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쯤 헌팅턴은 하버드대 교수로서, 보스턴에서 가족들과 함께 안정적 삶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조용한 삶은 1967년 존슨 행정부에 의해 공직에 임명되면서 잠시 방해를 받는다. 국무부 자문역으로서 헌팅턴은 베트남전에 관한 1백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나중에 기밀해제되어 1968년 7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에 실린 글의 밑바탕이 된다. ‘포린 어페어즈’에 실린 헌팅턴의 글은 엄청난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글은 북베트남을 패주시키겠다는 존슨 행정부의 목표는 받아들이면서도 이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정부의 방식이 왜 틀렸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헌팅턴은 베트남 정부 통제하의(베트콩 치하가 아닌) 인구가 40%에서 60%로 늘었다는 미 정부의 주장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베트콩 강세 지역인) 농촌에 대한 정부 통제력 강화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인구의 도시 유입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존슨 행정부가 ‘근거없는 낙관주의’라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면 정부 비판세력들은 ‘잘못된 도덕주의’에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헌팅턴은 ‘인구 중 다수는 누구를 지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미국과 같은 안정된 입헌 민주국가에서나 적절한 질문이지, 혼란과 폭력이 판을 치는 베트남 같은 나라에서는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농촌개발을 촉진시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을 베트콩의 품으로 내모는 것은 농촌의 가난이 아니라 “효과적인 권위체계의 부재”라는 것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강력한 권위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베트콩의 세력 확대를 막을 수 있다.”
농촌 인구의 3분의 1이 베트콩의 침투를 저지한 것은 그들이 종족적, 종교적 공동체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통제는 베트콩만큼이나 서방적 가치에 대해 적대적이다. 헌팅턴은 내게 “우리는 그때도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며 이는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종교적, 부족적 충성심이 베트콩에 대한 대항무기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관한 우리의 문제는 그 이상주의였다.”
***미 대외정책의 문제는 이상주의**
그는 이러한 류의 이상주의가 현재 미국의 대외개입을 특징짓고 있다고 말한다. “대중매체들은 우리 국민들의 자기중심주의에 호소해 세계의 다른 민족들이 미국적 가치와 정치체계를 원하고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대고 있다. 나아가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헌팅턴은 적과의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미국적 가치를 주장해야 하지만 다른 사회를 그 내부로부터 미국사회처럼 만들기 위해 미국적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소신에 따라 그는 1970년대 후반 브레진스키와 카터 대통령을 도와 인권외교 정책을 입안했다. 그 목적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서구적 전통이 없는 곳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지상군을 파병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베트남에 대한 헌팅턴의 분석은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던 그의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사회과학에서의 최대 이슈는 정치적 근대화의 문제였다. 당시 학계의 일반적인 통설은 아프리카나 기타 지역의 신생 국가들도 서구와 유사한 민주주의와 법치체제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헌팅턴은 결코 이같은 통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베트남에 관한 그의 통찰은-베트남식 권위의 작동 방식은 우리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그의 저서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질서’(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1968)에서 보다 큰 규모로 자세히 서술된다.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연구서인 이 책은 아마도 헌팅턴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 책일 것이다. 14세기 아랍의 역사가인 이븐 할둔은 그의 저서 ‘무카디마’(muqaddimah)에서 정착생활의 안락함을 그리던 사막의 유목민들이 도시화를 이루어내고, 이들 집단이 다시 강력한 왕조에 의해 정복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헌팅턴은 이를 이어받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간다. 그는 경제발전이 대격동과 혁명을 포함한 새로운 불안정의 패턴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다시 보다 복잡한 제도의 건설로 이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비록 30여년전에 씌어지기는 했지만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질서’는 세계화의 시대에 개발도상국들이 안정적이고 책임있는 정부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요한 청사진의 역할을 아직도 해내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대담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통치력의 수준이 중요하다"**
“국가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차이는 정부의 형태(form of government)가 아니라 통치력의 수준(degree of government)이다. 민주주의와 독재체제간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정치가 합의와 공동체, 정통성, 조직, 효율성, 그리고 안정을 이루느냐, 아니면 못하느냐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선거를 치르면서도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는 나이지리아, 가나와 보다 권위주의적 사회이면서 상대적 개방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요르단, 튀니지, 싱가포르 등을 비교해 보면 민주주의와 독재체제의 차이가 통치력의 차이보다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학자들에 비해 헌팅턴은 현장의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일생의 학문적 경력을 통해 헌팅턴은 현장 관측통(학자를 포함해)의 관찰 내용을 자신으로 각주로 인용하는 데 이상할 정도의 열의를 보여 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최근 사건에 대해서는 학문적 소스란 있을 수 없다. 오직 학문적 견해만 있을 뿐이다.”
‘정치질서’의 중심적 주장은 대부분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의 역사적 경험은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도전들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미국인들은 선함의 단일성을 믿는다”고 썼다. 미국인들은 사회진보라든가 경제발전, 정치안정 등등 “모든 바람직한 것들은 동시에 함께 진행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인도의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도는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의 1950년대 국민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한 국민소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이들 나라들보다 안정돼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의 일부는 사실 “좋지 않은” 것이다. 인도의 문맹률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촌의 문맹자들은 새롭게 글을 깨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에 비해 정부에 대한 요구가 훨씬 적기 때문에 인도의 높은 문맹률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문맹자들이나 반문맹자들은 그저 표를 던질 뿐이다. 글을 깨친 사람들은 조직을 하고, 기존 체제에 도전한다. 인도가 가난에도 불구하고 수십년동안 안정되고 민주적인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유권자와, 근대적 정부제도를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큼 높은 교육을 받은 충분한 수의 지배엘리트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헌팅턴은 주장한다. 이제 인도에서도 새롭게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 형성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인도의 정치도 훨씬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게 헌팅턴의 예측이다.
***교육받은 국민일수록 정치 시끄러워져**
헌팅턴에 따르면 미국적 사고의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적으로 미국은 정부권력을 제한해 온 겅험만 있지, 무(無)로부터 정부제도를 건설해 본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안보가 별다른 노력 없이 지리적 이점에 의해 확보된 것처럼 미국의 정부제도와 관행들도 17세기 영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미국의 헌법은 온통 정부 권력을 제한하는 것에 관한 조항들인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구 공산권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 권력 자체의 형성이다. 헌팅턴은 “문제는 선거를 치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선거를 통해 채워질 그 정부조직들을 만들어 내느냐 못하느냐”라고 말한다.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제도에 충성하지, 그룹에 충성하지 않는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도시화와 계몽화의 오랜 과정을 통해 형성됐다. 헌팅턴의 관측에 따르면 “국민에 대한 계몽이 빠르면 빠를수록 정부의 전복은 더욱 빈번해진다.”
프랑스 혁명과 멕시코 혁명을 불러온 것은 가난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회 및 경제발전이었다. 전세계의 엘리트들이 그토록 옹호하는 경제발전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사회에 도달하기에 앞서 불안정과 대격동을 초래할 것이다.
대부분의 국제회의에 가보면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은 부패에 대하여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정치질서’는 전문가들이 그토록 옹호하는 바로 그 근대화가 우선은 부패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산업혁명의 시작과 함께 18세기 영국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부패가 판을 쳤다. 미국에서도 19세기에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헌팅턴은 그러나 발전의 이 단계에서 부패는 유용할 수도 있다며 고상한 체 부패를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부패는 새로운 그룹들을 기존 시스템에 통합시키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을 받고 국회 의석을 내주는 매관매직은 태동하는 민주주의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 편이 의회에 대한 무장봉기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부패는 체제유지의 필수 요소**
부패는 폭력보다는 덜 극단적인 소외의 형태라는 게 헌팅턴의 주장이다. “경관에게 뇌물을 먹이는 사람이 경찰서 자체를 습격하는 사람보다는 훨씬 자신을 체제와 동일시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19세기말 미국 주 의회와 시 의회 등은 수도 전기 가스 등의 설비회사와 철도회사, 그리고 새로운 제조업회사들에 의해 부패됐다. 이 기업들은 경제발전을 촉진해 미국을 세계 열강으로 떠오르게 한 바로 그 기업들이다. 인도에서도 뇌물이 없다면 많은 경제활동이 마비될 것이다. 적절한 정도의 부패는 제대로 반응하지는 않는 관료체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며 진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근대화의 소란과 부패는 청교도적인 반작용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헌팅턴은 설명한다. 경제성장과 정치안정에 필요한 수상쩍은 거래들은 열성 개혁파들에 의해 비판받을 수 있으며 정치과정의 정통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질서’가 발간된 지 10여년 후에 발생한 이란혁명은 바로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헌팅턴은 말한다. 미국은 세계 다른 곳의 혁명적 열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미국 자신이 진정한 혁명을 경험해 본 바가 없으므로. 그 대신 미국은 독립전쟁을 겪었다. 그것도 프랑스로부터 알제리의 독립처럼 “정복자에 대항한 원주민의 독립전쟁”이 아니라 식민 모국에 대한 정착민들의 독립전쟁이었다.
진정한 혁명은 이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나쁜 것’이라고 헌팅턴은 분명히 말한다. 다행히 진정한 혁명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제3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지속적으로 과격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산층들은 갈수록 보수적이 되며 기존 질서를 위해 싸울 용의를 갖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쓴 이 책에서 헌팅턴은 21세기초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일단 일어난 혁명이 성공하려면 지속적인 경제적 궁핍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경제제재에 의한 식량부족이라든가 기타 경제적 고통들이 사담 후세인이나 피델 카스트로 같은 혁명정권의 전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헌팅턴은 생각한다. 정상적 상태라면 견딜 수 없었을 물질적 희생이야말로 혁명에의 이념적 동참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혁명적 정부는 풍요에 의해 잠식된다. 혁명정권이 가난으로 전복된 적은 결코 없다” 현재 쿠바 아바나에 호텔을 짓고 있는 스페인과 캐나다의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혁명정권의 전복 방법에 관한 한 미국 정부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후진 사회일수록 군, 진보적 역할 맡아**
‘정치질서’에서 헌팅턴은 20세기를 통해 군이 맡아 온 여러 다른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과두체제에서 군인은 과격파가 되지만 중산층 사회에서는 참여자 겸 조정자가 되고 대중사회가 다가오면서 군인은 현존 질서의 보수적 수호자가 된다.” 수십년에 걸친 터키군과 이집트군의 역할 변화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묘사한 글을 결코 없었다. 실제로 사회가 후진적일수록 군은 보다 진보적 역할을 떠맡는다. 따라서 서방은 군사정부를 민간정부로 대체하는 데 보다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민주적’ 개혁에 대한 미국인의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개혁은 혁명의 대체물이 아니라 혁명의 촉매제이다. 언제나 거대한 혁명은 침체와 억압 뒤가 아니라 개혁의 시기 이후 발생했다.” 저개발 사회에서의 개혁은 투명성과 대중들의 보다 광범위한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보여주었듯이, “불시의 기민한” 조치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혁 프로그램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면 자유언론은 이를 해부하고 이에 대한 반대파를 형성한다. 언제나 개혁에는 찬성파와 반대파가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개혁은 은밀히, 다음 단계 조치를 밝히지 않은 채 한 단계 한 단계씩, 그리고 대중매체에 의존하기보다는 사회에 존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갭을 활용해서 추진해야 한다.
1960년대는 헌팅턴에게 시련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가 존슨 행정부를 위해 일했다는 이유로 하버드대 교정에서는 반전 데모대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야유를 퍼부었다. 데모대들은 그가 일했던 국제관계연구소를 점거하거나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또 그의 집 현관에 페인트로 ‘전범, 이 집에 살다’라는 글씨를 써놓기도 했다.
하지만 헌팅턴은 공직에의 봉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카터 행정부에 참여, 인권에 바탕한 외교정책을 입안했다. 인권외교는 고상한 설교가 아니라 소련에 심각한 정치적 문제들을 안겨 주기 위한 냉혹한 외교 수단이었다. 브레진스키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안보기획조정관 직을 맡은 헌팅턴은 ‘대통령 행정명령 18’을 썼는데 미소관계에 관한 포괄적 평가서인 이 문서가 나온 이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소 강경자세로 입장을 굳혔다.
***브레진스키와 한께 대소 강경정책 주도**
소련이 앙골라와 에티오피아에 진출하고 제3세계 국가들이 유엔을 좌지우지하던 당시 미국에는 (소련과의 대결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헌팅턴은 태스크포스를 조직, 무기생산 능력과 정보수집, 경제, 외교 등에 이르는 각 분야에서 미국과 소련의 국력을 비교하는 작업을 벌였다. 소련의 우위는 일시적인 것이며 결국에는 서방측이 앞서나갈 것이라는 게 헌팅턴팀의 결론이었다. 헌팅턴은 미국의 군비 증강과 걸프지역의 유사시를 대비한 신속대응군 창설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카터 행정부의 후기 2년과 레이건 대통령의 8년 재임기간은 그의 건의들이 현실화하는 기간이었다.
1981년 헌팅턴은 미국의 60년대를 회고하는 저서, ‘미국의 정치:불협화음의 약속’(American Politics: The Promise of Disharmony)을 냈다. 역사상 대부분의 세대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 일상적 관례에 따라 살아갔다. ‘그렇다면 왜 특정 세대는 대부분의 세대와는 다른 삶을 추구했을까’라고 헌팅턴은 묻는다.
헌팅턴의 해답은 60년대는 ‘신조적 열정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에서 기원한 것으로 앵글로색슨 문화에서 수 세대에 한번씩 폭발한다는 것이다. 신대륙에서 이러한 시기가 처음 도래한 것은 1740년대 청교도들에 의한 대각성(Great Awakening)운동 때였다. 헌팅턴은 60년대의 반전평화 운동가들이 마약과 프리섹스에 탐닉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청교도적이었다고 본다. 미국의 제도들이 본래의 이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데 대한 분노가 이들이 일어서게 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본래의 이상대로 살고 작동돼야 한다는 약속-결코 어느 시대에도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은 미국 정치의 ‘중심적 고민’이라는 게 헌팅턴의 해석이다.
미국의 1950년대, 60년대와 마찬가지로 17세기초의 영국도 급속한 경제발전과 사회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 결과는 도덕성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열망에 의해 발생한 청교도혁명이었다. 1세기후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은 개척자 특유의 낙관주의와 함께 현상유지에 불만을 느낀 복음주의 신앙인들에 의해 일어난 청교도 중흥 운동이었다.
***60년대 신좌파는 청교도의 후예**
헌팅턴에 따르면 대각성운동은 “미국 국민들에게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한 정당한 노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헌팅턴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미국적 신조’(American Creed)이다. 건국 이후 수십년간 영국과의 차별성을 발견할 수 없었던 미국인들에게 이는 미국적 정체성의 기초가 됐다.
이 신조에 대한 충성은 미국 이민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지키면서도 미국에 동화할 수 있는 통로가 됐다. 다른 국가의 국민적 신조와는 달리 미국의 그것은 보편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평등주의적, 개인주의적이다. 1820-1830년대의 잭슨 시대, 19세기말.20세기초의 인민주의-진보주의의 시대가 이같은 신조적 열정의 시기에 해당된다.
헌팅턴은 이렇게 말한다. “권력에 대한 반대, 정부는 가장 위험스러운 권력형태라는 의혹은 미국 정치사상의 중심적 테마이다.” 미국의 과격파 집단들을 살펴보면 이같은 관찰은 지금도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강한 정부를 선호하는 반면 미국의 극좌, 극우 과격파들은 언제나 보다 많은 ‘대중의 통제’를 원했다.
헌팅턴에 따르면 “도덕의 교만함이 권력의 교만함을 뒤덮었다.” 구좌파는 자신들을 노동계급 및 노동조합과 동일시한 반면 신좌파는 “노동계급을 기피하고 이데올로기보다는 도덕주의를 택했다”는 것이다. 신좌파의 한 학생지도자는 “신좌파는 도덕적 가치에서 시작되며 우리는 이를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청교도주의였던 셈이다.
신조적 열정의 시대 이후에는 냉소적 무관심의 시대가 오고 그 이후에는 보수주의가 복귀한다. 신조적 열정은 정부와 사회에 대해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적 열정은 미국의 위대함의 핵심이라고 헌팅턴은 믿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관리들과 제도들에 대해 달성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은 주기적으로 자기갱신을 하며 혁명이 아닌,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이다.
다음 번 신조적 열정의 시대는 어떠한 모습일까? 헌팅턴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력은 대기업들이다. 따라서 다음번 신조적 열정이 폭발할 때는 헤게모니적인 기업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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