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중견 기자의 돌연한 면직**
지난해 12월말 한국일보 경영전략실의 중견 기자 2명이 회사로부터 면직처리당했다. 면직 이유는 무단 결근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면직당한 데는 한국일보 나름의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두 기자는 지난해 12월 회사에 알리지 않은 채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에 체류중인 장재구 서울경제 회장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두 차례 장재구 회장을 만나 한국일보 장중호 상무(장회장의 조카)의 메시지를 전했다. 메시지의 핵심은 장재구 회장이 자신을 도와 현 장재국 한국일보 회장(장재구 회장의 동생)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두 기자는 장재국 회장 퇴진과 후임 회장 문제에 대해 모종의 합의를 하고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재국 회장이 두 기자에 대해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조치한 것이다.
한국일보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 숙질간 내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언론개혁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주요 표적은 소위 ‘빅3’로 불리는 동아 조선 중앙일보 등 '족벌언론'이었다. 그러나 이들 신문과 마찬가지로 일가족이 경영하는 한국일보는 기울어진 사세 덕분인지, 아니면 친정부적인 논조 때문인지 '언론개혁'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에서도 한국일보는 다른 족벌언론에 비해 훨씬 경미한 처벌을 받았으며 언론개혁을 촉구한 시민단체들도 한국일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일보의 몇몇 기자들은 세무조사 결과에 대해 '말도 안 된다'며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흑자운영을 하고 있는 ‘빅3’와 달리 한국일보는 지난 96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현재 부채규모는 4천5백억원대에 달한다. 그나마 1999년의 5천5백90억원에서 1천억원 가까이 줄어든 액수다. 한국일보의 부채규모는 지난 91년부터 계속 증가세를 보이다 자본잠식으로 채권단에 의해 사적 화의가 결정된 지난 99년 이후 자산매각 등을 통해 감소세로 돌아섰다. 지난 98년 한해 한국일보가 이자 등으로 채권단에 지급한 금융비용은 모두 6백86억원. 지난해 한국일보의 경영실적은 3백∼5백억원 정도의 적자로 예상되고 있다. 매일 1억원 이상의 적자를 보고 있는 셈이다.
***2세 4명 모두가 '회장'**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도저히 기업으로서의 생존이 불가능한 형편이다. 1956년 창간 이후 한때 '기자사관학교'로 불리며 수많은 언론계 인재들을 배출했던 한국일보,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와 '조간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자존심 대결을 펼쳤던 한국일보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한국일보가 이렇게 몰락한 원인은 최고경영진의 경영실패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난 1993년 고 장강재 회장의 별세 이후 형제들간에 벌어진 경영권 다툼이 오늘의 한국일보 위기를 초래했다고 언론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같은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난 2000년 10월 김성우 한국일보 전 파리총국장이 전격 발표한 '퇴직성명'이다. 44년을 한국일보에서만 근무하면서 필명을 드날렸던 김 전 총국장은 성명을 통해 "이 한국일보를 누가 이렇게 파멸시켜 놓았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나름대로 내놓은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주주들은 신문을 살릴 생각은 않고 권력 싸움으로 사운을 소진시켰습니다. 경영진은 확고한 언론관도 없이 종이장사처럼 신문사를 운영해 왔습니다. 파벌 조성 등 해사행위의 비호로 한국일보의 원동력인 사풍을 파괴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척결하지 않고 편법을 씀으로써 실패를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한국일보 창업주인 고 장기영씨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중 장남인 장강재 회장은 장기영 회장 별세후 한국일보 경영을 맡아오다가 지난 93년 별세했다. 그후 남은 4형제중 차남인 장재구 회장과 4남인 현 장재국 회장이 번갈아 한국일보 회장을 맡는 등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계속돼 왔다.
현재 장재구씨는 서울경제 회장, 3남인 장재민씨는 미주 한국일보 회장을 맡고 있으며 5남인 장재근씨는 일간스포츠 회장을 맡고 있다. 단일한 경영권 아래 있었던 한국일보가 경영권 다툼에 따른 핵분열로 4형제 모두가 회장 감투를 쓰고 있는 셈이다.
한국일보 관계자들은 한국일보 경영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시점을 95년 중앙일보의 조간 전환 이후로 보고 있다. 중앙일보가 조간으로 전환한 이후 조선 동아 등과 더불어 지사설립 등 신문판촉전쟁과 윤전기 도입 등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다보니 경영수지가 악화됐고, 당시 상황대처를 잘못한 최고경영진의 판단미스가 오늘날 한국일보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일보의 위기는 경영판단의 잘못으로만 볼 수는 없는 여지가 많다. 한국일보가 주주들에게 지급한 단기대여금(가지급금) 규모가 현재 2백억원 규모에 이른다. 상속세 대납 등 회사측의 해명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부 주주들이 회사돈을 쌈짓돈 쓰듯이 해왔다는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회장 2명 소유 자동차가 15대**
한국일보의 한 관계자는 “장재국 한국일보 회장과 장재근 일간스포츠 회장 소유 자동차를 조사한 결과 벤츠 2대, 체어맨 3대 등 모두 15대가 두 회장의 소유로 돼있어 충격을 받았다”며 “한국일보를 살리려면 주주들이 앞장서서 자기 소유의 자동차와 부동산을 매각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더욱이 장재국 현 한국일보 회장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미라지 호텔 카지노에서 9백만 달러(한화 약 1백20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도박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장 회장은 지난해 12월 전국언론노조에 의해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로 고발당했으며, 한국일보사와 장 회장 등 2개 법인과 4명의 개인은 미라지 호텔 카지노 한국인 매니저였던 로라최씨로부터 지난해 12월 공갈ㆍ협박과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미국연방법원에 1억달러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당한 상태다. 한국일보 주주들의 도덕성이 근본부터 의심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고 장강재 전 한국일보 회장의 장남인 장중호 상무가 기자들을 보내 장재구 회장을 설득시켜 한국일보 회생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장재구 회장을 찾은 장 상무측이 제시한 조건은 두 가지로 알려졌다.
첫째 한국일보가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으니 주주총회를 통해 장재국 현 회장을 퇴진시키고 장중호 상무 1인 체제로 가는 데 협조해달라는 것. 그러나 이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둘째 장재구 회장에게 한국일보 경영권과 대주주 지분을 양도할 것이니 1천억원 규모의 자금을 들여와 장재국 회장을 퇴진시키고 한국일보를 회생시켜 달라는 것이다. 즉 현재 34.8%의 최대지분을 가진 장 상무가 장재구 회장이 주도하는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장재구 회장이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하라는 제안이다.
두 번째 제안은 장재구 회장이 받아들여 지난 12월 장 상무측과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렀으나 이를 알게 된 장재국 회장측의 로비로 지난 7일 열릴 예정이던 주주총회가 오는 29일로 연기됐다고 한다.
한국일보의 한 관계자는 “장 상무측과 장재구 회장의 합의내용을 안 장재국 회장이 어머니를 통해 ‘나는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형이 나를 죽이려 한다’며 도와달라고 해 장기영 전 회장의 미망인이 나서 장재국 회장의 형인 장재구 회장을 설득시켰다”며 “장재구 회장은 어머니 설득으로 지난 7일 주총 소집권을 동생에게 위임했고 이에 따라 주총이 29일로 연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7일 열릴 예정이던 주총에 상정된 안건은 ‘임원선임 및 해임에 관한 건’과 ‘정관개정’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장재국 회장의 거취와 관련해 언론계의 큰 관심을 끌었으나 이러한 이유로 연기된 것이다. 현재 한국일보 상황은 ‘시계(視界) 제로’라는 게 정통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오는 29일 주총에서 장재구 회장이 누구 편을 들어줄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9일 주총 예정, 진정한 자구노력 선행돼야**
이 관계자는 “장재구 회장은 현재 한국일보 경영권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1천억원이라는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어느 정도의 자금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형제간 내분을 봉합하기 위해 29일 주총에서 장재국 회장에게 위임장을 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장재국 회장의 퇴진문제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왜 장재구 회장의 결정이 장재국 회장 퇴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는 한국일보 주주들의 지분 분포를 살펴봐야 한다. 현재 한국일보 최대 주주는 장중호 상무로 34.8%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장재구 서울경제 회장을 비롯해 장재민 미주한국일보 회장, 장재국 한국일보 회장, 장재근 일간스포츠 회장 등 형제들이 각각 9.4%씩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외에 백상재단 5%, 장 상무의 동생 2명이 각 5%, 그밖의 3세들이 각 0.4% 등으로 모두 30명 정도가 한국일보 지분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장 상무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것은 약 49.5% 정도이며 장재구 회장이 장재국 회장 편에 설 경우 이들이 확보하고 있는 우호지분이 역시 약 49.5% 정도다. 나머지 1%는 장상무의 이복동생인 장서현씨가 갖고 있으나 어느 한쪽 편도 들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장재구 회장이 장 상무 편에 설 경우 장재국 회장의 퇴진은 기정사실화되는 것이다. 주총에서 회장해임을 위해서는 주주 과반수 출석에 의결권의 과반수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4천억원대의 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일보가 회생할 길은 없는 것일까. 한국일보측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전체 부채중 1천5백억원 정도는 고정부채로 당장 갚아야 할 돈도 아니며, 유동부채중 한국일보가 현재 19개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에 담보로 맡겨놓은 담보채권이 1천7백억원 규모에 달해 이를 매각할 경우 부채규모는 1천억원대로 떨어져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에 불리한 기사 등을 해당 부서나 담당기자의 동의없이 여러 차례 축소ㆍ삭제한 데 대한 반발로 신상석 편집국장 탄핵 서명을 받아 놓은 한국일보 기자협의회(회장 이충재)의 입장도 동일하다. 일정 정도의 자금이 들어오고 자구 노력을 펼친다면 한국일보의 회생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일단 장재구 회장이 유상증자 등을 통해 경영난을 해소하고 자산매각 등 자구안 이행에 노력한다면 한국일보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목포고등학교 출신인 신 국장은 현 정권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한국일보의 카드라는 게 언론계의 일반적 견해다.
***위기의 본질은 '돈'이 아니라 '사람'**
한편 지난 99년 6월 24일 한국일보 재정난과 관련해 ‘사적 화의’ 결정을 내린 한빛은행 등 19개 채권단은 한국일보 문제를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도 한국일보측이 진정한 자구노력을 보이지 않을 경우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채권단은 현재 한국일보의 채권상환부담능력, 유동성자금흐름 등에 대한 실사를 위해 복수의 회계법인에 오퍼를 낸 상태다. 주채권은행인 한빛은행측은 “견적서를 제출한 회계법인을 상대로 선정과정을 거친 후 곧 바로 한국일보 경영상태에 대한 실사에 들어갈 것”이라며 “한국일보 문제를 계속 끌어가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경영정상화방안을 수립해 현 체제로 경영유지가 가능한지에 대해 검토한 후 정답이 없다면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한국일보에 특혜를 주고 있는 것은 분명히 없다. 그러나 한국일보 경영문제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좋지 않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갈수록 자산매각 등의 정상가격 협상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며 “한국일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것은 채권단 입장에서도 상당히 곤란하다”고 밝혔다.
결국 한국일보 문제의 핵심은 결국 장재국 회장 등 현 한국일보 경영진에게 있다. 그러나 현 장재국 회장이 자산매각 등을 통한 자구안 이행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이 때문에 장 회장에 대한 퇴진요구가 거센 것이다.
장 회장이 자구안 이행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 기자는 “자산을 매각하고 부채규모가 줄었을 경우 장 회장은 할 역할이 없게 된다. 장회장이 현재 사옥매각 등에 대한 협상을 거의 독자적으로 하고 있는데 자구안 이행시간을 지연시키는 게 자리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으나, 장회장측은 자구안 이행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 기자는 또 “한국일보 위기의 본질은 돈이 아니라 사람, 특히 사주와 간부 등 경영진에 있다”며 “장 회장과 장 회장 측근으로 분류되는 일부 간부들이 회사가 회생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다. 자산매각 등을 통해 자본구조를 개선하고 구조조정 등으로 인사문제를 해결하면 한국일보는 충분히 살아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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