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되었지만 주변 개발이 늦은 편인데다, 그 한 블록 뒤로는 땅이나 벽에 시멘트칠을 좀 했을 뿐 촘촘히, 다닥다닥 붙은 살림가구집들이며 목재 대문, 그리고 기와지붕이 왜소하고 완고한 것이 6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시기 중간 계층들의 비탈 동네(그러니까, 노동자 전태일이 그의 소망대로 `여공들에게 잘 대해주는 중소기업 사장`이 되면 살았을 법한) 그대로고, 무엇보다 골목길이 조선왕조 말 이래로 여전하게 짧고 좁고 툭하면 끊기고 그러면서도 유구한 느낌을 주는, 수입 짭짤한 청나라 수행 역관들이나 일제(日製=日帝) 근대에 몰린 구한말풍 슈퍼 마킷 업주들이 몰려 살았을 성 싶은 충정로 종근당 건물(이건 광고가 아니다. 나는 약을 좀체 먹지 않는다. )에서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전철역 입구를 지나 푸른숲 건물 1층 <카스타운>(이것도 광고가 아니다. 나는 문학-음주사에 길이, 독특하게 남을 소설가 김원일-김원우 형제 명가의 가훈[?]에 따라, 주머니가 궁핍했던 시절 맥주 맛을 그대로 재현한 OB라거를 굳이 찾아, 내 식으로 또 병마개가 빨간, 옛날 진로소주를 약간 섞어 마신다. )까지 가는 길은 대로변인데, 차량들이 쏜살 같이 달릴수록 더욱, 버려진 듯 허허벌판인 듯 황량하다.
두드러진 간판은 횟집 하나 뿐인데 그때 `사시미`는, 혀에 달콤하기는커녕 예리한 난도질로 살벌하다. 그런 길을 왜 가는가? 아니, 이 길은 내가 글을 쓰게된 이후 가장 많이 다닌 길이다. 내 책을 한 3년 동안 열권이나 낸(이건 명백히 광고지만, 어쩔 수 없다. 설령 한다 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全 몇권`의 대하물大河物로 대박을 터뜨린다면 모를까, `3년 동안 열권`이라는 숫자는 출판사에게 손해를 안 입혔을 리가 없다. ) `출판사 푸른숲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푸른숲 직원들은 모두 내게 총총히, 따스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고맙게 반짝인다. 특히나, 시인 고형렬이 `아름답게 겸손한(`겸손하게 아름다운`이 아니다) 여자를 보면 예의를 표하고 싶다`고 수줍어했던 편집장 한예원, 여자한테는 젊은 오빠 취급 받고 싶은 남자지상정(男子之常情)의 나를 늘 `기분좋은 아저씨` 취급하지만 그, 어리광의 애교가 또한 늘, 어느새 나의 평소 바람보다 더 `기분 좋은`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김수진 주간. 앙칼진 매력의 일침으로 문인들의 치한 경향을 꺾는 대신 창작 의욕을 솟구치게 만드는( 사실 이건 우리나라 남성 문학 대부분의 정곡을 찌른 처사다. 글이 잘 안될 때 나 같은 3류 시인의 경우 치한 경향과 창작 의욕은 마구 혼동된다. ) 문학담당 지평님. 암수술 경력으로 오히려 외모의 인격이 가히 진경을 열어젖혔다 할 수 있는 디자이너 김진. 이들이 거느리는 하나 같이 예쁘고 상냥한 직원들….
이상하군. 분명 남자직원들도 있는데 왜? 얼굴이, 아니 몸 전체가 안경 속으로 쪼그라들 듯한, 나이보다 늙은, 늙수구레한 편집부 남자, 그는, 그도 여성(들) 속에서 포근해 보인다. 그리고 영업부장 남자. 그는, 체구와 말투가 너무도 씩씩한 그가 유일하게 대비가 되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는 늘 마침내의 느낌표(!)처럼 돌발적으로, 다소 폭력적으로 출현했다가 운명처럼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분위기는 이내 정상태로 돌아간다.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게 `멀쩡한 여자 김혜경`(호호. 난 그 `멀쩡하다`는 말이 참 묘하더라, 라고 그녀가 찬성표를 반 쯤 던진다. )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예원(그녀는 결혼하여 최근에 첫 아이를 낳았다. )씨는 잘 사나? …. 그럼 잘 살죠. 갓난 애를 안고 있는데 그렇게 행복한 모습이 없더라니까요…. `독신주의자` 지평님은 그렇게 말했었다. 수진씨는? 물론 잘 살고. 이제 잘 살아야지. 방황할 나이는 지났잖아, 호호…. 김혜경은 친동생 일에 그렇게 대답한다. 얘기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뭐 할 말이 있어야지…호호. <카스타운> 실내는 무척 넓고 천장이 높고 실내장식이 3류는 아니지만, 손님이 북적댈수록 더욱, 초라하다가 뭉클해지는 크리스마스 이브 혹은 망년회 분위기를 1년 내내 풍긴다. 입구에 놓인, 낡은 풍금 때문인가?
뭐, 두가지만 얘기하면 돼. 출판사 하면서 이제까지 뭐가 제일 어려웠느냐 하는 것 하고, e-book 콘텐츠 업체 맡았잖아, (`공동대표`지. 맡은 게 아니라 잡힌 거고…. 그녀가 잡아채듯 수정한다. ) ㅡ것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포부랄까 뭐 그런 거. 뭐, 일단 술부터 한 잔 마시고…. 뭐 포부랄 게 있겠어…. 그랬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많은 얘기를 술술 풀어줄 것이다. 이미 그랬듯이. 대화식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질문과 대답이, 이미 오갔을까? 힌트. 그녀와 나, 그리고 소설가 공지영,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 사장 김태경은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한 성격` 하지만 모두 서울 토박이라 친하다. (명단이 훨씬 많은데, 대선 시기 `지역감정` 시비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생략. 사실, `서울 지역 감정`이란 용어는 타관객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토박이 신세로 보자면 그 자체로 억울한 용어지만. ) 내게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거느린다. 대학 1학년 때, 고전음악에 겉멋 든 채 `청량리 오팔팔`이 무슨 나팔 파는 동넨줄 알 만큼 육체적인 정신연령(?)이 낮았던, 몹시 부끄럼을 타면서도 이운형(시업가)-김석희(소설가, 번역가)-황지우(시인)-김도연(문학평론가, 작고)-정세용(내일신문 기자) 등 `2수-3수생 학파` 친구들의 인생 경험에 잔뜩 주눅들어있던 (어둔 새벽 쓰린 가슴에 해장국에다 다시 소주를 곁들어 본 적 있나….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박노해 시귀 같은 말로, 특히 김석희는 나를 겁주곤 했다) 내게 그녀는 나이도 학번도 하나 위인, 그러므로 콤플렉스가 아니라 건강하고 단순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연상의 누나`였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어느새, 그들도 두루 관장한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강태형(시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상근 간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출신, <푸른숲> 초대 대표, 현재 도서출판 <문학동네> 대표), 강형철(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숭실대학 문창과 교수), 김학원(노동운동 출신, 현재 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 등이 주간으로 푸른숲을 거쳐갔다. 운동권 출신이자 문인인 내게 그녀는 그들의 경력이 걸친 영역 모두를 관장한다. 그때 그녀는 `너무 멀쩡해서 신기한 여자`다. 사실 운동권은 얼마나 안 멀쩡한가, 문학은 또 얼마나? 그녀와 술을 마시게 되면, 취해가는 나는 아예 반말로 기우는 오랜 버릇이 있고 그녀는 기조 만큼은 존대를 유지하지만, 그런 경향은 `연상의 누나` 김혜경을 오히려 굳혀 버린다. 반말은 어리광이 되고 존댓말은 충고가 되는 까닭이다.
어려웠던 일이라…뭐, 딱히 그랬던 적은 없고, 그래. IMF 때 그때 부도 났었잖아…. 얼마나 났었는데?…. 5억…. 그렇게 많이, 어이쿠!…그렇게 놀라는 척 했지만 나는 이미 그 후를 알고 있다. 그녀는 그 어려운 때 월급을 한번도 미루지 않았다. 출판사를 청산하기 위해 퇴직금 계산을 해보았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어지는 그녀의 말, 그녀가 당시 어려웠던 이유가 재밌고, 감동적이다. 내가 사업을 잘 모르잖아요. 돈을 잘 모르고.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열심히하면 안되는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지경이 된 거라. 몇 명 되지도 않는 식구(출판사 직원)들 생계 하나 못 챙겨주는 꼴이 된 거더라구. 그때 한 두달 심하게 앓았잖아요. 누워서, 눈물이 자꾸만 나는데, 아아 이게 우는 거구나. (호호. ) 참 한심하더라구…. 그때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었다. 어려운 데다 고급 장정에 책 값이 꽤 되어 `한 천부` 예상을 했는데, 가격 치고는 거의 `불티 나게` 팔려나갔다.
이 책은 다른 출판사 책들의 장정에 즉각 영향을 끼치는 한편, 도서출판 <푸른숲>의 `출판 인격`을 일신(一新), 고급화하는 시리즈물의 첫 권이 되었다. 사실 그녀와 나의 출판관은 다르다. 김혜경은, 한마디로 `많이 읽는` 책이 좋은 책이다, 라는 주장을 <푸른숲> 역사 11년 동안 굽혀본 적이 없다. 아주 노골적으로. 또 주장적으로. 난 대중의 상식을 믿으니까…. 나는, 다르다. 좋은 책을 우선적으로 내야 한다. 부수에 조급하지 말고 오래 살아남는 지형이 많아야 출판사는 생명력을 가진다…운운. 그녀와 나는 출판에 관한 한 그렇게 평행선을 달려 오다가, 몇 년이 안되어 내가 박살났다. 스테디셀러라는 거, 그거 일종의 잘못된 신화예요. 우선 처음에 잘 나가야 오래 버틸 가능성이 생기는 거지. 처음에 안 나가면 스테디셀러가 될 확률이 거의 없어…. 몇 년 안되어 그게 사실로 정착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녀와 나는 다를 것이 없다. 나는 필자이자 작가니까 좋은 책을 언감생심이라도 고집해야 하고 그녀는 출판사 사장이니까 `잘 나가는 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녀가 출판을 시작했을 무렵 운동권 출신이 경영하는 출판사는 첫째, 출판과 출판운동을, 출판운동과 운동출판을 혼동하고, 그 여파로 ` 좋은 일`을 빙자, `월급 주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사실, 필자도 기분 나쁘다. 소위 `좋은 내용`의 바깥(장정부터 판매 전략까지)이 허술해지고 그 바깥=형식의 허술함이 결국 내용의 허술함까지 강제하게 되는 까닭이다. 명목가치 위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실질 가치 위주의 생산자본주의를 거의 능멸하는 시대는 언젠가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책의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사실 사회주의적이고 예술적인 관계다. 서점이 출판사에 부도를 내는 것도 문제지만, 출판사가 인쇄-제본-지업사에 부도를 내는 일도 문제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신문 몇 단 통 광고는 영영 절대 반대지만, 만일 출판사 사장이 `내용은 좋으니까` 하면서 내 책을, 표지부터 허술하게 만들면, `니가 필자 해라. ` 하고 핀잔을 주고 싶은 쪽이다.
출판사 사장은, 물론 편집부의 내용 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출판을 결정하지만, 무엇보다 제작과 판매에 전문가여야 한다. 그리고 그 전문가가, 그 전문가 만이 `돈은 안되지만 의미있는 책`을 만들 여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장을 만나야만 비로소 필자는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책이 난 좋아…. 김혜경은, 김혜경도 `합의점`을 찾았는지 대번에 낙관적인, 아니 낙천적인 표정을 짓는다. 출판이 내게는 딱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물건 사라고 나서는 성격은 못 되잖아. 그런데 책은 그게 아니거든. 서점에 깔아 놓고 소비자 한테 선택권을 주는 거야. 교보문고 나가 봐. 사실 책이 얼마나 많아. 그 많은 책들 중에 독자들이 우리 출판사 책을 골라 산다는 생각을 하면 참 신기해. 정말 신기해. 책이 나올 때마다 새롭고…. 사실 나는 창작과 출판이라는 `직업`이 일상-싸이클에는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야 단 한 자리 밖에 없으니까 2수 3수로 십 몇 년을 보낸단들 탓할게 없지만 국회의원 지망생들 보면, 별로 권한은 없이 욕만 얻어먹는 그 `의원직` 때문에(사실 그게 전부 국회의원들 탓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정치[비판] 수준이 그럴 뿐이다) 한번 당 4년 씩, 몇 수를 할 경우(국회의원 되는 일이 대통령 되기 보다 번거롭고 잡스럽고 힘들다는게 근래의 정설이다) 십 수년을 그냥 홀라당 보내는 일상 싸이클은, 물론 정치 체질에 맞는 사람은 지구당 위원장 시절도 괜찮게 느껴지겠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터무니 없는 허송세월이다. 책이 한 권 출간될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싸이클의 감을 나는 사랑한다. 김혜경도 그런 듯 하다. 그 책들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게 신기하고… .
<이탈리아 기행> 이후에는 판형이나 장정이 아름다운 것에 재미가 붙더라구. 그것도 재밌어…. <시간박물관>은 정말 근사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책인데, 정가가 무려 4만8천원이었는데, 5천부가 결국 다 나가더라구. 그런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있는 거지. 괜히 한정본 찍었구나 싶더라구, 호호…. (왜 한정본을?) 글쎄 그냥 그러구 싶더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다소 들뜬, 빛이 쩡쩡한 소리를 내는 쾌속의 목소리로, 고전적인 제작 `예술가`의 차원을 돌파하고 있었다. 고전적인 `창작` 예술가가 되기를 오래 전부터 꿈꾸고 다소 유난스럽게 고집피웠던 나 보다 먼저, 아니 나를 관통하면서. 그리고 그 `쾌속`의 당혹을 내가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김혜경의 또랑또랑한 눈매며 땡글땡글한 얼굴 전체가 쩡쩡한 소리의 빛으로, 아연 빛나기 시작한다. 천직이야 정말. 인생의 가치관과 의미 뭐 그런게 직업과 맞을 때 그걸 천직이라고 하잖아?그래야 행복하잖아요? 나는 정말 행복한 거 같애…. . 그때 아름다움의 최고 형태인 행복의 모습을 나는 정말 본 것 같았다.
아, 이제 알겠다. 딱 8년 전 명색 사회주의자였던(나는 `였기`를 바라고 `이기`를 바라고 `일 것이기`를 바란다) 내가 20세기 주요 인물을 뽑으면서, 1위야 물론 `사회주의의 아버지` 레닌이었지만, `자본가` 앤드류 카네기를 `마음씨 따뜻한 철강왕`이라는 이유로 물경 24 위에, `자본주의의 관료-테크노크라트` 윌리엄 베버리지를 `겸손으로 땅을 딛고 복지국가의 전범을 세웠다`는 이유로 (더) 물경 43 위에 올렸던 것은, 김혜경의 직업-생활관에 내가 매료되었기 때문이었구나…. 어쨌거나 내 예감대로 그녀는 베버리지처럼 치밀하게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여유 자금으로는 카네기처럼 `문화복지 사업`(?)에 썼다. 백기완(통일운동가), 천승세(소설가), 문부식(부산문화원 방화사건 주역. 현재 이름에 값하는 계간지 <당대 비평>의 주간)의 시집을 자진해서 내고 성대한 출판기념회도 마련했는데, 이 세 사람이야말로 `한 성격`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김학원 주간 때는 무크지 <정치비평> 및 이진경 등 `PD(민중 민주주의 혁명론) 학파`의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서도 시리즈로 냈다. 아니, 남 말 할 것 없다. 김혜경의 출판사업 자금을 제일 많이 축낸 것은 나다. 호호. 기억은 다 하고 있네…고마워요….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녀가 아직 우울하다. TV드라마 <상도>의 홍득주처럼 그녀가 말한다.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이잖아. 유럽 같은데는 5백년 역사를 가진 출판사도 있다는데 그런 얘기 들으면 부러워요…. 하긴 출판이란 직업은 아직은 운좋은 사장 한테만 천직이다. 출판사 근무를 하다가 어언 40대에 이르면 `사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막막해진다. 평생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늙었다는 생각도 들고, 회사가 어려울 경우 `고임금` 때문에 눈치 아닌 눈치 까지 보게 된다. 그런데 그 문제 또한 `제작의 전문성`으로 풀 밖에 없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출판계의 40대들 정말 위기다. 젊은 애들 한테 감각 밀리지, 독자들 취향은 점점 평준화되지. 대중가요에서 시작된 중고생 댄스풍 수준의 단순경박화 물결이 영화계를 거쳐 출판계까지 스며든지 오래인데, 그게 가장 치명적인 분야는 바로 출판계다. 이유는 간단하다. 출판이란, 심지어 신문조차, 방송매체와 달리, `여러 번 읽는` 문화가 근본 전제다. 그런데, 그 근본 전제는 지금 얼마나 멀고 낯선가.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너무 조급한 거 같애. 좀 길게 내다봐야 하는데…김혜경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출판사 마저 그렇다는게 참 문제지. `라고 답했다.
나도 그랬어. 어느 날 보니까, 얼굴에 전투적이고 여유가 없는 표정이 완연하더라고. 뭐에 집착을 하고 이를 악물고 그래왔던 거지. 그럼 안되는데. 반성을 많이 했어요…. 김혜경은 그렇게 모처럼 심각했고 나는 `나도. 옛날에 무슨 단체 대장 할 때 말야. 나는 그냥 술만 사주고 얘기 들어주고, 무슨 행사가 있어도 단상에는 올라가기 싫고, 왜냐면 무슨 붉은 띠 두르고 구호에 맞추어 다같이 손을 치 올리고 그러는게 너무 애들 같고 우스꽝스러워서 말야, 그랬는데, 어영부영 그 노릇 몇 년이 되고 후배가 사진을 찍어 주는데 보니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표정이 험악하고 그래서 깜짝 놀랐다. `라고 답했다. 사실, 나는 그때의 사진 충격 때문에 단체 대장 노릇을 영영 끊었을 뿐 아니라, 글을 쓸 때 느낌표를 극도로 자제한다. 그리고, 활자된 글을 보고 또 낙담한다. 아직도 손목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네…그런데, 그렇구나. 가끔씩 `표 팔러` 혹은 `수금 하러` 다니는 나한테 `그 나이 까지 그런 일 하고 다니는 김정환도 싫고, 그런 거 시키는 사람도 싫다. `는 말로 운동권의 구태를 꼬집은 적이 있지만 그녀는, 그녀야말로, 출판 `운동권`이구나. 물론 `구태`와 무관한, 아주 새롭고 신기한, 제대로 된 운동권. 사실 출판사 사장들 사이에서 그녀의 `일꾼 능력`에 대한 신뢰는 매우 높다. 푸른숲 직원들은 `출판사 사장` 김혜경을 여느 출판사의 1/3 밖에 누리지 못한다. 2/3는 `바깥으로 돌`기 때문이다. 100여 개가 넘는 출판사들이 설립한 e-book 회사 북토피아 대표를 맡았던 것은 그 신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가리 복잡한` 사람들이 `컴퓨터 잡무` 혹은 `영업 잡무`에 매달리는 기현상 때문에 경영 상태가 악화된 북토피아의, `단순 노동`에 강조점이 가기 마련인 북몰(인터넷 서점) 부분을 돈많은 <리브로>에 팔아넘기고, `제작예술`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콘텐츠 부분을 와이즈북과 통합했을 때 나는 그녀의 판단과 결단, 그리고 처리능력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녀는 잔돈 계산에 치매지만, 큰 돈 계산에 천부적 자질이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대가리`가 있다. 잔 대가리, 큰 대가리, 돌 대가리, 빈 대가리, 찬 대가리. 그녀는 큰 대가리 과다. 그런데, 취하는 군. 예가 어디냐. 카스타운? 여기는 원래 왕년의 백왕인쇄소 자리다. 김혜경은 백왕인쇄소 창업자 아들-소유주의 남편이다. 80년대 초,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를 찍을 데가 없었다. 경찰서에 불려가 문초를 받기 때문. 영세 인쇄업자들은 한번은 비싼 돈 받고 찍어주고 한번은 경찰에 고발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니, 비싼 돈에, 성공할 확률 50%. 그것 보다야, 번듯한 데서 찍으면 오히려 안전하지 않을까?…그래서 부탁을 했는데,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압수되기 직전, 형사들이 쫙 깔려 있는데 김혜경이 놀라운 행동을 취한다. 인쇄직공을 불러 인쇄물 각 한 장 씩을 거두어, 나에게 주라고 한 것. 형사들은 세부사례에 대해 지시받은 바가 없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그 한 쪽씩들을 갖고 마스터 인쇄로 책을 찍었다. 그게 <민족문학> 5호다. 그때 그녀는 강태형과 알게 된다. 그리고 강태형을 통해 출판계에 진입한다. <푸른숲>은 원래 강태형이 하다가 경영 악화로 김혜경에게 넘긴 것이다. 너무 쎄게 넘긴 거 아냐?…말 많은 문학판에서 그런 소문이 돌길 래 나는 수배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나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녀의 답변이 정말 고맙고 절묘하다. 아니, 달라는 돈보다 내가 좀 더 줬는데, 당하긴 뭘 당해? 황당한 소문을 날려버렸을 뿐 아니라 흔쾌한 감동까지 주었던 것. 김혜경의 남편은 무골호인에 전원주택, 아니 농촌주택파로, 사업은 질색이다. 아들은 세상에 별 무관심이라 중학교 땐가 호주에 살라고 보냈었다(지금은 번듯한 락rock아티스트). 아마도 그리하여, 김혜경이 인쇄소 건물을 리모델링(유행하기 훨씬 전이다), 남편 동생 한테 1층을 내주었고, 그렇게 생긴 <카스타운>은 성업중이다. 건물 뒤켠에는 아주 약소하게 골목술집이 있는데, 그건 둘째 동생이 주인인가? 어쨌거나 거기도 못지 않게 성업중이다. 아름다운 족벌체제 아닌가. 와이즈북토피아의 공동대표 오재혁은 경영학과 출신이고 `인터넷 기술`에 권위자. 그는, 사람이나 사업방식이나 모두, 나를 기분좋게 하는, 상큼한 신세대다. 모처럼 운동권과 무관한 동업자를 만났네?…그녀는 `열린`과 `방대한`이라는 용어로 인터넷출판을 정리하면서 다시 `세상이 신기한` 눈초리를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쉼표로 변하면서, `멀쩡해서 신기한 여자`가 `멀쩡해서 신기한, 여자`로 바뀌고, 나는 완전히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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