 언론인들이 종신강제노동형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드골은 또 9백여개의 신문 잡지 가운데 6백49개사를 폐간하거나 재산을 몰수했다.
주 주필은 "점령기간내에 자진폐간했거나, 발행했지만 경영진과 기자들이 저항운동에 비밀리에 가담했던 '르 피가로'와 '라 크르와' 공산당기관지 '뤼마니테' 등 3개지만이 언론숙청에서 살아남았다"며 "세계의 유력지 '르 몽드'는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신문을 만들겠다는 드골의 의사가 직접 반영돼 창간됐으며 반나치 운동을 지하에서 펼친 '콩바' 등이 친나치 언론이 사라진 폐허의 빈 자리를 모두 메웠다"고 설명했다.
주 주필은 "오늘날 프랑스 언론이 우파이든 좌파이든 모두 자유, 정의, 공정성과 도덕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드골의 나치협력 언론의 처리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과거 반성했다**
프랑스가 현재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며 나름대로 자주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철저한 과거와의 단절과 반성이 전제됐다. 반성하지 않는 한국의 자칭 민족지 동아·조선일보가 본받아야 할 또다른 사례가 있다.
바로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다.
아사히는 패전 직후인 1945년 11월 7일 1면에 '선언'이라는 사고를 싣고 '진실의 보도, 엄정한 비판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패전을 맞게 됨으로써 국민을 무지 속에 방치한 잘못을 만천하에 사죄한다'는 요지의 반성을 했다(김유원 '민족지 논쟁의 실상' 저널리즘).
자칭 민족지라는 동아·조선일보가 패전국 일본의 신문만큼도 과거를 반성하고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 언론, 나아가 한국에 미래가 있다고 할 것인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