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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5ㆍ끝>-비판적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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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5ㆍ끝>-비판적 논평

제국(帝國)의 사제(司祭), 새뮤얼 헌팅턴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개시되면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일약 예언적 가치를 과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오늘의 세계정세를 문명간의 충돌로 설명하고 이 충돌의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 이번 전쟁이라는 식의 분석은 매우 명쾌하게 보였던 것이다. 특히 지난 9월 11일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이슬람권의 움직임에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는 개별 국가적 사건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문명적 차원의 사안으로 보일 법 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정세 속에서 미국의 고급 시사 월간지 애틀란틱은 새뮤얼 헌팅턴에 대한 로버트 카플란의 격찬과 존경의 염에 가득 찬 장문의 글을 실었다. 헌팅턴이야말로 “미국 정치학의 기념비적 존재”라는 찬사로 끝낸 그의 글은 오늘날 미국이 지향하고 있는 바에 대한 사회과학적 정당성의 부여와 통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되새길 필요가 있다. 헌팅턴은 미국의 냉전체제가 공격적 성격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는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의 패권정책을 군사주의 노선으로 치닫게 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헌팅턴의 기본 논리는 그의 '병사와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로부터 '문명 충돌론'(The Clash of the Civilization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와 논리를 펴는 것 같으나 동일한 전제와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국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강력한 군사주의적 전문집단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유주의적 가치와 세계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논리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신봉자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인간현실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보편적 설득력과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지켜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이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기대하듯이 이성이라든가 합의, 또는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를 고려한 방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를 쓴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을 깊숙이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가장 비관적 사태를 전제로 행동하는 것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자유주의적 이상이 저지르는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자유주의는 현실의 도전 앞에서 붕괴될 수 있는 위기를 자초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게 되는 그의 논리는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이 거부하는 강압적 방식, 즉 군사주의적 토대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킨다.

이것이 그의 '국가 안보론'의 요체가 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수호하고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군사주의적 수단은 도리어 정당하고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감을 갖는 한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정점에 도달한 미국의 미래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헌팅턴에게 있어서 미국은 인류의 희망이고 약속의 성취,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미국의 안전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켜져야 하며 미국의 군사주의 시스템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체계의 현실적 근거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은 군사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중심주제로 삼을 것이 아니라, 군사시스템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와 이상을 지켜내는 일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미국 내부에서는 일단 군산복합체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군산복합체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부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호할 수 있는 핵심적 장치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는 군과 민간 정치 간의 권력투쟁이나 긴장, 또는 상호제약 보다는 상호 협력 내지는 동맹체제가 미국을 위한 선택이 된다. 군사시스템의 강화는 자유주의자들이 거부하는 파시즘의 한 양식이 아니라 미국적 가치의 불가결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외적으로 적용되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로서, 민주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위협이 될 만한 사태를 관리하는 역할을 군이 맡게 됨으로써 자유주의적 보편성은 확고하게 수호될 수 있는 것이다.

제3세계의 군부정권 등장과 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따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헌팅턴은 그의 저서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질서'(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y)>에서 이승만 체제 붕괴이후의 한국사회를 이런 요지의 말로 설명한다. “이승만 체제가 무너지고 난 이후의 한국은 과도한 요구의 표출로 심각한 불안정을 경험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안정과 질서가 파괴된 토대위에서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없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세력은 근대적 교육과 훈련을 받은 집단의 존재 여부이다. 군은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그의 분류에 따른 전근대적 전통사회가 근대적이며 민주적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요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안정에 위험신호이며 이를 근대적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있는 집단, 군의 정치적 등장은 정치발전이라는 것이다. 경제발전 단계론을 쓴 월트 로스토우와 함께 헌팅턴은 케네디 정권 이후 미국이 선택한 "반혁명전략(counter-insurrection strategy)"의 주축으로서 제3세계 군부정권 육성에 대한 중대한 조언자 내지는 기본 구상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당시 미국 정치학계의 현안은 '정치발전론'이었으며 특히 이들의 분류에 따른 전근대 사회를 어떻게 자유주의적 정치체제로 바꾸어 나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제3세계 내부에 미국이 원하는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전략인 셈이었다. 결국 헌팅턴의 논리에 따르면 군의 정치적 역할 증대라는 것은 전근대사회의 근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바람직한 일이 된다. 근대적 집단이 주체세력이 되는 이행기는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미국의 훈련과 지원은 자유주의적 세계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헌팅턴의 정치발전론은 60-70년대 당시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간 정치학자들에게 경전과 같은 역할을 했고, 따라서 이들이 군부정권에 자발적으로 협력한 것에는 그들 자신의 권력동기와 함께 군부체제에 대한 이러한 이념적 정당화의 토대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헌팅턴의 논지는 철저하게 자유주의적 제국 미국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제국 수호의 방책은 군사적 시스템의 강화로 압축된다. 또한 이 제국의 주변부에 있는 국가들 역시 이러한 논리에 따라 국가건설의 주체와 그 정치적 변혁기의 관리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전문 군사집단의 역할이 옹호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자유주의적 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운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의 정당성과 강화가 추구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무엘 헌팅턴을 미국의 언론과 학계, 정계가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이래서 분명해진다. 그는 제국의 사제인 것이다.

다시 요약한다면 사무엘 헌팅턴에게 있어서 최대의 고민은 자유주의 국가로 그 이념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미국의 세계경영에 군과 패권적 정책의 역할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해낼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제국주의 체제 유지에 있어서 군사적 폭력체제의 기반을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시키는 것에 다름이 없다. 그의 논지에 있어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미국이란 나라의 세계적 지배체제는 전혀 오류가 없는 위계질서이며, 이를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현실적 대외정책의 근간이라는 전제이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적 지배체제에 저항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것은 모두 이 질서와 안정을 깨는 행위이며 움직임이자 악이며, 이 질서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은 선이다.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 결정에 있어서 그의 이러한 논리는 전략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적 차원에서도 막강한 입지를 부여해주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헌팅턴의 논리에 대한 파키스탄 출신의 비판적 지성 고(故) 이크발 아마드(Eqbal Ahmad)의 지적은 매우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는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등과 함께 미국에서 미국의 패권정책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제3세계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중대한 인식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변화의 요구와, 안정만을 추구하려는 미국의 입장 사이의 간격, 변화를 이룩하려는 우리들의 노력과 질서에 대한 미국의 집착 간의 격차, 혁명에 대한 우리들의 움직임과 제3세계 군벌들의 관리 하에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미국의 자세 사이의 거리, 자주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력을 제3세계에 심어 놓으려는 미국의 전략 사이의 갭, 제3세계 지역에서 미국의 군대가 더 이상 주둔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꿈과, 군사기지를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는 미국의 정책 사이의 거대한 인식의 차이가 점차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우리들의 입장과 요구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하고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들과 미국 사이의 대결은 날이 갈수록 적대적이 되어 갈 것이다.”

‘위장된 파시즘’(Friendly Fascism)>을 쓴 버트람 그로스(Bertram Gross)는 미국의 군사주의적 패권체제를 가리켜 “억압적인 자본-권력의 동맹체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헌팅턴과 같은 논리와 입장이란 바로 이러한 동맹체제의 이론이자 선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미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제임스 페트라스(James Petras)는 헌팅턴 류의 논리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제국주의적 기획, 독점 대자본 계급의 프로젝트가 숨어 있는 것을 간파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로 헌팅턴이 그토록 부각되고, 미국 대외정책의 현자(wise man)처럼 취급받고 있는 까닭도 모두 미국의 지배계급의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들의 이러한 지적과 비판은 중요한 경청의 가치를 지닌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서 세계적 명망을 떨치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논리와 주장이 세계적 권위를 지닌 양 떠받들고 모시는 것 자체가 얼마나 미국의 제국적 질서에 봉사하는 일이 되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헌팅턴은 엄연히 미국이라는 제국을 수호하는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가진 인물이며, 따라서 그의 논지에 근거를 둔 입장은 결국 미국의 제국적 위계질서를 온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의 이러한 입장을 추적하면 ‘문명충돌론’의 허구가 드러난다. 기독교 문명권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제국주의 동맹이 이슬람권에 속하는 중동의 제3세계를 지난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짓밟고 해체해왔는가, 이에 대한 이슬람권 내부의 혁명적 저항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에 대한 고려와 주목은 그의 논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식민주의와 민족자주 등의 현실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받아온 제3세계 민중들의 혁명적 투쟁은 그에게 오로지 안정을 깨는 행위이기에 군사적 토벌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해지는 것이다.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제국주의적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을 그는 이렇게 지목한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파괴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파괴할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적들” 제국의 기획과 관리에 도전하는 이른바 주적(主敵)에 대한 헌팅턴의 논리가 제공하는 정책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는 이 말 한 마디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가? 오늘날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공세가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서 북한이 다음 강공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는 현실에서 사무엘 헌팅턴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부(代父)적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 자체에서 우리는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위험해져가고 있는가를 절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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