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논란에서 떠오른 '발달장애' 프레임
그 시작은 진중권 씨가 만들었다. 그는 트위터에서 "(생략) 딱 소설 속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 철없는 애들도 아니고 30~50대 아줌마, 아저씨라고 하던데…. 발달장애죠"라고 언급하면서 그의 트위터가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인 김대호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 글에서 한걸음 더 나가 이를 아예 프레임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논리적으로 두산백과사전까지 꺼내며 이석기 의원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그 논리가 '발달장애(developmental disability, 發達障碍)라는 프레임'이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발달장애를 '시대착오'와 '1980년대의 화석'과 비슷한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발달장애'라는 프레임이 급속히 널리 퍼질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예언에 따라 '발달장애'라는 용어가 상대방을 혐오하고 비아냥하면서 비난하는 데 잘 사용되고 있다.
두 사람의 글을 보면서 주류 사회(그들은 스스로 정상인이라는 위치에 놓고 자랑하는 사회)가 가지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비하'가 너무나 두꺼운 벽으로 다가왔고, 그로 인한 상처가 다시 한 번 나의 '속살과 뼈대'에도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는 그래도 지금까지 그들이 나름으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주류 사회에서 조금 다를 뿐인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진보적인 인사라고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실은 의견은 개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은 수십 년을 장애인 생활 시설에 쳐 박혀 '도가니'와 같은 상황에서 인권 침해를 당하면서도 '지역 사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살고 싶다'고 목소리 한 번 외치지 못하는 발달장애인 보다 수천, 수만 배는 대단할 것이다.
▲ 진중권 동양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장애인을 위한 연대 자리에서도 쏟아지는 '장애 비하' 말들
그런 안타까운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장애인에게 비일비재하다. 이번만이 아니다. 심지어 노동절 같은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 대규모 집회와 장애인들의 권리를 위해 모인 곳에서도 단체 대표들이 그런 비슷한 발언을 해서 가슴이 졸아들었을 때가 많았다.
바로 얼마 전인 지난 8월 24일, 장애 등급제·부양 의무제 폐지 공동 행동 1주년 투쟁 문화제와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문화제가 함께 열렸던 광화문 광장에서도 그랬다. 그곳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생략) 여기 계신 분들, 조금 신체가 불편하다고 장애인이 아닙니다. 진짜 장애인은 정신이 나간 정신 장애인들이에요. 그런 정신 나간 장애인들 너무 많아요. 진짜 장애인은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못살게 만드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진짜 장애인이에요. 그러니 여기 계신 여러분 힘내시고 우리 함께 투쟁합시다!"
그 분의 말은 대체적으로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를 강조하는 흐름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어떤 자리인가? 장애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장애 등급제를 폐지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부양 의무자 기준을 폐지해 주십시요"라며 광화문 광장 해치마당 지하도에서 1년을 넘게 목 놓아 외치며 서명 받아 왔고, 이를 기념하고 연대하기 위한 자리였다.
나는 그 문화제에서 우리를 지지하고 연대하기 위해 온 대표의 입에서 그런 말들을 들어야 했을 때 정말 가슴이 먹먹했다.
옆에서 함께 대표 발언을 듣던 장애 여성도 "아이고, 위험하다 위험해"라고 탄식했다.
여전히 시혜와 동정의 대상인 장애인
어느 집회에서는 노동조합 위원장이 이렇게 연대 발언한 적이 있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이 장애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진짜 장애인은 독재자 전두환 같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독재자 전두환이라는 용어와 "장애인"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같이 비유될 수 있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장애인들의 권리를 위해 함께 한다는 진보적인 분들의 입에서조차 아무런 감수성 없이 쏟아져 나올 때 정말 아득했다.
"진짜 장애인, 가짜 장애인, 정신 나간 사람, 병신, 애자, 찐따, 불구자, 절름발이, 정신장애인, 발달장애인…."
장애인을 부르는 그 명칭은 무수하고 그 용어에 따라 수많은 곳에서 욕으로, 시혜와 동정의 언어로, 비난과 비하의 말로, 혐오와 분노의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UN 국제 장애인 권리 협약에 가입한 나라라고 한다. 이전에 비해 장애인 인권을 떠들어 대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주류 사회는 뼈 속까지 장애인이 지닌 장애를 비하하고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자신을 소위 '정상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우리는 '장애인/비장애인'으로 구분하지만)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껍질 속에 보호받고 살아야 할 대상으로 한없이 전락시킨다.
그리고 심지어 장애인을 자신들의 양심을 가끔 씻어주는 '자원 봉사'라는 비누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비정상'의 상태를 혐오하고 비아냥하는 노리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가끔 집회에서 사회자가 나를 소개할 때 내가 활동하는 단체 이름인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가 다소 길어서 '전국 장애인 철폐 연대'라고 말하곤 한다. 보통은 그것을 실수라 생각하고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어쩌면 비장애인 중심의 이 사회에서 정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철폐하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 곳곳에 새겨진 가치가 아닐까?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계동 보건복지부 앞에서 '장애 등급제·부양 의무제 폐지' 집회를 마친 뒤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나는 장애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김대호 씨가 '패러다임'이야기를 했으니 장애인 운동의 패러다임으로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 흐름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으로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와 자유의 많은 부분에 제한당하는 차별을 경험하여 왔다. 장애를 이유로 가정과 사회에서 격리되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권리의 주체'로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도 그 장애인 운동 흐름에 따라, 태어나서 23년간 비장애인으로 장애인의 '장'도 몰랐던 사람이, 지금은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열심히 외치려 하고 있다.
나는 장애인이다. 비록 김대호 씨가 언급하는 '민주 진보가 앓고 있는 3대 발달장애 중 하나(NL적 장애)는 아니지만, 나는 비장애인이었을 때 정말 재미나게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놀던 날라리(NL)였다. 대학 1학년 마치고 해병대 갔다 와서 또 날라리(NL)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행글라이더를 즐겨 타다가 떨어져서 척수를 다쳐 시퍼런 24살의 나이에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이 되었을 때 나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집구석에 처박혀서 5년 동안 죽느냐 사느냐는 고민 속에 20대를 다 보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살아보려고 밖을 돌아다녀 보았다. 처음 밖을 나왔을 때 아파트에서 엄마와 같이 다니는 꼬마가 휠체어를 탄 나를 신기하게 보면서 '엄마, 이 아저씨는 왜 휠체어 타고 다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엄마 말 듣지 않아서 그래'라고 무슨 기분 나쁜 것을 본 것인 양 휑하니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나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장애인이 된 것은 맞다. 기독교인인 어머니께서 하신 "주일날 행글라이더 타지 말고 교회 가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고 행글라이더 타다가 떨어져 장애인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 땅에 251만 명이 넘는 장애이인이 모두가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장애인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경험 때문에 또다시 몇 개월을 혼자서 속앓이를 했다. 스스로 부끄러운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해 겨우 맛 본 집밖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다시 잠가 버렸다. 그냥 동네 아이와 그 엄마에게서 들은 사소한 말 때문에….
우리 장애인들은 이석기 지원 법률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요즘 장애인계에서는 발달장애인 부모들과 그 당사자들이 '발달장애인 지원 및 권리 보장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운동 과제 중 하나이다.
김대호 씨가 두산백과사전에서 찾아낸 '염색체 이상 등 여러 이유로 운동 발달 지연과 언어발달 지연, 전체적 발달이 지연된 사람들인 발달장애인'들이 이제 장애 영역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펼 수 없었기에 소외되고 배제되고 차별받아왔던 세상을 바꾸기 위한 내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장애인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행동까지 불사하고 있다.
나는 진중권, 김대호 씨가 이석기 의원에 대한 국정원의 내란 음모 사건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논평하기보다는. 단지 비난하고 혐오스러운 투로 비아냥하기 위해 '발달장애'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느꼈다.
물론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그 상황에서 '발달장애'라는 말을 표현했다는 것이 무슨 큰 잘못이냐고 따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고 있다. 만약 이석기 씨가 발달장애를 안고 있다면 결국 우리는 '이석기 지원 및 권리 보장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인 '발달장애인'들은 그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비록 무엇이 정상인지 모르겠지만, 정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보다는 전체적으로 발달이 지연되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더더욱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인간이면 최소한으로 누려야 할 모든 기본적인 권리에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고 격리되어 살아갈 이유가 없다. 왜 사회로부터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일부 명망가들이 발달장애인이 가지는 특징을 소재로 그들이 비난하고 싶은 대상을 공격할 때 그들 속은 시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들과 부모들, 장애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 아무리 중증 장애인일지라도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는 환경을 만들려고 피터지게 노력하는 이 사람들에게, 진보적인 사람들이 던진 무심한 한마디가 아프고 아픈 상처로 파고든다는 것을 왜 모를까?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이다.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한다면 맞서서 싸우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모른다면, '정상인'들만을 위한 이 사회는 서로의 차이 때문에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정체성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장애 인지적 감수성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자
내 하반신은 '무감각'하다. 내 하반신처럼 '무감각'한 '정상인'들의 사회에 진보적인 인사가 던진 그 말이 오히려 우리 모두가 조금이나마 고민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이라면 장애 인지적 감수성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세상이 진보적으로 변하는 길이다. 무한 경쟁의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함께 연대해서 '무한 경쟁' 체제의 변화까지(내란 음모?) 만들어가는 꿈을 함께 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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