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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대사 뒷모습 <3>이 문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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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대사 뒷모습 <3>이 문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朴 사상 의심한 미 정부 일각에서 주도"

1962년 3월 15일 저녁, 정동에 있는 미 대사관저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동년 2월 27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미국의 요구와 압력에 의해 눈물을 흘리면서 발표한 '민정불참‘과 ’8월 15일 민정이양‘ 선언이 나온 직후였으며, 군사정부가 요구하였던 2,500만 달러의 추가원조를 미국이 수용하기 직전의 시기였다. 이날 파티에는 버거 주한 미국대사, 킬렌 USOM/K 처장,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박정희 의장, 김재춘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하였다.

파티가 끝날 무렵 박정희 의장은 버거와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 날 ‘군정연장’과 관련된 선언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2.28 선언을 통해 민정이양을 선언한 박정희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 열린 파티가 곧 군정연장을 내용으로 하는 3.16 성명의 전야제가 되었던 것이다.

침묵을 지키던 워싱턴은 3월23일 국무부 대변인 화이트의 공식논평을 통해 4년간 군정을 더 지속시킨다면 한국정치에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3월29일 국무부는 또 한차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정희와 케네디 사이에는 군정연장과 민정이양을 둘러싼 편지가 3월 말부터 4월 초사이 몇 차례 왕래하였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요구한 2천5백만 달러의 추가원조를 사실상 거부하였고, 한국군 감축이 이루어질 것이며 미국원조가 감소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시기 미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활동했던 이가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다. 한국의 정치와 관련된 유명한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박행웅, 이종삼 번역, 한울아카데미, 2000, 원제: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이후 현재까지 외국인이 본 한국정치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성과로 이용되었다. 수많은 미국의 학자들, 외교관들이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이용하였다) 헨더슨은 불법적인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의장과 쿠데타 주체세력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으며, 구 민주당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던 1963년 봄, 합동통신사의 리영희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박정희의 민정이양 번복을 이유로 잉여농산물 원조를 보류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 소식은 곧 도하 신문에 특종으로 발표되었고, 군사정부 측에서는 미 대사관에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박정희를 달래서 민정이양을 성사시키려고 했던 미 대사관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헨더슨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헨더슨은 본국에 돌아간 이후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에 관한 테제'는 바로 그레고리 헨더슨이 작성한 문서이다. 정확한 작성일자를 알 수는 없지만, 1962년에 쿠데타 핵심세력과 관련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비밀 인터뷰 작업을 통하여 1963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황태성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 있고, 그가 남한에 파견된 사실을 미국이 파악한 것은 1962년 말경이다) 문서의 내용 중 한국전쟁 시기 각 지역에서의 활동이나 부역과 관련된 내용은 인터뷰 없이는 정리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정보문건으로서는 드물게 각주를 달고 있다는 것은 이 문서를 작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또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문서의 내용이 사실임을 방증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서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헨더슨 개인이 취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문서일 뿐만 아니라 미 국무부 내에서도 이 문서의 신빙성에 대한 정확한 논평을 달지 않았다. 물론 헨더슨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러한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지는 않았겠지만, 군사정부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부정적인 내용의 자료들을 주로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정적으로 누가 이러한 정보를 제공했는가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국무부 내부에서 회람되는 문건이었고, 공개되지 않는 문건이었다면 굳이 취재원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는 당시 군사정부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문서는 당시 군사정부 주체들에 대한 미국의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쿠데타 직후부터 미국은 군사정부의 주체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 국무부 사이의 전문들을 수록한 795B 문서들(7은 정치, 95B는 남한을 가리킴)과 당시의 중요한 문서들을 공식적으로 편집한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의 한국 파트에 있는 문서들에는 이와 관련된 문서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5.16 직후 미국은 한국 밖에 있는 한국인 군인들, 예컨대 정일권, 송요찬(이상 미국), 백선엽(당시 주대만 대사) 등을 통해 군사 쿠데타 주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들은 대체로 박정희가 좌익의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 장교들(young officers)'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육군 정보국에서 근무한 이들이 공산주의의 이론과 북한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군사정부 내에서의 공산주의자 영향에 관한 테제”와 같은 문서가 나온 데에는 1962년 한해동안 이루어진 군사정부의 활동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앙정보부의 초법적인 활동, 4대의혹 사건, 통화개혁, 황태성 사건 등은 군사정부와 미국 사이에 갈등을 빚어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이러한 활동이 쿠데타 주체세력 중 일부 젊은 군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들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초기에 비밀에 붙여졌던 황태성 사건이 미국에 알려지면서 박정희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의 군정기간동안 미국의 문서들 속에는 ‘민족주의적(nationalist)', 또는 ’사회주의적(socialist)'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하며, 이 형용사들은 주로 ‘젊은 장교들’과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비밀연구소 직원들(backroom boys)’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군사정부 인사들에 대한 미국의 보편적인 인식은 아니었다. 쿠데타의 공약에는 분명히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점이 있었으며, 미국과 접촉하는 군사정부의 인사들은 쿠데타 주체들이 명백하게 반공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 역시 쿠데타가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난 이후에는 군사정부를 지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또한 당시의 미국문서들은 박정희만은 믿을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의 중심에는 버거 주한미국대사가 있었으며, 그의 주위에 있는 인물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박정희를 중심으로 정치세력들을 재편할 경우 한국 내에서 안정된 정치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1965년 버거는 베트남 대사로 가기 직전 자신이 한국에 있는 동안 군사정부의 주체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결론적으로 미국 행정부 내에서는 군사정부 내의 인사들에 대하여 상반되는 인식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경우는 분명하지만, 전력이 분명하지 않은 쿠데타 주체세력 중 육사 8기생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던 반면, 반공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한미관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문서가 그린을 통해서 힐스만에게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그린은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 대리대사로서 장면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던 인물로 홍콩주재 총영사로 있다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헨더슨이 왜 이 문서를 국무부장관에게 보내지 않고, 그린에게 보냈을까? 그린은 이 문서를 국무장관이나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서 받은 것일까, 아니면 헨더슨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일까? 만약 그린이 헨더슨으로부터 이 문서를 직접 받았다면 국무부 내에서 군사정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 이 문서가 작성되고 회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당시 국무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군사정부 내 인사들의 사상에 대한 신뢰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힐스만에게 이 문서를 보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힐스만은 국무부의 조사국장(Director of the 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으로 있다가 1963년 극동담당 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인물이다. 국무부 조사국은 다른 나라의 상황을 상세하게 조사하는 곳으로 각국정보평가(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를 CIA와 함께 작성하는 기관이다.

익명의 한 연구자는 이 시기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에 정치공작을 시도하였으며, 그 핵심에는 힐스만이 있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필자는 1998년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와 케네디 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힐스만과 관련된 자료를 열람하려고 하였지만,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료들이 공개되지 않았으며, 힐스만 개인의 인터뷰(Oral History)는 공개금지로 되어 있었다. 과연 이 문서는 왜 그린으로부터 힐스만에게 전달되었을까? 혹시 그린이나 힐스만이 박정희를 지지하고 있었던 버거대사나 국무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헨더슨에게 정보를 파악할 것을 지시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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