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겨레신문 정치부 성한용 기자가 출판한 `디제이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라는 저서의 내용중 일부를 놓고 동아, 조선, 중앙일보 등 이른바 빅3 신문들은 일제히 언론사 세무조사가 현 정권의 언론탄압 의도에 의해 계획됐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나라당도 논평을 통해 현 정권 언론탄압의 실상이 밝혀졌다고 주장하는 등 언론개혁 논쟁이 새삼 뜨거워지고 있다.
그러나 성한용 기자는 언론사 세무조사는 이제까지의 권력과 언론간의 검은 유착관계를 깨기 위한 수순이지, 언론 길들이기는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특히 성 기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은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DJ 정부가 왜 지역주의 청산이 왜 실패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DJ 정부의 실패에는 지역주의를 무기로 현 정부를 흔들려 한 거대신문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ㆍ중ㆍ동 세 신문은 이러한 측면은 일체 빼버린 채 정권의 언론탄압 부분만 집중 보도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온전한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내용을 가장 먼저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와 저자 성한용 기자의 반박문, 그리고 이 책중 문제가 된 부분(전라도 정권을 우습게 본 '빅3', 언론)을 전문 게재한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출판사측(중심)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언론세무조사는 빅3신문 타격용"**
***동아일보 10월 25일자**
언론사 세무조사는 현 정부의 언론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예상된다.
한겨레신문 정치부 정당팀장인 성한용(成漢鏞·42) 차장은 최근 펴낸 저서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는가’(도서출판 중심)에서 “국세청 세무조사는 동아일보 등 ‘빅3 신문’을 손보기 위한 ‘언론사 타격용’”이라고 주장했다. 성 차장은 김대중(金大中) 정부 출범이후 2년8개월간 한겨레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근무하면서 취재한 정권 핵심 인사들의 발언내용을 근거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성 차장은 “김 대통령이 올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한 직후 한 대통령수석비서관이 ‘우리가 언론사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동아 조선 중앙은 길길이 뛸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겨레가 줄기차게 요구한 ‘언론 개혁’을 곧 시작한다. 기사를 미리 쓰지 마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성 차장은 또 “언론사 세무조사 착수 후 현정권의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앞으로는 정권에 대한 기사를 비판적으로 쓰든, 호의적으로 쓰든 신문사 마음대로다. 대신 우리는 법률에 정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더 잃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성 차장은 이와 함께 이 책에서 현 정권이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한 원인으로 권력기관의 호남 편중인사로 인한 지역감정 악화, 민심 이반을 부른 옷로비 사건, 민주당의 4·13 총선 패배, DJ 측근들의 비리 연루 의혹 등을 꼽고, 이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다음은 언론사 세무조사 관련 주요 내용 요약.
▽DJ의 정권 초기 언론관〓DJ는 집권 초기 언론에 대해 대체로 낭만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DJ는 98년 ‘신문의 날’ 리셉션에서 “개인적으로 신문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당하기도 해 때로는 화도 나고 어떻게 해볼까 생각도 했으나, 어쨌든 언론 덕택으로 민주주의도 이만큼 발전했다”고 말했다. 이는 김 대통령이 몇몇 신문은 손을 볼 생각도 있지만 참을테니 정권에 협조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DJ 집권 직후 시민단체와 청와대 내부에서도 힘이 있을 때 언론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DJ는 움직이지 않았다.
▽DJ가 ‘빅3’와 멀어진 계기〓98년 8월 ‘제2건국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정권 비판에 본격 가세했다. 조선일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논조를 유지했다.
유력 일간지들이 DJ를 공격한 무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역문제가 가장 위력적이었다. ‘빅3’ 지면에는 ‘호남편중 인사’라는 제목이 끊이질 않았고 신문을 본 경상도의 민심은 갈수록 악화됐다. DJ는 차츰 언론에 대해 신경질적이 돼갔다.
98년 8월 한 대통령수석비서관은 언론 개혁에 대해 “좀 지켜보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하면 사활을 건 전쟁이 된다. 이런 얘기가 나가면 큰일난다”고 털어놓았다. 하긴 해야 하는데 시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98년 11월 한 대통령수석비서관이 술을 마시다가 문서를 하나 보여주면서 “언론이 이럴 수 없다. 중앙과 세계는 당장 작살내겠다. 조선도 두세달 내에 그냥 안 둔다. 국세청 상속세로 뒤집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세무조사 착수〓2000년 10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됐다. 하지만 경상도의 분위기는 싸늘했고 ‘빅3 신문’은 경제난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정현준사건과 진승현사건 등 잇따라 터진 금융사고가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빅3’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DJ의 2001년 연두회견은 집권 초기부터 유지해온 자율에 의한 언론 개혁 방침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DJ 발언 배경에 대해 “현 정권은 아무리 잘해도 비판을 받았다. 호남 편중인사 보도, 경제 위기를 과장하는 보도 경향 등은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국세청이 조사팀을 정비하고 내사에 착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DJ의 언론 개혁 발언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안돼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청와대는 세무조사 착수 발표 직전 조선, 중앙일보에 세무조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에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그만큼 현 정권이 동아일보를 미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조선일보보다 더 지독하게 비판을 해서 훨씬 더 미워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세무조사 기획 단계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한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빅3’가 정권에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고 한다. 따라서 언론사 세무조사는 ‘언론사 길들이기’가 아니라 ‘언론사 타격용’이었다.
***“정-언갈등 기록을 멋대로 짜깁기”**
***성한용 기자 반박문-한겨레신문 10월 26일자**
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이후 현 정권에서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한 것이다.
모두 31개 장 가운데, 언론 관련은 `전라도 정권을 우습게 본 빅3, 언론'이라는 한 장이다. 실제 내용은 △현 정권의 지역문제에 관한 언론의 편파적 보도 △이에 따른 정권 내부의 불만 고조 △시민단체 등의 언론개혁 목소리와 김 대통령의 반응 등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 특히 지역문제에 관한 한 디제이가 잘못한 것도 많지만, `빅3'(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통칭)은 필요 이상으로 지역갈등을 증폭시켰다. 한나라당이 지역편중 인사를 지적하면, `빅3'은 여지없이 큰 기사로 취급했다. 또 한나라당 대변인 성명이나 당직자의 단순한 의견도 조선-중앙-동아의 1면 스트레이트 기사로 취급됐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나 김영삼 정권에서 이들 `빅3'은 야당의 성명이나 논평을 기사로 제대로 취급한 적 없다.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명분으로 한나라당과 함께 사실상 정권 흔들기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지역갈등,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 `반디제이' 감정이 더욱 심해졌다. ….”
“유력 일간지들이 디제이를 공격한 무기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지역문제가 가장 위력적이었다. 정권의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빅3' 신문의 지면에는 `호남 편중인사'라는 제목이 끊이질 않았고, 신문을 본 경상도의 민심은 갈수록 악화했다. 호남 편중 인사 기사는 신문이 적극적으로 취재를 해서 작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나라당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
이런 상황에서 정권 내부의 사람들은 조선일보 등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고, 1998년 8월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좀 지켜보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하면 사활을 건 전쟁이 된다. 이런 얘기가 나가면 큰일난다”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다. 당시 청와대나 여당인 국민회의의 취재 기자들은 조선·중앙·동아일보 기자를 포함해 누구나 정권 내부의 이런 분위기와 직접적인 발언을 자주 듣고 있었다.
세 신문은 책의 내용 가운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언론탄압'의 인상을 줄 수 있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기사를 썼다. 결과적으로 `짜깁기'에 의한 왜곡보도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동아일보의 2000년 9월9일치 1면 머릿기사,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를 대표적인 지역감정 자극 기사로 소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25일치 신문에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런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디제이 집권 직후 언론계 구성원들과 시민단체에서는 힘이 있을 때 언론개혁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부분을, 동아일보는 “시민단체와 청와대 내부에서도 힘이 있을 때 언론개혁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로 고쳐서 보도했다. 남시욱씨의 칼럼을 통해 정권을 향해서 “두고 보자”고 협박했다는 부분은 아예 다루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사 기자들의 성명을 비판한 것과, 김대중 주필이 신문지면을 사유화했다는 내용 등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의 제목을 `조선, 두세달내 그냥 안둬 상속세로 뒤집어 버릴 것'이라고 달았다.
중앙일보는 사주가 주재한 회의에서 김 대통령을 두고 식소사번(食少事煩:식사는 적게 하고 일은 많이 해서 건강에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내용과, 박지원 공보수석이 중앙일보의 지나친 공격적 기사를 문제삼았다는 등의 내용을 누락시켰다. 그리고 기사의 제목은 `중앙일보 작살내겠다'로 했다.
결국 세 신문 모두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대부분 빼버리고, 정권 차원의 세무조사 `사전 준비작업'을 `언론사 탄압을 위한 사전 계획' 및 '언론탄압 의도'로 증폭시켜서 보도한 것이다. 이런 기사를 통해 세 신문은 자신이야말로 김대중 정권의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세 신문은 또 언론사 세무조사의 배경과 관련해 이 책에서 `결론'으로 삼은 마지막 부분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디제이가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나서고 검찰수사를 통해 사주들을 구속시킨 배경에는 `언론 길들이기' 목적이 있었을까? 결론을 얘기하면 아니다. … 정확히 말하면 `언론 길들이기'가 아니라, `언론사 타격'이 정치적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무슨 배짱으로 디제이는 세무조사를 시작했을까? 정답은 정권과 언론의 `결별'이다. 언론에 더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현 정권의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정권에 대한 기사를 비판적으로 쓰든, 호의적으로 쓰든 신문사 마음대로다. 그 대신 우리는 법률에 정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어차피 몇몇 신문은 이회창씨의 집권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더 잃을 것도 없다.'”
필자는 언론사 세무조사의 배경이 정권과 언론의 `결별'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교묘하게 `언론사 타격'까지만 언급했다.
한겨레의 경우 그동안 언론사 세무조사의 `의도'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세무조사의 배경에 정권과 그 정권에 지극히 적대적인 `족벌언론'이라는 두 세력의 싸움의 성격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언론사 세무조사 및 탈세 언론사주에 대한 사법처리는 `정권과 언론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2001년 7월29일치)이라는 등의 기사를 쓴 바 있다.
또 한겨레 여론조사를 통해 50.8%의 국민이 세무조사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2001년 6월25일치), 52.2%는 신문고시가 언론자유를 탄압한다고 보는 등 언론사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 조처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국민들이 `의심'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바 있다.
이 책에서 쓴 정권 내부의 세무조사 착수 배경 등은 이런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배경으로 참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직접 기사로 인용해서 쓸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고려해, 기자가 자료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뒤늦게 책으로 쓴 것이다.
***전라도 정권을 우습게 본 '빅3', 언론**
(성한용 기자 저서 'DJ는 왜 지역갈등 해소에 실패했나'중 282-306쪽)
***'힘없는 정권이다' 깔봐**
DJ 정권과 언론의 관계는 나중에 여러 편의 학술논문이 나올 것이다. 특히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빅3’와 DJ의 관계는 미묘하고도 복잡하다. 견디다 못한 DJ는 마지막으로 “좋다. 법대로 하자”며 세무조사라는 칼을 뽑아들었지만, 그 전까지 DJ는 한국사회의 여론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이 세 신문사 사주들에게 온갖 애원을 다 했다. 사주에게 문화훈장을 주고, 신문사의 하찮은 행사에까지 직접 참석하고, 가끔씩은 사주를 청와대로 ‘모셔다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따라서 담론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빅3’와 편집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주들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빅3’의 사주들은 DJ를 깔보기 시작했다. ‘힘없는 정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정권을 무력화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빅3’쪽에서는 DJ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이 언론 본연의 임무인 정권감시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런 주장은 30~40% 정도만 진실을 담고 있다. DJ는 확실히 이들 ‘빅3’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다. 특히 지역문제에 관한한 DJ가 잘못한 것도 많지만, ‘빅3’는 필요 이상으로 지역갈등을 증폭시켰다. 한나라당이 지역편중인사를 지적하면, ‘빅3’는 여지없이 큰 기사로 취급했다. 또 한나라당 대변인 성명이나 당직자의 단순한 의견도 조선-중앙-동아의 1면 스트레이트 기사로 취급됐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나 김영삼 정권에서 이들 ‘빅3’는 야당의 성명이나 논평을 기사로 제대로 취급한 적이 없다.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명분으로 한나라당과 함께 사실상 정권 흔들기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지역갈등,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 ‘반DJ' 감정이 더욱 심해졌다.
DJ의 대언론정책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99년 11월 청와대 요직에 있던 한 비서관은 필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정권엔 호남정권의 한계가 있다. 경험도 없다. 언론을 어떻게 다루는 지를 전혀 모르고 출발했다. 전에 YS 때는 이원종 정무수석이 각 부 차관들을 소집해 말로 다 지시했다. 지금 언론은 호남에 대한 지식인들의 경멸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무차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나는 박지원 수석에게 신문사에 기사 부탁을 하지 말라고 했다. 노하우가 없으니, 각 부처 공보관들은 놀리고 청와대 공보수석이 직접 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됐다.” 정권 내부에선 박지원 공보수석이 언론사를 상대하는 방식을 ‘앵벌이식’ 언론정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정권 초기의 몇 가지 장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DJ의 대통령 당선 직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DJ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97년 겨울과 98년 봄은 국내경제가 엄혹한 시기였다. 정권에서 신문사 한 두 개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핑계는 외환위기 탓을 대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빅3’는 DJ를 잘 알지 못했다. 재야인사나 야당총재로서의 DJ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대통령 DJ는 별로 상상을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신들이 쥐고 있던 칼자루를 이제는 DJ가 쥐고 있는 형국이었다.
DJ가 당선자 시절 가장 먼저 만난 언론인은 한겨레신문의 권근술 사장이었다. 김대중 당선자는 일산 자택에서 권 사장을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하며 구조조정, 실업대책, 양심수 사면, 남북관계 등 새 정부의 당면과제를 놓고 의견교환을 했다. 권 사장은 여야 정권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국정 전반의 개혁과제 수행에 최선의 노력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전달했다. 언론계 사람들은 DJ가 ‘빅3’의 막강한 사주들을 외면하고 한겨레신문 사장을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을 보고, 정권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DJ는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DJ가 집권을 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배경 가운데 YS의 아들 김현철씨 문제가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김현철씨를 YS 집권 기간 내내 물고 늘어졌고, 마침내 국정에 개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 폭로함으로써 YS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김현철씨가 YTN 인사에 개입했다는 녹음테이프를 확보해 한겨레신문에 보도했던 김성호 기자는 2000년 4월 서울 강서을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DJ는 9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리셉션에 참석해 이렇게 연설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신문사 창간 리셉션에 참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한겨레신문 출발 때 주식모집에 참여하면서도 ‘과연 푼푼이 모인 돈으로 잘 될 수 있을까. 이 신문이 얼마나 갈까’ 하는 걱정 속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신문을 봤습니다. 한겨레는 주위의 험난한 조건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어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도 안타깝고 분한 마음에 항의하고 싸움도 한 것이 기억납니다. … 이 나라에서 국민의 돈을 모아 신문을 만든 것은 기적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튼튼한 신문으로 성장하고 주간지까지 정상으로 발전시킨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한겨레에는 우수한 언론인이 집결해 있습니다. 탄압에 밀려 온 사람도 있었고, 좋은 자리에 있다가 사표를 내고 합류한 사람도 있습니다. 박봉의 한겨레를 찾아온 경우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감동적인 광경이었습니다. … 한겨레가 있음으로 해서 민주주의와 정의, 민족통일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보다 활발히 논의되고 영향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국제통화기금(IMF) 시대에 한겨레도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겨레가 좌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국민이 만들고 키워온 한겨레가 국민에 의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기 모인 우리들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간 때 참여한 주주로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모든 힘을 다해서 협력할 생각입니다.”
***DJ의 안이한 인식**
DJ는 집권 초기 언론에 대해 대체로 낭만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98년 4월6일 신문의 날(4월7일)을 하루 앞두고 열린 리셉션에 참석해 이런 내용의 연설을 했다. 당시 발언은 DJ가 언론, 특히 신문개혁에 관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언급한 것이어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6ㆍ25 이후의 최대 위기를 맞아 언론도 자기 나름의 역할을 다하며 협력해야 한다. 비판없는 찬양보다 우정있는 비판이 중요하다. 우정있는 비판을 해달라. 개인적으로 신문의 도움도 받기도 했고 당하기도 해 때로는 속으로 화도 나고 어떻게 해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어쨌든 언론 덕택으로 민주주의도 이만큼 발전했다. 언론도 새 시대에 맞춰 구조조정도 하고 개혁도 해 발전해 나가길 기원한다.”
대통령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몇몇 신문은 손을 볼 생각도 있지만 당분간 참을테니 정권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DJ 집권 직후 언론계 구성원들과 시민단체에서는 “힘이 있을 때 언론개혁에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권이 힘이 빠지면 언론에 휘둘리게 돼 있으니, 세무조사와 제도개혁에 의한 언론개혁에 곧바로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이런 보고서가 숱하게 많이 올라갔다. 당시 박준영 국내언론비서관은 80년 중앙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박지원 공보수석을 통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여론과 한겨레신문과 언론노조, 기자협회 등 언론계 내부의 목소리를 수도 없이 DJ에게 보고서로 올렸다. 그러나 DJ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IMF사태로 경제가 너무 어렵고, 야당이나 기득권을 가진 집단과의 대치가 너무 첨예하기 때문에 전선을 확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DJ의 이런 계산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DJ정권 출범 첫해부터 언론은 정권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중앙일보와 세계일보의 정권에 대한 비판이 가장 날카로왔다. 98년 8월 제2건국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정권비판에 본격 가세했다. 조선일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논조를 유지했다. 유력 일간지들이 DJ를 공격한 무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역문제가 가장 위력적이었다. 정권의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몇 차례에 나누어 치러진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는 여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언론에 좋은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빅3’ 신문의 지면에는 ‘호남편중 인사’라는 제목이 끊이질 않았고, 신문을 본 경상도의 민심은 갈수록 악화했다. 호남편중 인사 기사는 신문이 적극적으로 취재를 해서 작성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나라당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DJ는 차츰 언론에 대해 신경질적이 돼 갔다. 청와대에서 DJ를 보좌하는 참모들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8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가운데 한 사람은 필자에게 언론개혁에 대해 “좀 지켜보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하면 사활을 건 전쟁이 된다. 이런 얘기가 나가면 큰일난다”고 털어 놓았다. 하긴 해야 하는데 시기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98년 8월15일 DJ가 ‘제2건국’을 대대적으로 주창하고 나섰지만, 언론은 관주도의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동아일보는 제2건국운동 공격의 선두에 섰다. 이 당시 동아일보가 왜 정권에 비판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았지만, 여기에 소개하지는 않겠다. 제2건국운동을 기획했던 이강래 정무수석은 몇 달이 지난 뒤 “이제 그만두고 싶어도 동아일보 때문에 그만둘 수 없게 됐다. 야당의 정치공세는 우리도 옛날에 그랬으니 이해라도 간다. 하지만 언론은 너무한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박지원 공보수석은 98년 12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외대언론인회 초청 강연에서 “우리 언론은 개혁적이기는 커녕 자사이기주의와 상업주의에 얽매여 있고 자기비판에 인색하다. 국민들은 현재 언론의 자유보다는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언론개혁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율개혁론’을 주장했다.
“언론개혁은 해당 언론사의 몫이며 그 책임도 언론사가 져야 한다.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언론사들도 경영난에 봉착해 있지만 정부는 어떤 채찍이나 당근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언론도 철저한 시장경제논리에 따른 경영과 구조조정을 자율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새 정부는 과거 어떤 정부보다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한다는 게 기본정책이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반론권 행사와 언론중재위 제소를 통해 책임을 규명해 나갈 것이다.”
박지원 공보수석의 언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계속됐다. 그는 99년 1월15일 지방언론(중부권) 세미나에 참석해 “지방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이비 부조리 행태와 지역감정 조장 및 편파보도다. 소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지역의 끝없는 분열을 유도하며, 심지어 지역감정 부추기는 기사를 보도해야 신문, 방송의 구독률과 시청률 높아진다고 말하는 형편”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지방언론의 지역감정 부추기기 보도는 사실이었다. 한국언론재단이 99년 1월 한 달 동안 지방언론사의 지면을 집중분석해 99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가 있었다. ‘지방신문의 지역관계 보도행태-영남․호남․충청권 신문 심층분석’이라는 이 보고서는 “국내 지방신문이 지나치게 정치지향적이며, 지역관계 기사를 배경 설명 없이 스트레이트로 단순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 갈등적 성격의 기사가 많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고서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지역관계 기사 중에는 부정적 파급효과가 큰 갈등적 성격의 기사가 52.6%(373건)로 많았다. 중립적 기사는 35.0%(248건), 화합적 기사는 6.8%(48건), 상대적 열등을 지적한 기사는 5.1%(36건)였다. 상대적 열등 성격의 기사가 영․호남권과 충청권 주민들의 갈등은 직접 내포하고 있지 않지만 대체로 전국 단위와 비교해 상대적 취약성을 부각시키는 기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기사의 57.7%가 갈등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제뉴스에 관한 연구에서 갈등적 기사가 40%선에 머물고 있는데 이런 비율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국내 지방신문의 지역관계 기사에서 갈등적 기사가 50%를 넘는다는 사실은 문제가 있다. … 영남권에서는 지역정서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 사설․칼럼이 일부 있었으며, 호남권에서는 역차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논지가 일부 있어 대조적이었다. … 특히 LG반도체 회사가 있는 충청지역과 삼성자동차와 관련이 있는 영남지역과 달리 지역의 이해관계가 적은 호남지역 신문은 대기업 빅딜과 관련된 사설․칼럼을 전혀 게재하지 않은 점이 이채롭다.”
마침내 DJ도 언론의 보도 내용에 대해 직접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1999년 3월16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DJ는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혼선은 있었지만 일부 언론에서 국정의 총체적 난맥상이라고 지적한 것은 대단히 부당한 비판이다. 과장된 보도가 민심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대북정책과 경제회복에 대해 전세계적인 칭찬을 받고 실제로 경기가 나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난맥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
박지원 대변인은 국무회의 브리핑 직후 “오는 19일 기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하기로 했다. 앞으로 매달 출입기자들과 격의없는 간담회를 하면서 기자들의 의견도 듣고 여론도 파악할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대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DJ는 집권하면서 없앴던 공보처를 국정홍보처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99년 5월3일 국정홍보처를 신설하는 정부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언론사 인허가 권한을 가진 신문과와 방송과는 문화광광부에 그대로 남았다. 국정홍보처에 언론사 관리업무를 주는 것을 JP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를 쏘다**
DJ는 마침내 99년 5월29일 세무조사라는 ‘칼’을 꺼내 들었다. 국세청이 한진그룹, SK그룹과 함께,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소유하고 있는 보광그룹에 대해 전격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동시에 세계일보에 대한 세무조사도 시작됐다. 정부는 이 세무조사가 중앙일보와는 관련이 없고 보광에 대한 세무조사일 뿐이라고 설명을 했다. 보광 내부관계자의 ‘제보’가 있었다는 해명도 덧붙여졌다. 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었다. 중앙일보가 세무조사를 ‘당한’ 배경에는 DJ정권의 ‘손보기’ 의도가 분명히 숨어있었다. 세무조사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청와대 안에서는 “중앙일보를 한번 쳐야 한다”는 여러 가지 징조이 있었다.
정권 초기 DJ와 참모들은 중앙일보가 ‘호남 편중인사’와 정권의 경제 실정을 끊임없이 공격한 것에 대해 ‘감정적인 이유’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98년 8월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전해 주었다. 중앙일보 사주가 참석하는 회의석상에서 DJ에 대해 ‘식소사번’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를 알게된 청와대 사람들이 격분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은 삼국지에서 사마의가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제갈량의 동태를 파악한 뒤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이 하니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곧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중앙일보쪽에서 이런 유래가 있는 ‘식소사번’을 언급한 것은 결국 DJ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청와대쪽은 해석했다.
98년 11월엔 이런 일도 있었다. 청와대의 한 수석비서관이 술을 마시다가 한밤중에 기자실을 찾아왔는데, 마침 기자실에는 필자 혼자만 남아 있었다. 최장집 교수에 대한 조선일보의 색깔론 제기가 파장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였다. 술에 취한 이 수석은 필자에게 문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문서에는 ‘이번 사건이 조선과 한겨레의 싸움으로 장기간 지속되면 밀릴 가능성이 있다. 최장집 교수 사건은 조선일보가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한 것이므로 효과적으로 대처해 언론개혁의 단초로 몰고 가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술 취한 수석은 필자를 붙잡고 횡설수설하며 하소연을 했다.
“JP가 중앙일보 홍 사장하고 골프를 쳤다. 조선일보쪽과는 더 먼저 쳤다. JP쪽에서 세계일보 이상희 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JP와 자민련은 조선일보-중앙일보-세계일보로 내각제 보수연합을 획책하고 있다. 우리가 내각제 약속은 지켜야 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가는 내각제는 절대 안된다. 언론이 이럴 수 없다. 중앙과 세계는 당장 작살내겠다. 조선도 두 세 달 내에 그냥 안둔다. 국세청 상속세로 뒤집어 버리겠다.”
그의 횡설수설은 나중에 고스란히 현실이 됐다.
박지원 공보수석은 99년 5월3일 고려대 언론대학원 특강에서 언론의 부당한 보도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발언한 일이 있다. 중앙일보의 보도내용을 ‘A신문의 경우’라고 예를 들어서 날짜별로 소개한 뒤, “과연 누구를 위한 비판이며, 나라경제를 어디로 끌고 가자는 것인지 우려하게 한다”고 공격했다. 중앙일보에 대한 분명한 경고 메시지였다.
98.11.6 경기회복은 2000년 후에나 가능
98.11.18 사설, 경기회복 낙관만 할때인가
98.12.7. 사설, 무디스 평가 들뜰 때 아니다.
98.12.14 경기저점에 대한 전망을 보도하면서 정부의 낙관적 전망을 비판
99.1.14 경기낙관론에 경고, 주가폭락 외환유출 가능성 부각(민간연구소 인용)
99.1.29 경기지표 상승 보도하면서 속단은 이르다 경고
99.4.5 (경기가 계속 좋아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1면 톱으로 “정부가 경기회복 속도조절에 나섰다.” “지표상 호전이 구조조정 소홀, 노사갈등 빌미 될 수 있다”는 논리 전개
99년 5월29일에 시작된 보광 세무조사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중앙일보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중앙일보는 간부회의에서 정부의 보광그룹 세무조사를 부당한 사찰로 규정하고 특별취재반을 구성한 뒤, 연일 1면을 비롯해 사설․해설면을 통해 ‘언론 길들이기 의혹'을 기사화했다.
DJ와 청와대도 만만치 않았다. 박준영 청와대 공보수석은 99년 10월3일 보광탈세사건과 관련히 갑자기 희한한 브리핑을 했다.
“이번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 아니다. 언론탄압이나 언론 길들이기가 아니라는 것은 정부가 중앙일보측의 여러 협상제의를 거부한데서도 알 수 있다 .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홍 사장이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경영진과 인사를 정부가 원하는대로 하겠다. 그러니 이 문제를 잘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탈세조사는 국세청과 검찰에 의해 국법질서를 바로 잡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언론 길들이기가 이 조사의 목적이었다면 그 제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것을 잘 처리하면 임기 내에 잘 협조하겠다는 제의까지 있었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앙일보쪽의 타협 제의까지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박준영씨는 중앙일보 출신이었다. DJ 정권과 중앙일보는 정권 초기부터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 중앙일보 출신들이 DJ 정권의 언론분야 핵심요원으로 활약하면서 정권과 중앙일보의 관계가 끊임없이 악화한 것이다. 중앙일보 뉴욕특파원을 지낸 박준영씨는 DJ 집권 이후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와 99년 5월 공보수석으로 승진했고, 2001년 9월 인사에서 국정홍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능한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 나중에는 중앙일보 판매 확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오홍근씨는 국정홍보처 신설과 함께 초대 국정홍보처장을 맡았다가, 2001년 9월 박준영씨와 자리를 맞바꿔 청와대 공보수석을 맡았다. 그리고 DJ의 연설문을 담당하는 고도원 비서관이 있다. 중앙일보는 97년 대선 국면에서 일선 정치부 기자들이 이회창씨를 돕기 위해 조언 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한 일이 있는데, 고씨는 이를 외부에 폭로했다는 의심을 뒤집어 쓰고 중앙일보를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사람이 모두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 세 사람에 대한 중앙일보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중앙일보는 99년 10월 홍 사장의 구속을 막기 위해 IPI(국제언론인협회)의 프릿츠 사무총장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이 편지에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중앙일보가 DJ정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특히 지역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프릿츠씨 … (이번 세무조사는) 사회적으로 홍 사장을 매장하고 중앙일보를 주인없는 신문으로 전락시키며, 정부의 충성어린 대변자로 훈련시키려는 목적입니다. 이번 조사는 내년 4월 총선을 대비한 김 대통령의 주요 전략이며, 총선의 결과는 현재와 퇴임 후 김 대통령의 미래를 정의할 것입니다. 귀하의 즉각적인 행동이 긴급히 요청됩니다. 귀하가 김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낼 때, 특히 주요 통신서비스를 통하여 비엔나에서 동시에 언론보도를 해주시겠습니까? 특히 김 대통령께서는 노벨평화상을 열망하기 때문에 비우호적 언론을 입막으려 한다는 외국의 비판에 극도로 민감합니다. … 1997년 12월 대선 당시 홍씨가 사장 겸 발행인으로 있는 중앙일보는 김대중씨에게 패배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홍씨의 이같은 죄악을 쉽게 잊지 않았습니다.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홍 사장은 훌륭한 논설위원 3명을 해임시켜야 했고, 편집국장이 사임했습니다. 정치담당 논설위원 겸 정치부장은 미국 워싱턴 지국장으로 보냈으며, 경제부장은 동경지국장으로 보냈습니다. 이같은 홍 사장측 조치가 김 대통령과의 화해의 손짓이었다면, 김 대통령의 정치기반인 전라도 출신 3명 직원이 화를 내며 회사를 사임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습니다. 이들 3명은 지역차별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냉소적으로 전라도 정부로 표현되는 현 정부에 당연스럽게 들어갔습니다. 한 명은 대통령 대변인, 한 명은 국정홍보처장으로, 다른 한 명은 대통령에게 자주 갈 수 있는 위치의 연설문 작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론정책, 전략, 통제에 입김이 큽니다.”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이 구속된 이후 DJ와 언론의 긴장관계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2000년 총선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형 이슈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바람’이 불면서 정권과 언론은 평화로운 시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빅3’의 정권비판은 전혀 무뎌지지가 않았다. 의약분업 실패는 정권에 대한 비판의 좋은 소재였다. 남북협력 시대를 맞아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일보는 월간조선 등을 통해 ‘색깔론’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이 시기엔 DJ의 언론정책에 대해 청와대 내부의 비판도 활발한 편이었다. DJ가 뭔가 근본적으로 처방을 잘못했다는 것이었다. ‘언론과의 전쟁’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청와대 비서관들이 점차 늘어갔다.
총선 직전인 2000년 3월15일 공보수석실의 한 비서관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총선 이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데는 실무자들 사이에 이의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할지 여부는 대통령만 안다.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이 시기를 살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최근 조선일보에 대해 ‘과공’이라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80주년 인터뷰하고, 휘호 써주고, 영상메시지 보내고, 사진전에 참가했다. 정권 내부에 조선일보에 무조건 아부하려는 사람들 탓일 수도 있고, 총선을 앞두고 언론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생각일 수도 있다. 아니면 총선 이후 언론개혁을 위해 지금 일부러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아일보 보도에 경악한 청와대**
2000년 4월 총선 이후 동아일보의 정권에 대한 공격이 점차 드세지기 시작했다. 2000년 9월9일자 동아일보 1면엔 희한한 기사가 실렸다.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 청와대는 경악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아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이 깜짝 놀랐다. 추석 경기가 어떻게 경상도에서만 나쁠 수가 있을까? 동아일보 기사는 이런 내용으로 돼 있다.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천고마비, 청명해야 할 가을하늘이 잿빛처럼 느껴진다. 소원을 빌 둥근 보름달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특히 지난달 말 지역경제를 지탱해온 우방이 부도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대구지역은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여있다. 부도사태와 관련된 협력업체는 1300여개, 관련 종사자만 1만3000여명. 한마디로 우방사태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 경제의 지표인 어음부도율은 0.2%로 다른 지역에 비해 낮다. 그러나 “더 이상 부도날 기업이 없기 때문에 부도율이 낮다”는 아이러니는 부산을 포함한 우리 경제 전반의 ‘우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구의 재래시장인 서문시장 상인들은 8일 이구동성으로 “아이들 옷 이외에 팔리는 것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 상인은 “작년의 경우 1만원어치를 팔았다면 올해는 2000원 매상에 불과하다” 말했다. 김모씨(45)는 “아직 우방의 여파가 시장에까지 직접 나타나진 않았지만 추석이후 연쇄부도와 함께 경제위기가 몰려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추석연휴를 앞둔 8일 오후 부산 남포동 국제시장. 260여개의 의류점포를 비롯해 1400여개의 점포가 밀집한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이곳도 ‘추석대목’은 실종됐다.
액세서리 가게를 기웃거리는 손님 외에는 썰렁한 모습. 이른 저녁 셔터를 내려버리는 가게도 적지 않다. 옷가게를 하는 김모씨(여). 몇 년 전만 해도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의 어깨와 부딪히는 게 다반사였다며 “추석 경기예, 요즘 부산에 그런 것이 어디 있어예”라며 강한 사투리로 반문했다.
대표적 번화가인 광복동. 사람이 북적거리기는커녕 한산한 느낌이고 부산역 앞엔 빈 택시만 붐비고 있다. 택시기사들은 손님이 없어 아예 차밖에 나와 삼삼오오 모여 신세타령이다. 한 기사는 “경기가 좋을 때는 손님도 가려 태우고 합승도 했다. 요즘은 사납금을 벌기도 어렵다”고 푸념했다.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렸던 부산 사상공단에서 과거의 영화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을 닫은 공장이 많고 어쩌다 만난 근로자들의 표정에도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다.
신발업체인 ㈜신세영화성 김동근(金東根)사장은 “최근에만도 비교적 잘 나가던 프로상사와 ㈜거금이 부도를 내는 등 잇따라 신발업체가 쓰러지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ㆍ대구〓특별취재팀>
동아일보는 경상도에 기반이 있는 신문이 아니다. 오히려 인촌 김성수와 그 집안의 뿌리는 전북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동아일보는 전라도 신문인 것이다. 그런데도 동아일보가 전라도 정권인 DJ 정권을 공격하고, 그것도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지역문제를 자극했다. 이유가 뭘까? 전라도에 대한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고, DJ를 우습게 봤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권에 대한 공격을 통해 회사차원의 여러 가지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동아일보가 DJ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DJ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다. 해프닝도 벌어졌다.
동아일보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0년 8월5일부터 13일까지 이뤄진 언론사 사장들의 북한 방문단에 참가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북한에서 거부했기 때문이었지만, 동아일보가 동참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동아일보는 ‘몽니’를 부렸다. 그 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9월11일 추석선물로 송이버섯 300상자를 보낸 일이 있다. 청와대는 이 송이를 언론사에도 보내주었는데,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은 이 송이를 받지 않았다. 청와대에 출입하던 기자도 회사 방침에 따라 송이버섯을 반납했다. 동아일보 사주의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던 셈이다.
***“손을 봐야 한다”**
2000년 10월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결정됐다. 하지만 경상도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북한에 ‘마구 퍼준 대가’로 DJ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는 주장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빅3’는 국내의 경제난을 부각시켰다. 정현준 사건과 진승현 사건 등 잇따라 터진 금융사고가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동교동계 실세들의 이름이 신문지면에 오르내렸다.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은 11월18일치 칼럼에서 DJ에게 공적자금 추가 투입과 관련해 ‘석고대죄’를 하라고 요구했다. DJ와 청와대 사람들은 언론에 대해 차츰 ‘한계’를 느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빅3’를 한 번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DJ는 2001년 1월11일 DJ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했다.
“언론자유가 지금 사상최대로 보장되고 있는 만큼 언론도 공정보도와 책임있는 비판을 해야 한다. 국민과 일반 언론인 사이에는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상당히 높다. 언론계, 학계, 시민단체, 국회가 합심해서 공정한 언론개혁대책을 세워야할 것이다.”
짧지만 강한 메시지였다. 집권 초기부터 유지해 온 언론 자율에 의한 개혁 방침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DJ발언의 배경에 대해 “현 정권은 정권 초부터 아무리 잘해도 비판을 받았다. 호남편중인사 보도, 경제위기를 과장하는 보도 경향 등은 대표적 사례다. 특히 ‘제2의 경제위기설’에 대한 언론의 과장된 보도가 체감경기를 위축시키고 경제위기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배경에 정권에 대한 무차별적 비판과 이를 바로 잡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했음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의 한 수석은 이 즈음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언론사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조선, 동아, 중앙은 길길이 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보다 더 뭘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겨레가 줄기차게 요구한 언론개혁을 곧 시작한다. 기사를 미리 쓰지 말라. 조금만 기다려라.”
정권이 언론을 칠 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 역시 세무조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국체청이 조사팀을 정비하고 내사에 착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DJ의 언론개혁 발언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안돼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청와대는 세무조사 착수 발표 직전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쪽에 세무조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동아일보에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쪽은 세무조사 발표를 듣고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그만큼 현 정권이 동아일보를 미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자기들과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조선일보보다 더 지독하게 비판을 해서 훨씬 더 미워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아무튼 국세청은 2001년 1월31일 중앙언론사에 대한 일제 세무조사 방침을 발표한 뒤, 2월8일부터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계획은 60일 동안 23개 언론사를 조사한다는 계획이었으나, 15개 언론사에 대한 조사기간을 30일 연장해 6월19일까지 조사를 마무리했다. 조사결과는 6월20일 발표됐다. 탈루소득 1조3594억원에 탈루법인세 5056억원. 국세청과 같은 기간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도 이루어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6월21일 13개 언론사에 242억원의 과징금을 물린다는 발표를 했다. 6월29일엔 국세청의 고발이 이루어졌다. 추징액은 조선일보가 864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동아일보는 827억원, 중앙일보는 850억원이었다. 국세청의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은 신속히 수사를 마치고 8월17일 저녁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 조희준 국민일보 회장 세 사람을 구속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의 판단착오**
언론사들, 특히 ‘빅3’는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시작된 이후 격렬하게 저항했다. 한 마디로 세무조사는 언론탄압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가 가장 강하게 반발했다. 조선일보는 사주고발이 이뤄진 6월29일 “현 정권의 언론탄압에 당당히 대처하겠다”는 사고를 1면에 냈다. 또 조선일보 기자들은 6월27일 편집국에서 집회를 갖고 성명을 채택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지금 사방에서 언론을 옥죄어오는 권력의 살기를 절감하고 있다. …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는 우리 기자들은, 김 대통령이 말한 언론개혁이 비판언론 압살 작전에 다름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 김대중 정권은 특히 조선일보를 비롯해 언론의 비판적 기능에 충실해온 유력지들을 집중 겨냥하고 있음도 명백해지고 있다. … 권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향해 수구 독재세력이라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이념적인 공세까지 함께 퍼붓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행위가 합법을 가장한 교활한 언론탄압이요, 언론길들이기에 목적이 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권력은 언론에 칼을 들이밀면서 기사와 논조를 들먹이고 있다. … 권력은 나아가 기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쳐쓰게 하는 데는 사주를 압박하는 게 지름길이라며 경영진을 향한 공공연한 협박도 서슴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현 정권의 비정상적인 세무조사가 이런 압력이 먹혀들지 않은 데 따른 보복조치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비판언론을 압살하려는 권력의 음모가 명확히 드러난 이상, 우리 조선일보 기자들은 그 음모에 분연히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반드시 이겨 언론자유와 조선일보를 지킬 것이다.” 2001년 6월27일 조선일보 기자 일동
언론은 ‘공정성’이 생명이다. 사람들이 신문기사를 믿는 것은 그래도 신문기사가 ‘사실’을 다루고 있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들은 성명을 통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성명을 채택한 다음날부터 조선일보에 실리는 모든 기사는 DJ와 싸우는 기사가 된다. 공정성과 객관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조선일보 기자들은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정권과의 싸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은 5월12일치 김대중 칼럼에서 국세청이 자신의 계좌를 무차별 추적하고 있다고 개인적인 사례를 들어서 주장하며, “세상은 바로 김대중 정권의 이런 행위, 이런 수법, 이런 인식의 결과를 다름 아닌 언론탄압이요, 언론자유 억압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신문지면의 사유화(私有化)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의 저항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6월25일치 시론에서 언론인 남시욱씨는 ‘그래도 언론은 죽지 않는다’는 칼럼을 통해 “정부는 이번 세무조사에 대한 시비의 최종 판가름이 이 정부의 임기가 끝난 다음에 이뤄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한국의 언론은 재갈을 물릴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 이번 세무조사 결과로 한국 언론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물론 권력은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보복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을 탄압하는 권력이 훗날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두고 보자’는 협박처럼 들린다.
흥미로운 것은 DJ와 ‘빅3’ 언론사의 대결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거대세력간 ‘기세싸움’ 성격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세무조사와 사주 구속을 전후해 여론이 양분된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또 한나라당이 조선-중앙-동아를 적극 편들고, 과거 기득권을 누렸던 지식인들이 대거 ‘언론탄압’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무조사와 사주구속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여론조사에서 영남과 호남의 답변이 다르게 나오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을 통해 세무조사와 사주구속이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필자들 가운데 경상도 출신들이 많은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아주 거칠게 분류하면 영남-한나라당-고소득계층-과거집권세력이 조선-중앙-동아와 한 편을 이뤘고, 호남-민주당-저소득계층-시민단체가 그 반대편을 이뤄 한판 승부를 겨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DJ가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나서고 검찰수사를 통해 사주들을 구속시킨 배경에는 ‘언론 길들이기’ 목적이 있었을까? 결론을 얘기하면 아니다. 세무조사 기획 단계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한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조ㆍ중ㆍ동이 정권에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조ㆍ중ㆍ동의 격렬한 비판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었다는 얘기다.
정확히 말하면 ‘언론 길들이기’가 아니라, ‘언론사 타격’이 정치적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무슨 배짱으로 DJ는 세무조사를 시작했을까? 정답은 정권과 언론의 ‘결별’이다. 언론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현 정권의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정권에 대한 기사를 비판적으로 쓰든, 호의적으로 쓰든 신문사 마음대로다. 그 대신 우리는 법률에 정해진 권한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어차피 몇몇 신문은 이회창씨의 집권을 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더 잃을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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