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초의 서방은 낙관주의, 나아가 승리의 무드에 젖어 있었다. 냉전이 서방의 승리로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민주선거와 자유시장이 세계 모든 곳의 삶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리버랄들은 권력정치와 거대한 국방예산은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됐다고 생각했다. 유엔의 권능과 효율성을 알리는 이야기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초국적 엘리트들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름난 학자와 기업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머지 않아 진정으로 전지구적인 단일한 세계문화가 형성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때 헌팅턴이 발표한 논문이 ‘문명의 충돌?’이었다. 1993년 포린 어페어즈에 발표된 이 논문은 부분적으로는 헌팅턴이 주도했던 한 세미나에서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형성됐다. 이 세미나에서는 세계가 세계화에 의해 단일한 사회로 통합될 것이라는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했다. 소수의, 높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그룹 외에 보편적이라 할 만한 문화의 증거는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이 과거에 비해보다 쉽게 의사소통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양측간 합의의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중동 가자지구나 북아일랜드에 대한 세계적 미디어의 취재 보도는 종종 오해를 확대시킨다. ‘부패는 때때로 유용할 수도 있다’든가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등 헌팅턴 사상의 모순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헌팅턴의 이 논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 않았다.
***문명의 충돌-단일한 세계문화란 없다**
“새 시대의 근본적 갈등의 근원은 이념이나 경제가 아니라는 게 나의 가설이다. 문화적 요인이 인간집단 사이를 가르고 갈등을 야기하는 최대 근원이 될 것이다. 국민국가는 여전히 세계문제의 가장 강력한 행위자로 남아 있겠지만 국제정치의 기본적 갈등은 다른 문명을 가진 국민 및 집단간에 벌어질 것이다...문명간 갈등은 근대세계의 갈등의 진화과정에서 최종단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즉각 거대한 반향을 초래했다. 분노에 찬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명의 충돌?’은 26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이 논문을 토론하기 위한 학술회의가 세계 이곳저곳에서 개최됐다. 브레진스키는 “샘의 이전 저작들과는 달리 이 논문은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논문을 직접 읽고 그 미묘한 뉘앙스를 음미하지도 않은 채 논문 제목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했다.
대학과 고급호텔, 교외의 부자동네만 벗어나면 세계는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갈등으로-그리하여 새로운 정치 갈등을 야기시킬-점철돼 있다는 헌팅턴의 지적은, 이러한 현실과는 담을 쌓은 채 코스모폴리탄적 삶을 영위해 온 엘리트들에게 엄청나게 위협적인 것이었다. 특히 제3세계의 엘리트들로서는 헌팅턴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스스로가 속한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취약함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헌팅턴이 말하고자 한 것은 세계의 일부가 무정부적 상태라거나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대파국이 임박했다는 류의 것이 아니었다. 또 공산주의의 붕괴로 유사 이래 권력정치의 본질이었던 영토전쟁이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서방적 가치에 의한 세계화는 헛된 꿈일 뿐**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세계를 보편적 가치에 의해 통합시키겠다는 자유주의적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냉전의 종식으로 세계가 이전보다 덜 위험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헌팅턴의 사상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그 내용에 대한 비평이기보다는 단순한 가치판단-“도덕적으로 위험하다”든가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등의-이었다.
물론 내용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비판의 핵심은 헌팅턴의 분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세계는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 이슬람 국가들은 상대방을 비방하고 싸우기도 한다. 헌팅턴은 1993년 포린 어페어즈에 두 번째로 발표한 논문을 통해 바로 그 단순성이 분석의 핵심이라고 반박했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을 할 때는 추상화를 시도한다. 그들은 개념, 이론, 모델, 패러다임 등으로 불리는 현실의 가장 단순한 형태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이같은 지적인 건축물이 없다면 혼돈만이 있을 뿐이다.”
냉전의 패러다임은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있었던 수많은 갈등과 사건들을 모두 고려에 넣은 것은 아니었다고 헌팅턴은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패러다임은 다른 어떤 패러다임보다도 당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바로 강점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에 이어 1996년에 발표한 저서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편’(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에서 헌팅턴은 또 다른, 풍부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서양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고 동양은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제 국제무대에서 더 위협적이 된 것은 종교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공산주의가 중부유럽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그리스정교가 지배하던 러시아보다는 공산주의 소련이 철학적으로 유럽에 더 가까워졌다는, 통념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또 헌팅턴은 서방과 이슬람의 수세기에 걸친 투쟁에 비하면 냉전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중세에 무슬림들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프랑스까지, 발칸을 거쳐서는 비엔나 관문까지 진출했다. 이와 유사한 이슬람의 유럽 진출이, 군사적이기보다는 (이주민 유입에 따른) 인구학적인, 현재 진행되고 있다. 헌팅턴은 “아마도 미래의 위험스러운 충돌은 서방의 교만과 이슬람의 불관용, 그리고 중국의 독선의 상호작용에서 발생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한다.
헌팅턴의 논문과 책이 발표된 이래, 나토는 동유럽의 그리스정교 국가들은 뇌둔 채 개신교, 또는 가톨릭을 믿는 세 국가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나토의 영역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중세 서유럽의 기독교영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한편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에서 이슬람에 의한 압제의 조짐이 높아감에 따라 중동지역의 기독교도들은 이 지역을 떠나고 있다.
미국의 교회들은, 리버랄이나 보수주의자를 막론하고, 중국의 인권향상을 위해 싸우는 기독교도들을 돕고 있다. 이들은 수단에서 기도교도 학살을 자행하는 무슬림에 대항한 투쟁도 벌이고 있다. 하나의 일반이론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해내는 헌팅턴의 능력이야말로 그의 저작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반면 냉전기간 동안 소련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안정돼 있다고 주장했던 이른바 소련학자들이나 60년대와 70년대 아프리카의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예견했던 아프리카 전문가들은 지금 다 어디 가 있는지 그저 궁금할 뿐이다.
9.11사태로 촉발된 현재의 위기에 대해 헌팅턴의 사상은 어떻게 적용될까? 그는 미국이 취해야 할 구체적 정책에 관해서는 될 수록 말을 아낀다. 그는 이전부터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경고해 왔다. 선의가 오히려 화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적과 동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새롭게 형성되는 부족갈등과 문명충돌의 세계에서 서양문화의 보편성을 믿는 서방측의 믿음은 3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거짓이며, 부도덕하고, 위험스럽다.”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이번 테러전쟁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테러리즘의 야만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분명히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과 서방간의 문명충돌을 유발하길 원하고 있다고 헌팅턴은 지적한다. 미국은 문명간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광범위한 대테러 공조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반드시 이를 피해야 한다. 나아가 미국은 이번 기회에 2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하나는 서방측 국가들을 보다 단단히 결속시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른 문명의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헌팅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맺는다.
“이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부와 힘, 문화를 질시하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인권과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우리의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거나 강요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 위험한 세계에서 미국인은 우리의 적과 동지를 분명히 가려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동지 중에는 죽으나 사나 우리와 운명을 함께할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우리 편에 붙는 기회주의적 동맹국이 있다. 우리와 복합적 관계를 갖는 전략적 파트너 겸 경쟁자가 있는가 하면, 라이벌이긴 하지만 협상이 가능한 반대자가 있고, 우리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우리를 죽이려고 덤벼드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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