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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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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턴을 통해 보는 미국의 세계전략 <1>

"9.11사태는 헌팅턴이 옳았음을 입증"

9.11테러사태 이후 미국에는 애국주의와 보수주의의 물결이 넘쳐나고 있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도 테러 대응에 따른 미국내 인권 악화에만 신경을 쓸 뿐, 테러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모두가 찬성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993년 ‘문명 충돌론’을 발표해 전세계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새삼스레 미국의 지적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1백40여년의 역사를 지닌 미 잡지 ‘어틀랜틱’ 12월호에 실린 장문의 기사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다'(Looking the World in the Eye)는 ‘9.11사태는 헌팅턴 교수가 일생동안 주장하고 제기했던 생각들이 옳았음을 입증했다’는 논지와 함께 40여년에 걸친 그의 지적 편력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9.11사태에 따른 미국의 진로 변화는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헌팅턴 교수의 사상에 관한 이 글의 주요 내용을 4회에 걸쳐 소개하고, 이와 함께 헌팅턴 교수의 사상에 대한 김민웅 박사(재미 언론인)의 비판적 논평을 게재한다. 편집자

새뮤얼 필립스 헌팅턴의 첫 저서, ‘병사와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가 나온 것은 냉전이 시작된 지 10년쯤 된 1957년이었다. ‘병사와 국가’는 미국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헌팅턴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미국의 자유 사회는 보수적 현실주의로 무장된 직업군대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사 지도자는 ‘인간 본성의 비합리성, 취약함, 사악함’ 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즉 예상해야- 한다. 자유주의자(liberal; 이하 리버럴로 표기함)들은 개혁에는 능하지만 국가안보에는 약하다.

***첫 저서 ‘병사와 국가’에서 군대의 필요성을 역설**

헌팅턴은 “자유주의는 국내 문제에 한정해서는 매우 다양하고 창조적이지만 외교정책과 국방 분야에는 영 서툴다”고 썼다. 외교정책은 법의 지배 아래 사는 개인들의 관계와는 달리 대체로 무법상태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국가와 그룹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병사와 국가’는 웨스트 포인트에 대한 요란한 찬사로 끝을 맺는다. 헌팅턴에 따르면 “최상의 군사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으며...화려한 악의 도시 바빌론 한가운데 우뚝 선 스파르타‘라는 것이다.

헌팅턴의 첫 저서에 대한 최초의 서평은 그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냉혹한 것이었다. 그를 파시스트 무솔리니에 비유한 것이었다. 보스턴 비컼 힐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헌팅턴은 “생각해 보게나, 내 첫 저서에 대한 첫 서평이 나를 무솔리니에 비유했다는 사실을”이라며 눈을 깜박였다. 그 서평이 나온 것은 1957년 4월 6일 좌파 정론지 네이션에서였다. 평자 매튜 조셉슨은 이 책에 대해 군사주의, ‘야만적 궤변’이라고 조롱하면서 저자를 무솔리니에 비유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무솔리니가 보다 당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또한 하버드대학 정치학과에 있는 헌팅턴의 수많은 동료들을 격분시켜, 그는 결국 다음 해 종신교수 자격(tenure)을 부여받지 못했다. 헌팅턴은 가까운 친구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그 역시 종신교수 자격을 받지 못했다)와 함께 콜럼비아대학으로 옮겼다.

4년 뒤인 1962년, 하버드는 헌팅턴과 브레진스키를 다시 종신교수로 초빙했다. 헌팅턴 축출의 선봉에 섰던 칼 프리드리히가 헌팅턴을 만나러 콜럼비아에 왔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이 후배 교수를 얼마나 흠모하는가를 말했지만 헌팅턴은 부드럽게 4년전 그의 적대적 태도를 상기시켰다.

***미 정치학계의 트로이카, 헌팅턴ㆍ키신저ㆍ브레진스키**

당시 헌팅턴과 브레진스키가 정치학 분야의 떠오르는 스타라는 사실은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명백해졌던 터라 언제나 정치학 분야의 최고임을 자부해 왔던 하버드는 이들을 다시 모시려 했던 것이다. 결국 브레진스키는 콜럼비아에 남고 헌팅턴은 하버드로 돌아갔다. 헌텅턴은 하버드에서 또 하나의 떠오르는 스타, 헨리 키신저를 만난다.

현재 14판까지 나온 ‘병사와 국가’는 이제 학문적 고전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미국측 수석 검사였던 텔포드 테일러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에 대한 문민 지배라는 말은 이제 위선적 문구가 됐다. 정치가들은 경배하듯이 이 말을 뇌까리고 있지만 사실은 그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분야만큼 우상파괴가 필요한 분야도 없다. 이 분야에 대한 헌팅턴 교수의 지식은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이며 그의 파괴적 논리를 좇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최근 수십년간 이 책에 대한 학문적 논평은 군대의 현실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헌팅턴의 논지보다는 군대가 시민사회에 미칠 위협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졌다. 민주사회에는 독재체제가 양성해 내는 만큼의 기율 잡힌 정치 간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민주사회는 강력한 군대의 미묘한 조작에 놀아날 가능성이 크다. 미 건국 당시의 지도자들은 시민정부 내의 권력분립은 확보한 반면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해지는 군부조직이 시민정부를 잠식해 들어갈 가능성은 예견하지 못했다고 헌팅턴은 지적했다.

‘병사와 국가’는 이후 헌팅턴의 학문적 생애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정한 패턴의 효시가 됐다. 그의 저작은 처음 대단한 찬사나 학문적 상을 받기보다는 찬반이 엇갈리는 비평, 또는 아주 혹독한 비난을 받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대부분-일부는 마지 못해- 그의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최근 그가 내놓은 주제는 서방과 이슬람, 그리고 아시아의 사고 및 정부체계가 충돌하고 있다는 ‘문명의 충돌’론이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세계가 근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화와 매스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가난과 종족 분열이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서구인처럼 사고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아는, 부침(浮沈)에도 불구하고, 군사적.경제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이슬람은 인구 측면에서 폭발하고 있으며 서방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문화의식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으며 국가와 민족들은 과거처럼 이념적 유사성에 의해 뭉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유사성에 의해 결합할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절한 체제라는 서방의 믿음은, 이와는 달리 생각하는 다른 문명들, 특히 이슬람 및 중국 문명과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이념이 아니라 문명들에 의해 느슨하게 조직된 다극적 세계에서 미국은 서방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서방적 정체성 더욱 강화해야**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 공격은,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뿐만 아니라 생애에 걸친 그의 모든 저작들과 놀라울 정도의 비극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1950년대 이후 헌팅턴은 미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비관적으로 사고하는 군대와 정보기관이라고 주장해 왔다.

수십년동안 그는 미국의 안보는 단지 운에 의한-대양에 의해 고립돼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 의한- 것이었으며 언젠가는 미국 자신의 노력으로 안보를 확보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우려해 왔다. 그는 자유주의란 안보가 당연시될 때만 융성할 수 있으며 미래에는 이같은 호사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또한 서방측이 언젠가는 그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가치들, 나아가 물리적 생존 자체를 지키기 위해, 미국을 경멸하며 우리를 문명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다른 문명의 극단주의 세력들과 싸워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지도자들이나 학자들이 그 투쟁에 뭔가 다른 이름을 붙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투쟁의 도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기업이나 군대, 혹은 정보기관 등에서 같은 생각을 지닌 동료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 온 반면 헌팅턴은 의도적으로 아이비리그 학문세계의 자유주의 요새 속에 남아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며 이 핵심전선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전개해 왔다.

냉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을 둘러싼 지성계 논쟁의 역사는, 매우 상당한 정도로, 헌팅턴의 저서 17권과 수십편의 논문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고 할 수 있다. 키신저와 브레진스키도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이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직에의 공헌으로 기억된다. 키신저는 닉슨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및 국무장관,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역임했으며 브레진스키는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했다.

반면 헌팅턴은 존슨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때 잠깐 공직에 몸담은 일이 있으나 그와 가까운 이 두 친구들에 비하면 훨씬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의 사상은 우연적인 직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미나와 강연 등을 통해 형성된다. 아마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의 책과 논문들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교수들과는 달리 그는 대학원생보다는 학부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원생들은 (학부생들에 비해) 교수들에게 도전하기를 훨씬 꺼린다. 그들은 또 학문적 정통성과 전문용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

헌팅턴에게서 배운 학부생 중 하나는 “다른 교수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학생들 머리 속에 주입시키려 한다. 반면 헌팅턴 교수는 결코 강의실 내에서의 토론을 휘어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들의 토론을) 매우 열심히 듣는다”고 말했다.

헌팅턴은 정치학계의 유행인 ‘합리적 선택 이론’을 경멸한다. 인간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이 이론은 정치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요소인 공포, 질투, 증오, 자기 희생 등 인간의 감정적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자가 학문적 기능인으로 전락한 이 시대에 헌팅턴은 인간 조건에 관해 역사적,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구시대적 스승으로 남아 있다.

탈냉전의 송가로 유명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1992)의 저자 프란시스 후쿠야마, ‘포린 어페어즈’의 전 편집인이자 지금은 ‘뉴스위크 인터내셔널’의 편집인으로 있는 파리드 자카리아 등이 그의 제자이다.

헌팅턴은 대중연설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 구부리고 앉아 열심히 책이나 논문을 읽는 게 평상시 그의 모습이다. 그의 지위와 명성은 매우 어렵사리 이루어진 것이다. 대중적으로는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힘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책들을 씀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헌팅턴은 고전적 의미의 권력내부 인사(insider)이지만-그는 미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외교 전문지 ‘포리 폴리시’의 창간 발기인중 하나이다-책을 쓸 때는 아웃사이더의 자세를 견지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책에 대해 평가를 내릴 바로 그 전문가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결코 개의치 않는 자세로 책을 쓴다.

***냉전의 전사, 라인홀드 니버의 제자**

1959년 헌팅턴은 이렇게 썼다. “학자가 더 이상 새로운 생각이 없다면 마땅히 침묵을 지켜야 한다. 진리에의 추구는 지성적 논쟁과 동의어이다”

여러 모로 보아 헌팅턴은 요즘 보기 드문 구시대형 인간을 대표한다. 그의 자유주의적 이상은 역사와 대외정책에 대한 심오한 보수주의적 이해와 결합돼 있다. 헌팅턴은 일생동안 민주당원으로 일관했다. 그는 1950년대 아들라이 스티븐슨(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1952, 1956년 공화당 아이젠하워 후보와 대결, 모두 패배함)의 스피치 라이터로 일했고(헌팅턴이 부인 낸시를 만난 것은 1956년 대선 운동 때였다), 1960년대에는 후버트 험프리 후보의 대외정책 보좌관이었으며, 1970년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관한 연설을 작성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동시에 그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하버드대학 내 대외정책 싱크탱크인 ‘존 올린 전략연구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보수파의 대표적 싱크탱크 중 하나인 이 연구소는 존 올린 재단, 스미스 리차드슨 재단, 브래들리 재단 등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은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구시대적 민주당원입니다”라고 말하자 헌팅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활기있는 모습을 보이며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나야. 아서 슐레진저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니버의 자식이지”라고 대꾸했다.

20세기 미국 개신교의 대표적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기 때문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믿은 사람이었다. 성공회 신자인 헌팅턴은 니버의 “도덕성과 실용적 현실주의의 탁월한 결합”에 끌렸다고 말한다.

니버는 맹렬한 ‘냉전의 전사’(Cold Warrior)였지만, 결코 도덕적 승리주의에는 빠지지 않았다. 역사란 진보가 아니라 아이러니에 의해 보다 근본적으로 특징지워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니버는 1952년,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다 해도 그 결과는 미국의 과잉 확장을 초래해 결국 자신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데 국력을 소진토록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니버의 비극적 직관은 헌팅턴의 모든 주요 저작을 관통하는 저류가 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헌팅턴의 보수주의에 대한 정의(定義)의 핵심이다.

헌팅턴은 ‘미 정치학 리뷰’ 1957년 6월호에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개인주의, 자유시장, 자유, 그리고 법치의 이데올로기이다. 반면 ‘고적적 보수주의’에는 특정한 비전이 없다. 보수주의란 자유주의적 제도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고상하고도 필수적인’ 이론적 근거 또는 명분(rationale)이다. 헌팅턴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정신에 대한 존재의, 혼란에 대한 질서의 합리적 방어”이다.

영국에서 에드먼드 버크가 한 일은 ‘상업 사회와 온건한 자유주의적 헌법’에 대한 보수주의적 방어였다고 헌팅턴은 설명한다. 진정한 보수주의란 현재 있는 것을 보전하는 것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외국 원정을 감행하거나 과격한 국내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존 아담스나 알렉산더 해밀튼과 같은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이 자유주의적 헌법을 지키기 위해 보수주의적 원칙들을 자세히 설파했다. 헌팅턴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정치적 천재성이란 그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에 있다” 또 그의 견해로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보다 자유주의적인 제도의 건설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제도들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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