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정책을 총괄하는 민간행정독립기구로 방송사업 인허가권과 방송사 인사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화려하게 출발한 통합방송위원회가 출범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김정기 방송위원장의 퇴진사태를 맞았다. 정치로부터의 방송독립이라는 염원을 안고 출범한 방송위원회가 도리어 정치적 외풍과 방송계내의 위상약화로 출범 이전보다 더 힘없는 방송위원회로 추락해 방송대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사고 있는 것이다.
방송위의 위상추락은 현 방송위가 출범한 2000년 3월 당시 선임된 방송위원 인사에서 이미 예견됐다. 방송법상 국회의장 추천몫 3명,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추천몫 3명과 대통령 임명 3명 등 등 모두 9명이 방송위원에 임명됐는데 대부분이 방송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인사였고 정치적 외풍에서 방송위를 이끌어갈 정치적 위상이 취약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정기 방송위원장은 1999년 9월 김창열 전 방송위원장 후임으로 임명돼 방송위를 이끌어오다 통합방송위 출범과 더불어 위원장직을 연임하게 됐는데 방송계에선 박권상 KBS 사장의 추천으로 박지원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천거해 위원장에 오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통령이 내정한 인사가 방송위원장에 호선되는 형식적 과정을 거쳐 방송위원장에 취임한 것이다. 다른 방송위원들 역시 방송법에 따라 민주당과 한나라당, 자민련의 추천으로 방송위원에 임명됐는데 정치권 인사라는 특성상 이들로부터 정치색을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예견된 혼란**
위원장을 포함한 상임위원 4명과 비상임위원 5명 등 9명으로 구성된 방송위원중 현재 대통령과 민주당이 추천한 인사는 사퇴한 김정기 위원장외에 강대인 부위원장, 조강환 상임위원, 민병준 한국광고주협회장, 이경숙 여성민우회 공동대표 등이며 한나라당은 강영구 전 마산MBC 사장, 임형두 전 SBS 제작본부장 2명을, 자민련은 이긍규 상임위원과 고은정 언어예술원장을 추천했다. 학계와 방송계, 시민단체, 정치권 인사 등이 모두 포진해 있는 것인데 대통령과 민주당에서 추천한 여권몫이 5명에 달해 출범 당시부터 정치권의 방송장악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방송위의 위상하락은 방송위원 추천권을 갖고 있는 정치권의 영향력외에도 국가기구로서 방송사업자 감독이나 인허가 등 준사법권과 준행정권을 행사하는 방송위의 기능수행이 취약한 방송위원들이 정치적 입지로 방송계의 종이호랑이로 취급받고 있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현재 ‘방송계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박권상 KBS 사장에게 방송위원장이 위성방송 정책이나 보도채널 허가, 방송계 인사 등을 자문하고 결정하는 메카니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방송계 인사에 박권상 사장이 개입한 단적인 증거는 박 사장이 지난 2000년 6월 사퇴한 이형모 전 KBS 부사장에게 EBS 부사장과 한국방송진흥원 이사장 자리를 제안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EBS 노조와 PD협회, 방송진흥원 노조는 낙하산, 밀실인사를 용납할 수 없다며 “KBS 박권상 사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외에도 박 사장의 낙점이나 반대에 따라 방송계 인사가 좌우된다는 지적은 KBS가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디지털위성방송 인사 등에서 종종 제기됐다.
또 김정기 위원장은 지난해 6월 전자신문에 KBS의 위성방송 보도전문채널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칼럼을 게재했다가 케이블 보도전문채널인 YTN의 강력한 반발을 샀는데 방송계는 이 과정에도 박권상 KBS 사장의 훈수가 배경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2001년 6월 11일 전자신문 1면에 실린 월요논단 <방송제국주의와 뉴스채널>이라는 칼럼에서 “KBS가 스포츠나 오락채널에 앞서 국제뉴스 채널을 운영하겠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위상에 걸맞는 자세”라며 “엄청난 초기투자가 필요한 공익적 국제뉴스 채널은 KBS와 같은 공영방송 말고 누가 운영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신규 보도채널을 공모한다고 공고까지 낸 마당에 방송위의 수장이 특정업체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니 사업자 공모가 요식행위라는 점을 자인하는 꼴이다. 방송의 독점을 막아야 할 방송위가 거대공룡 KBS에 신규 채널을 주려고 하는 것은 신문 등 언론독과점을 해소하려는 정부의 정책을 완전히 비웃는 처사”라는 YTN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KBS 박권상 사장의 입김**
김정기 위원장의 취약한 정치적 위상이 방송위의 위상하락에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 방송계 고위간부는 “만일 박권상 사장이 방송위원장이 됐다면 방송위의 권한과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커지고 강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방송위원 인사가 방송위원회 위상에 미치는 영향을 그대로 방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방송위원회의 위상하락은 필연적으로 방송위가 주관하는 정책결정과 방송사업자 인허가 등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2000년 5월 방송위의 PP사업자(프로그램공급업자) 선정과정에서 드러난 매일경제신문 등 일부 사업자의 심사위원을 상대로 한 로비시도나 심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넥스트미디어코퍼레이션의 연예정보채널이 최종승인업자로 선정되는 과정 등에 여러 의혹이 제기됐던 것이다. 또 위성방송 사업자 선정과정이나 홈쇼핑 채널 사업자 선정과정 등 방송위가 인허가권을 행사하는 각종 이권사업에도 로비의혹이나 정치권 압력 등의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이외에도 현재 지상파방송의 위성재전송 문제를 둘러싸고 방송위가 입주해있는 방송회관에서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는 지역방송협의회는 방송위원장의 즉각 퇴진과 지상파방송의 위성재전송을 규정한 방송법 78조 개정을 요구해왔는데 24일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KBS1TV와 EBS의 위성재전송만을 허용하는 것으로 방송법 78조 개정에 합의했다. KBS2TV MBC SBS 등 여타 지상파방송들은 방송위원회의 사전승인을 거쳐야 위성재전송이 가능하게 된것으로 지역민방들의 요구사항을 정치권이 받아들인 결과다. 당초 방송위는 지난해 11월 19일 KBS2TV와 MBC SBS 등 지상파의 위성재전송 권역내 허용과 2년간 유예기간후 권역외 허용방침을 발표했는데 지역방송 말살기도라는 지역민방과 경인방송 등 관계자들의 거센 반발로 정치권이 방송위 정책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이렇듯 방송위가 하는 각종 정책이나 사업허가 때마다 잡음이 불거지는 이유는 취약한 방송위의 정치적 위상외에도 민간행정기구로 출범한 방송위의 태생적 한계와 2000년 3월 출범 이전에는 심의기능만을 갖고 있던 방송위원회와 종합유선방송위원회의 물리적 통합에서 빚어지고 있는 기능마비를 들 수 있다.
민간행정기구로서의 한계는 방송위원회가 준사법권과 준행정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구이고 방송위원장은 장관급, 부위원장 등 상임위원 3명은 차관급 정무위원으로 임용됐으면서도 조직 자체는 공무원 기구가 아닌 민간행정기구라는 모호한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방송 사정 이해 못하는 방송위원**
2년전 방송위 출범 당시 법제처는 “방송위원회 규칙이 헌법 및 정부조직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령’이나 ‘총리령’ 등에 해당되지 않으며, 헌법재판소나 감사원 등의 헌법상 독립기관도 아니어서 법제처 심사대상 법령이 아니다”며 방송계 총괄행정기구인 방송위의 준입법.사법권 자체를 부인했던 것이다.
종합유선방송위원회(종유방)와의 화학적 통합 문제는 심의기능만을 갖고 있던 방송위원회에 케이블사업자 인허가를 담당했던 종유방의 행정경험이 보충되며 시너지 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됐으나 결과적으로는 방송계의 첨예한 이해관계속에서 방송위가 방송산업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리한 정책만을 추진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지상파 위성재전송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로 위성방송사업자인 스카이라이프의 컨텐츠확보라는 이해문제와 지역민방종사자들의 생존권 박탈이라는 첨예한 대립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졸속정책이었다는 지적을 사고 있는 것이다. 또 지난해 11월 CBS에 대해 위성채널사용사업자 등록취소 예비판정을 내렸던 방송위의 결정은 지난해 12월 4일 서울행정법원이 CBS가 제출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위에 그쳤다. 곳곳에서 방송위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실례가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계의 한 고위인사는 “지상파 위성재전송 결정 등으로 빚어지고 있는 현재 방송위의 위기상황은 방송위원들의 정책결정을 보좌해야 하는 사무처 직원들의 판단능력에도 회의를 갖게 한다”며 “위성재전송 문제의 경우 방송위 사무처 간부들이 그대로 가도 된다고 충고해 방송위원들의 정책결정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KBS의 한 간부급 PD는 “방송위원회는 방송산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방송산업은 지상파와 위성방송, 케이블방송이 함께 공존하며 상호간의 기능을 보완할 수 있도록 해야 발전할 수 있는데 방송위는 위성방송 실시라는 조급증에 탁상행정을 펼치다 지금의 사태를 빚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방송계는 대통령 추천 몫인 김정기 위원장 후임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통령 선거와 월드컵 등 큰 과제를 앞둔 현 시점에서 공정보도 감시 등 방송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이유도 있으나 추락한 방송위의 위상을 일으켜 세울 적임자가 인선될 수 있을지, 아니면 종이호랑이 방송위의 명맥만을 유지하는 인사에 그칠지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방송위원장이란 자리가 갖는 상징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차기 방송위원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인사는 현재 한승헌 전 감사원장, 방송위원회 광고심의위원장을 역임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조영황 변호사, 백낙청 시민방송 이사장, KBS 이사장을 지낸 이세중 변호사, 박현태 전 KBS 사장 등이 있다. 방송법상 30일 이내에 방송위원장을 선임해야 하는데 청와대측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아직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이다. 당초 물망에 올랐던 김한길 전 문화부장관은 ‘정치적 인물은 배제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와 방송계의 반발에 부딪쳐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위성방송 출범과 디지털 본방송의 시작 등 방송과 통신의 융합시대를 맞아 방송위원회가 해결하고 해쳐나갈 과제들은 산적하다. 정치로부터의 방송독립을 위해 정치적 외풍이나 방송계 내부의 역학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한국 방송산업의 중장기적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인물이 방송위원장에 선임돼야 지금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는 방송위를 다시 재건할 수 있다. 세계가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한국의 방송산업이 처한 현실은 그리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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