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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앙' 잊은 한국, 큐슈 원전 사고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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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의 재앙' 잊은 한국, 큐슈 원전 사고나면…"

[수정일본사회운동 탐방]<1> 호사카 노부토 세타가야 구청장

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끼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첫 순서는 지난 7월에 진행된 호사카 노부토 구청장과의 인터뷰이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편집자>

호사카 노부토(保坂展人.ほさかのぶと. 55年生):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지자체장. 현재 도쿄 세타가야 구(世田谷区) 구청장. 시민운동 출신의 대표적인 진보파 구청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3번의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부간사장, 총무고문 등을 역임했다. 중학교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교입학이 거부된 이른바 '내신서 사건'(학생기록부에 학생운동 경력을 기록하여 블랙리스트로 활용)은 사법시험문제로 출제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교육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로 활약하다가 90년대 중반 일본 사민당 정치인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3.11(2010년3월11일 동북대지진과 츠나미,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복합적 재해의 의미)이후 도쿄의 세타가야 구청장에 당선되어 일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의 가장 주목받는 시민파 정치인의 한 사람이다.
▲호사카 노부토 의원(왼쪽)

"3.11 사태, 일본이 맞은 전대미문의 위기"

조+이 : 먼저 호사카 노부토 세타가야 구청장님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일본, 특히 도쿄도의 대표적인 지자체장으로 주목을 받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구청장 레벨을 훨씬 넘는 경력, 예컨대 3회에 걸친 국회의원, 사회민주당 부간사장도 역임했고 국회의원 시절에는 최대질의(7년간525회) 의원, 주목받는 3인의 의원으로 부각되기도 했고, 여러가지 면에서 활약한 의원이셨습다. 그런데 3.11 이후 지자체 장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큰 전환일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진보개혁적 지자체에 대한 기대와 주목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좋은 시사점을 던져주시기를 바랍니다.

3.11 이후 처음으로 치뤄진 지난 4월 지자체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지만, 취임 이후 지자체장으로서의 최근의 움직임을 소개해 주시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호사카 : 먼저 한국에 대한 추억들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해서 '사형제 폐지운동'하시는 분 등 많은 한국 분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2001년 9.11 사건이 났을 때 서울에 있었고, 당시 미끼 다케오 수상의 부인(미키무츠코,일조국교촉진국민협회부회장 및 전후보상운동의 대표적 사회운동가)과 함께 점심을 했는데, 다음 날 일정이 전면 취소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바람에 예정에 없던 한국 국회의원들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제가 드린 선거홍보 팜플릿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는데, 몇가지 참신한 정책을 약속하고 시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번 지진 피해자 지원과 이것에 대한 주민들의 참여, 구청의 전면적인 정보공개를 포함한 참여형 구정(區政)을 한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또한 4년간의 구청장 퇴직금 약 2500만엔(약3억원)을 폐지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조례를 제정해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조+이 : 선거 홍보물에 보면, '세타가야에서 부터 일본을 바꾸자'는 슬로건이 있던데, 어떤 의미입니까.

호사카 : 잘 아시다시피, 3월 11일 지진피해와 쓰나미, 그리고 원전 누출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일본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일본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절박한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것을 정부를 바라보거나 피해지역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우리 구에서부터,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일본을 바꾸자'는 취지입니다. 일단 전체 구(區)의 차원에서 피해 피해지역을 지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담당 직원을 임명하고 버스를 대여해서 물품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지원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脫)원전이라는 과제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로 여기 세타가야구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도쿄에서 이런 피해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하는 작업도 포함됩니다. 구 전체를 27개 지역으로 나누고, 주민들 간에 라운드테이블을 만들고, 연락책임도 만들었습니다.

탈원전과 관련하여 두가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먼저 원전 없이 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 전력의 사용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에서 하는 식으로 무조건 절전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력에 대한 정보를 주민들이 공유하면서 자발적으로 절전을 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전력회사에 전력과 관련된 정보공개를 구 차원에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와 같이 진상을 올바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절전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의 표현으로 말하면 '협박성 절전'입니다. 아직도 충분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전력이 부족한지에 대해서 개별 지역의 데이터를 전력회사에 공개를 요구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은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원전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이 풍부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도쿄전력회사의 정보조작도 있습니다. 폐쇄적이고요. 절전에 대해서 도쿄전력의 공급전력에 대해서 그 세부내역이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위험하다고 하는 공포로 인하여,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협박식 절전입니다.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방향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타가와 구가 하는 식으로 정보를 공개하고 눈으로 보고 주민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종의 '민주적 절전'인 것이지요. 이렇게 민주적 절전을 하게 되면, 원전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일본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과제가 되고 있는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 지금이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국민들은 탈원전의 이미지가 아직 직접적인 체감으로 다가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일본 재난을 계기로 에너지 정책의 전환과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연에너지 또는 대체 에너지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방향입니다. 지역 차원에서부터 자연에너지 개발의 여론을 조성하자는 취지에서, 9월6일 두명의 유명한 패널을 불러서, '재생가능 에너지에 관한 심포지움'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패널은 이다 데츠나리(飯田哲也, 환경에너지정책연구소소장)씨로 원전개발 엔지니어 출신인데 아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에너지 전환에 대한 조언을 받기 위해서 이지요. 이 외에 후쿠시마현의 피해지역 미나미 소바(南相馬)시의 시장 사쿠라이 가츠노부(桜井 勝延)입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 가장 가까운 마을의 시장입니다. 현재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요. 새로운 산업을 발견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자연에너지를 도입해서, 지역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실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타가와 구에서 이런 토론을 열심히 해서, 주민들의 공감대를 넓히고, 예를 들어 미나미 소바의 재해 지역에도 풍차에 의한 대체에너지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재정을 만들기 위해, 시민펀드를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구에서도 민가 지붕 위에 태양 파넬을 더욱 많이 보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구요.
▲ 호사카 노부토 의원

조+이 : 얼마전 일본 경제산업성 관료가 일본 정부의 폐쇄성과 정보 은폐를 폭로하는 책(古賀茂明 <日本中枢の崩壊(일본 중추의 붕괴)>講談社, 2011年)을 내서 주목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구청 차원의 과제만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적 과제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호사카 :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과 지역의 차원에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역 차원에서부터 출발해서 국가차원의 정보공개나 정책변화를 이끌어 가는 아래부터의 사례가 많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원전 사고가 있었을 때 피난을 할지 안 할지의 정책적 판단을 예로 들어보면, 일단 책임은 자치단체에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책임을 진다고 하지만, 즉 관료도 정치가도 많이 있지만, 사임해버리면 그만이고, 명확한 책임자가 보이지 않는 구조입니다.

예컨대 시즈오카의 하마오카(浜岡) 원전을 추가로 중지하는 문제(*칸 수상은 시민단체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여, 도카이 지진이 발생할 경우 도쿄지역에 치명적인 손상이 예상되는 시즈오카의 하마오카 원전에 대해서 5월6일 동부전력에 가동중지를 요청함)가 나왔을 때, 저는 이미 국회의원을 한 경험과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정부 관저에 이야기하러 갔습니다. 또한 일본의 후생노동성이 발표하는 방사성 식품의 허용기준치가 있는데, 이 기준이 너무 낮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것을 다음 주에 정부부처에 말하러 가고자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구 차원의 요구로 시작해서 국가의 정보 폐쇄성, 정책결정의 폐쇄성이 바뀌는 식으로 진행이 되고 있지요.

저 자신이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장관이고 부서책임자이기에, 다른 자치단체에 비하면 목소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물론 더 용이하게 의사가 관철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구청 차원의 정보공개노력이 국가차원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이고, 언론에서도 많이 주목해주었습니다. 간 나오토 일본수상의 탈(脫)원전 발언도 계속 흔들리고 있지만, 명확히 세타가와 구에서 말하는 탈원전, 에너지 전환 요구가 국가차원에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거 때는 반대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하고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듣고 실천하는 것이 자치단체로서 중요하고 이것이 국가차원의 개혁에도 좋은 계기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전공투 활동, 루쉰을 알게 되면서…

조+이 : 중학교때부터 전공투 투쟁(*60년대말에서 70년대초 일본의 각 대학에서 결성된 학생자치회의 연합체인 전일본학생자치총연합과 학생들의 공투조직으로 결성된 전학공투회의의 약칭. 일본대 전공투, 동경대전공투 등이 유명하며, 대학해체, 권위주의 및 자기부정 등 급진적 주장을 내세우며 물리적 투쟁으로 생활변혁운동을 실시하였다)에 참여 했다고 들었습니다. 구청장님의 삶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중학생 때 코우지마치중학교 전공투(麹町中全共闘)를 결성하여 당시 대학생들의 전공투 운동을 중학교 수준에서 전개한 셈인데요. 기관지 토리데(「砦」;보루)를 발행하기도 했지요. 상당히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했다는 기록을 적은 내신서 문제로 고등학교 면접에서도 실패하고 했고 그것과 관련된 법정투쟁이 대단히 유명했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강의석의 투쟁을 연상하기도 하는데요.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호사카 : 일본의 전공투는 서구사회에서는 스튜던트 파워(학생파워)라고 불리는 학생운동의 고양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특히 전후 평화헌법을 가진 민주사회라고 불렸는데, 베트남 전쟁에 폭탄을 터트리러 가는 B52 폭격기는 일본의 오키나와기지에서 출격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살고 있던 사가미하라(相模原) 지역에서는 매일 미군 병사의 시체가 날라왔으며, 그 시체를 꿰매는 아르바이트가 모집되었습니다. 일본의 평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의 희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시대인식이었습니다.

결국 전후민주주의를 표방해 온 혁신정당이나 진보적 문화인들에게도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인가를 자문하는 시대였습니다. 하니고로(羽仁 五郎、1901-1983,일본의 마르크스주의역사철학자)라는 역사철학자가 있습니다. 도쿄대 전공투와 논쟁을 하기도 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는데,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기쉽게 설명한 [도시의 논리-역사적조건, 현대의투쟁](勁草書房,1968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2학년때 그의 책을 읽었고, 학교가 도쿄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오다마코토(1931년-07년,일본의 작가, 9조회의의 제안자,베헤련운동의 창시자)씨가 제안한 베헤련(*べ平連;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60년대 중반에 결성된 일본의 대표적인 베트남전쟁반전평화운동단체)의 집회에 나가기도 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정치적 의식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니던 학교는 전전부터 도쿄에서 중고등학교의 권위주의적 교육의 중심이자 상징적인 학교였습니다. 당시 교장이 전체 중고등학교 연합회의 회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래서 다른 학교보다도 엄했고요. 세뇌 혹은 설득활동도 많이 진행되는 학교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를 한 것이지요. 거의 수업도 받지 않고, 학교 선생님의 인생관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고 그것을 요구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것이 내신서에 적혀있었고, 고교 진학을 하고자 했을 때, 문제가 되어 고등학교 입학이 거절되었던 것이지요.
▲ 호사카 노부토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희연 교수(좌)

조+이 : 선생님의 이력 중에서, 한국의 독자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사항이 있었습니다. 중퇴 후에, 교육저널리스트가 되어서 '관리교육'을 타파하고자 캠페인을 하고 젊은이와 청년들의 자유공간[청생사](青生舎)를 76년에서 96년까지 운영했고 '학교해방신문'도 발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한국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실험이었는데, 내용을 설명해 주십시오.

호사카 : 70년대 초반 전공투 투쟁이 한창일 때, 도쿄대에서 야스다 강당투쟁(*도쿄대 전공투 및 신좌익학생단체가 학생운동가 처분에 항의하여 68년3월 도쿄대 야스다강당을 점거하고, 이후 69년1월 경찰투입에 의해 진압될 때가지 대학의 관리체계 해체 및 당국과의 교섭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고, 그해 가을에는 사토수상의 방미저지운동(*69년11월16일,미일안보조약개정을 위한 사토수상의 방미를 저지하고자 한 신좌익운동의 투쟁. 전후학생운동의 최대의2500명의 체포자를 유발함)이 있었습니다. 경찰기동대에 의한 대량 체포가 있었고, 운동이 벽에 부딪혔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결국 좌익운동 속에서 극단적인 무장투쟁노선을 불러왔습니다. 72년에 연합적군파(*70년안보투쟁을 계기로 나온 공산주의자동맹의 최좌익그룹인 적군파에서 분리된 분파. 일본국내에서 혁명거점투쟁을 주장했으나, 71년-72년에 걸쳐 산악캠프린치사건 과 아사마산장 인질사건을 주도함. 요동호를 피납해서 북한으로 이동한 요동호 그룹과 팔레스타인에서 해외혁명거점투쟁을 벌인 일본적군파와 구별됨)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명 아사마산장사건(*浅間山荘事件,1972년 2월19일, 연합적군파 요원 5명이 나가노현 아사마산장의 관리인의 부인을 인질로 10일간 전개된 사건)으로 경찰과 총격을 하게 되고 이것이 연일TV로 중계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후 이들이 체포된 후 연합적군파의 산악캠프에서 동료가 린치를 당하고 살인되어 묻혀져 있었고, 이것은 더욱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연합적군산악캠프린치사건: 1971년12월말-2월말, 무장투쟁노선을 표방하여 경찰에 쫓기던 연합적군파는 상황을 돌파하기위해 산악에서 공동군사훈련을 전개하던 중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자아비판을 강요하였고, 집단폭력을 동원한 처벌로 30명중 약12명을 살해한 사건). 이 사건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학생운동을 떠났고, 일부는 기업으로 취직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연합적군파사건, 그들의 폭력 문제, 학생운동 분파들 간의 대립, 학생좌파조직들 간에 서로 조직원들을 죽이는 이른바 우치게바(*내부폭력, 독일어 Gewalt 위력,폭력에서 유래. 일본의 신좌익운동내에서 좌익당파간의 린치 및 테러 등 폭력을 이용한 내부 투쟁의 의미. 기동대 등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은 소토게바(외부폭력)으로도 불림)도 발생했던 시기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학생운동은 악마의 세계라고 하는 인식을 하고, 그렇게 교육을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학생운동에는 가까이 가지도 말라는 식의 교육을 하였습니다. 진보적 교육이 대학 등에서도 사라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모처럼 들어간 정기제 고등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한 상태였고요. 전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읽었던 책이 중국작가 루신이었습니다. 그가 필명으로 썼던 에세이집이 나왔었죠. 짧은 문장이 많았는데, 그는 중국의 격동기 속에서도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지요. 그의 힘도 느껴졌고, 그의 신선함도 있었습니다. 이때 반성적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학생 때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하기도 하고 했는데, 사실은 대학생들의 운동을 흉내내고 있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사회부정을 고쳐내는 근원적 사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시에 사회를 바꾸기에는 너무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토론하고 모여서 모색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루신이 신해혁명 때, 그는 청년때부터 진화론자였는데, 구태의연한 노인세대들이 다 죽고나면 중국사회는 언젠가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인가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를 습격해서 파괴하는 것은 청년들이었죠. 그는 그런 중국사회에 대한 한탄을 했고, 그의 에세이 중에 [청년이 청년을 살육한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시대를 넘어서, 깊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청년이 청년을 서로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 이라는 의미에서 청생사(청년을 살리는 곳)를 만들었습니다.

청생사에 통찰을 준 것은, 독일의 대안교육운동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도 학생운동이 고양된 후, 80년 전후에는 반핵운동이 있었습니다. 빈집점거 투쟁과 대량시설을 자주운영하는 운동도 일어납니다. 이런 그룹 속에는 무정부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탈식민주의자, 원주민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사람, 민족주의적 그룹도 있었지요. 이들은 스페이스를 형성하고 이것을 대안적 공간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일치점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80년대 중반에는 뉴렌베르크의 연극박물관에 코뮨이라는 공간이 있기도 했습니다. 베를린의 여러 건물 안에도 스페이스가 생겼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런 큰 운동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규모는 아주 작았지만, 방 3개짜리 멘션을 빌려서 자유공간을 만들고, 정보공유를 하고 하는 해방공간을 만들려는 시도였지요. 전공투 운동의 흐름이 한편에 있다면,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움직임. 구체적으로 유럽식 대안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운동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 것이지요.

조+이 : 일본 운동을 보게 되면, 우치게바나 무장 폭력투쟁과 같은 극단주의적 경향이 어디서 발원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운동은 최소연대성을 유지하려는 경향, 극단주의가 통제되는 어떤 경향이 있는데…

호사카 : 사실 그런 측면은 일본공산당의 논리에서 기원하는 점이 많습니다. 볼셰비키 사상 속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히면 무엇이던지 정당화되고, 당이 모든 진리를 대변하고, 절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립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이는 것도 정의가 되는 사고가 생겼지요. 그러한 폭력이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사회변혁이 눈에 보이는 시기라면 억제될 수도 있었는데, 72년의 연합적군파 사건 이후에는 벌써 사회풍조 자체가 변화했고,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사회변혁의 큰 힘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 라는, 운동의 축소와 전망의 상실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투쟁은 더욱더 파괴적인 것으로 보였지요.

조+이 : 고등학교 입시에서 강제로 떨어진 후, 10여년이 넘는 법정투쟁이 전개되었고, 그것이 사법시험이나 헌법 교육의 사례가 될 만큼 유명해졌지요. 10여년이 넘는 법정투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호사카 : 제가 당시 18살인데, 14살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저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교원노조 및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지원을 했는데, 그 분들은 불쌍한 소년이 있다는 식이었습니다. 내신서로 진학도 못하게 되었기에, 모두 도와주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즉 전공투 운동의 영향일 수 있겠는데, 어떻게 사회의 지배층에 대항해서, 일본 동경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서, 살아갈 수 있는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자 테마였습니다. 그것은 제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불쌍하다는 식의 시선은 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것이지요.

예상외로 좋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재판이 72년에 시작되어 7년 후인 1979년에 판결이 나왔는데, 그때 거의 모든 신문이 1면에 기사를 실었지요. 그런데 아주 수염이 많고, 머리도 기른 마치 숲 속에서 살았던 사람 같은 인물의 사진이 실려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학생들에게서 약 20-30통의 편지가 왔었습니다. 7-8살 쯤 아래인 어느 학생에게서 편지가 있었는데, 지금의 학교가 숨막힐 것 같고 이지메(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등의 경험이 적혀 있기도 했지요.

재판은 매우 힘들었지만, 아래 세대에게 이러한 영향을 주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재판의 중요성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문제들, 예컨대 이지메 문제,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폭력의 문제라던가 하는 것 등이 사회문제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학생입장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공개화하자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학교해방신문]이라는 것을 창간했습니다.

당시 전공투세대라고 하는 분들 중에는, 출판사에 들어간 선배들이 많았는데, 예능잡지를 만드는 분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AKB48>그룹 등이 소개되는 잡지지요. 당시 중학생이 좋아하는 예능잡지로 묘죠(「明星」)가 있는데, 약 180만부가 팔렸고, 세븐틴이라고 하는 잡지는 약 100만부 팔리는 잡지입니다. 이 두 잡지에 학교 문제를 다루는 연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청소년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였으므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청생사의 공간을 방문해오기도 했습니다.

96년 정계입문, 사민당이 몰락한 까닭은…

조+이 : 당시 사회당은 55년체제 붕괴와 자민당과 사회당 연립정권으로 인해 정계개편의 위기를 겪었던 시점이었습니다. 일종의 시민파들의 정계진출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정치적 진출을 결심하게된 이유는?

호사카 : 당시는 55년 체제가 붕괴(*55년부터 일본자민당과 일본사회당의 양당체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진 정치시스템가 93년 자민당 및 사회당의 참패 및 소수신당의 연립정권으로 붕괴된 정치현상)되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사회당에서는 86년에 도이 다카코가 당수가 되었습니다. 그때 사회당 붐이 있었고, 사회당을 응원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테마가 자민당 패권체제로 상징되는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 그리고 55년 체제로 상징되는 정치적 야합 내지는 타협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움직임 속에서 '시민에 열린 새로운 정당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사회당이 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많은 제안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80년대 중반부터 사회당에 대해서 그러한 제안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도이씨 주변에서는 그런 의견을 수용했는데, 사회당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희들은, 보수패권정당에 의해 독점당하고 있는 사회, 아이들도 그것에 의해 영향받는 상황, 큰 정당의 하나인 사회당은 노조의 영향이 강고해서 정작 시민 전체의 의견을 받아들이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사회당이 분리하거나 없어질 것 같은 위기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민운동과 일본사회당을 연결하고자 하는 키즈나(사회적연대) 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당의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5년 정도의 의원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연립정권(자민당-일본사회당-사키가케당의 연립정부)이었습니다(*96년부터 일본사회당은 민주당합류그룹과 무라야마 당수를 중심으로 한 소수의 일본사민당으로 분열함). 의원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새로운 일들을 했습니다. 엔피오(NPO) 법안을 만들기도 했고요, 국가공무원 윤리법도 제가 제안했습니다. 도청 방지법을 입법화하여 실제 도청을 정지시켰습니다. 국가의 정치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 것을 거대 여당의 국회의원보다도 더 농축된 형태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사회당은 수가 적었지요. 당시 중의원 의장이던 도이도 있고 무라야마 총리도 있었지만, 젊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의원으로는 저와 쯔지모토 키요미의원(60년생,辻元清美,사민당중의원의원, 2011년민주당입당), 나카가와 토모코(中川智子,09년 다카라즈카시장)라는 의원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아주 눈부신 활동을 했고 주목받았지요. 저는 7년간 525번 질문을 한 의원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이 : 그렇게 질문을 독점해도 됩니까(웃음).

호사카 : 일본의 경우, 대신해서 질문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도이수상이나 무라야마 총리를 대신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11년간 법무위원회에 서 주로 활동하였고, 인권문제, 출입국사무소, 난민 문제, 형무소 시설 내에서의 인권 문제, 아동의 학대방지 등 많은 활동을 했지만, 표가 안되는 것만 많이 했습니다.
▲ 호사카 노부토 의원(좌)

조+이 : 일본 사회당의 붕괴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민당 탈당 배경은 무엇입니까. 일본사회당 및 사민당에 대한 평가는.

호사카 : 몇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사민당도 원전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파국적 상황을 예견하고 발언을 한 정당이었습니다. 격차사회 문제, 그 속에서의 비정규직노동자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이른 단계부터 문제제기를 해왔지요. 하지만, 사민당이 일본의 장애 혹은 장벽이라고 하는 말하는 사람들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 많아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에 대한 일본 사회당에 대한 반대여론입니다. 잘 알다시피 일본공산당은 친소련파적 성격이 있어서 북한과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반면, 일본사회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왔습니다(*50년대 중반부터 일본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은 우호관계를 유지해왔으나, 60년대 후반부터관계가 악화되어 70년대부터는 일본사회당과 조선노동당이 교류).

그런데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을 계기로 일본사회가 우익적 분위기가 강화되면서 북한과 우호관계인 일본사회당에 대한 비판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북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도 했었고, 냉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미디어의 비판과 결합된 대중들의 비판적 분위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보수적 미디어의 반북한=반사회당 캠페인이 큰 효과를 발휘하여 국민들속에서 반사회당 분위기를 만드는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감수성을 갖고 출현하는데 이를 결합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2000년 총선거에서 사민당은 약진하여 19명이 당선되었는데, 그 전의 1996년 선거의 참패(4명이 단독후보 당선)에 비하면 15명이나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당선된 사람들은 말하자면, 직업적 정치가들이 아닌 신진들과 여성(10명)도 많았습니다. 이것을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일본 사민당이 적절히 변화를 도모했다면 지금보다 팽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다고 봅니다. 그러나 조직의 형태는 사회당에서부터 낡은 형태였습니다. 바꾸기 어려웠다고 할까. 일본의 정당은 군대식의 조직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사민당이나 사회당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공조직이나 구청조직 같은 성격을 당 조직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형태라고 할 수 있었죠.

당시 우리들이 요구하고 만들고자 했던 것은 시민에 대해 권위가 높지 않은 수평적인 성격을 갖는 조직, 즉 네트워크형 조직이었습니다. 정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정당의 지시대상이 아니라 정당의 동지가 되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때도 조직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 힘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현실적인 역량문제도 있었습니다. 즉 300명 정도의 자민당, 180명 정도의 민주당에 비해서 10여명의 의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민당도 거대정당과 똑 같은 역할을 해야 했었습니다. 작은 대학이 큰 대학과 동일하게 모든 기능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법안심의, 국회대처, 당수 기자회견 등 국회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다 해야 합니다. 결국 10명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계속 국회현안에 대응해야만 했고, 결국 필요한 조직혁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탈원전을 위한 힘을 키우려면…"

조+이 : 1996, 2000, 2005년 중의원 의원을 하고, 2009년 낙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으로 낙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 선거구제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도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유명해졌다는 측면에서 호사카 의원도 유사하다고 누가 이야기하던데…

호사카 : 일본에서는 역시 소선거구제가 문제가 됩니다. 하나의 지역에서 자민당하고 민주당만이 싸움을 하게 되는 구조가 불가피하게 조성됩니다. 사회당이 이기려면 민주당과 협력을 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한국의 진보적 군소정당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 싶군요. 2008년 스기나미구(杉並区)로 옮겼는데, 이시하라 노부데루(이시하라 도지사의 장남) 자민당 간사장 이 있는 구였습니다. 민주당도 마땅한 후보가 없었죠. 고미야마 요코라는 민주당의원이 있었는데, 선거구를 다른 데로 바꾸었고, 민주당이 저를 후원했습니다. 2009년 선거에서 11만 6천 372표 정도를 받았어요. 하지만, 상대편은 3만표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군소정당으로서는 대단한 선전을 한 것인데, 결국 낙선했습니다. 그때 사민당은 동경에서 비례대표를 1명도 선출하지 못했어요. 작년 2010년에는 참의원 선거에도 나갔는데, 6만 3천명을 얻었습니다. 사민당 3명이 뽑혔으면 당선되었을 텐데, 2번까지만 비례대표로서 당선되었습니다. 이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는 4월 6일에 입후보해서 20일에 당선되었습니다. 약15일만에 대역전이 이루어져 주위에서 많이 놀랐습니다.
▲ 호사카 노부토 의원(위)

조+이 : 중앙고위직을 하다가 구청장으로 변신하는 것이 한국에서도 이례적이고 일본에서도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호사카 : 만일 3월 11일 대지진사태와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없었다면 입후보를 하지 안했을 것입니다. 빨리 국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원전사고 직후, 스기나미 구에서 저도 응원했던 민주당 의원이 구청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후쿠시마현 미나미 소바(南相馬市)시의 재해지역을 지원하는 일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국회에도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움직이지가 않았고,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국회의원도 중요하지만, 자치단체에서 성과를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지자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가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잘 한 것 같아요.

조+이 : 한국에서도 때로 작은 대안이 정치적으로 중요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사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이라는 작은 대안(물론 환경론자들은 비판하지만)을 만들어내어 그것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당시 문국현 후보도 유한킴벌리라는 기업을 운영하여 해고를 최소화하고 노동력의 질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노동교대 모델을 만들어 대선후보까지 되었습니다. 구청에서 작은 대안을 만들어 가고, 그것이 더욱 높은 단계로 가는 밑거름이 될 것 같기도 한데.

호사카 : 일본의 정치는 사회당이나 공산당도 있고, 무소속 환경파 의원도 있는데, 아주 세력이 약해요. 특히 혁신파(진보) 의원들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약하죠. 앞으로 진보개혁적인 정치인들이 더욱 확대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세대가 특히 중요해요. 행정은 일순간도 방치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매순간 무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나는 이러한 판단을 반복하면서, 일본사회를 바꾸어나가고자 합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대안적 움직임을 만들고 싶어요. 그 속에서 필요하다면, 희망을 만들어가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면 도쿄도지사를 지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청장을 하면서, 구 체제를 지켜온 보수적인 사람들과도 만나고 있습니다. 먼저는 지지기반을 만들고자 합니다. 개인적 영달이 아니라, 탈원전을 위한 힘을 키워가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원전 중심의 삶의 방식에서 자연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보수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반대하는 의견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더 어려운 과제들도 많아요. 하지만 구청의 정보도 공개하면서,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을 실현하고 싶군요. 그 속에서, 다음 세대의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는 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일본에는 직업정치가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가 많습니다. 마쓰시타 정경학교(*松下政経塾;-마쓰시타 전기산업, 현재의 파나소닉 회사를 창립한 마쓰시타 코우노스케에 의해서 1979년에 설립된 정치학원.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미디어관계자, 대학교수 등 다양한 활동의 인재를 배출하고 있음. 신임 에다노 수상은 이 학원의 제1기 졸업생이다.) 같은 것이 예가 될 겁니다. 또한 기업가들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정치인을 만들기 위한 시도와 학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혁신적이고 대안적인 정치인이 배출되는 학원이나 프로세스는 없어요. 이런 지자체의 경험 속에서 차세대의 혁신적 정치인들도 배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이 : 아무래도 친기업적 정치가가 아니거나 보수적 정치인이 아니면 재정조달이 어려울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386정치인들 중에서 부정한 자금을 받아서 문제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386정치인들 다수가 '삼성장학생'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정치자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요.

호사카 : 정치자금은, 한 사람당 천엔, 삼천엔, 오천엔 단위로 약 3000명이 지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않으면 기부가 늘어납니다. 고맙기도 하고. 그러한 기부에 의해서, 참의원 시절이나 중의원 시절에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특정인이 많은 금액을 내는 것도 없기 때문에 갑자기 돈이 없어지거나 하는 일도 없죠. 이익단체나 압력단체에서 돈을 받는 일은 없습니다. 저의 원칙인데, 그것이 어려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많은 책을 냈었고, 방송에도 나왔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지원을 해 주신 분도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는 더욱 많은 발언을 해서 더욱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도움을 주고 후원해 주시는 분도 늘어났습니다. 1년에 5천엔을 내는 분 1000명을 확보하려고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는 3천만엔 내지 4천만엔이 모아졌습니다. 다액기부도 몰론 있지만, 매우 적어요. 물론 저처럼 다수의 기부자를 확보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닐 겁니다.

조+이 : 일본에는 선거비용을 공적으로 부담하는 '선거공영제' 같은 제도가 없습니까. 한국에서 경기도 교육감이 된 김상곤 교수의 경우, 선거득표율 15%를 넘으면 거의 전액을 국고에서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수들에게 일단 빌려서 선거비용을 충당하고 나중에 갚는 식의 모델도 있었는데.

호사카 : 일본에서는 선거에 따라 다른데, 국회의원은 10%를 넘어야 돌려받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높아서, 새로운 정당이 생기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국회나 의회라는 것은 오랜 역사와 특정한 구조가 있죠. 10년 정도 하게 되니까, 이제서야 운영방식을 대체로 알게 되었다고 느꼈어요. 이런 경험을 쌓은 사람이 새로운 신참 의원을 교육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원은 편한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지방의 영향력 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을 신경쓰게 되죠.

또 한가지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꼭 단절해서 가지는 않고, 연속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예컨대 국회의 관행이나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잘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또한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도의 공간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구조의 틈새를 알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인 국회의원과 구심력 있는 구 정치인과의 상호교류가 꼭 필요합니다.

혁신지자체 시대와 호사카 지자체 시대의 차이점은

조+이 :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정치는 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가 보니까 2번만 나와도 바로 낡은 인물로 인식되는 식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니 연속성이 너무 약합니다. 한때 일본의 '혁신 지자체' (*70년대 중반 반공해운동, 복지정책, 헌법옹호 등을 주장한 일본공산당 및 사회당 소속의 혁신인사들이 지자체의 수장으로 등장한 시)의 거대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구청장을 하고 있는데, 이전의 혁신지자체 실험과 현재 호사카 구청장이 하는 지자체 실험의 차이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호사카 : 이전의 일본의 혁신지자체 실험과는 다릅니다. 당시에는 혁신노조, 문화운동가, 리버럴한 유권자들이 있었어요. 물론 리버럴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변하지 않았죠. 그러나 노조의 영향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변화한 지점입니다. 오히려 노조가 보수적인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때로 노조가 분열을 해서, 예컨대 2번후보의 민주당 소속, 3번후보의 자민소속, 4번후보의 민주당의 다른 계파 후보 등 상이한 후보들을 지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래도 노조운동이 아직은 살아있는 한국과는 다를 겁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개혁적인 무소속은 더욱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달리,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또한 그것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죠. 개인적으로는, 구청장이 된 이후에, 내가 아닌 상대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포섭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앞으로 가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민당이나 보수세력들이, 호사카 구청장으로 계속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물론 그래서 오히려 위험하지 않는가라며 반대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죠. 그렇다고 대결적인 자세를 하고 있지는 않아요. 구 세력과 대결축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너무 지나쳤던 정책은 양보하기도 하고, 대형 도시개발을 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실시하지 않았던 정책에 대해서는, 가속패달을 밟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를 많이 해야합니다. 구청직원들과도 될 수 있으면 대화를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 제가 대화를 중요시 하게 되었는가 하면, 너무 소수정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었을 때, 10명 정도밖에 안되었기에, 400명을 대상으로 그래도 만들고자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 때문에, 설득에 설득을 하는 노력을 해 왔던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 호사카 노부토 의원

"한국, 3.11 사태를 아직도 자기 문제로 인식 못해"

조+이 : 2011년 6월 한국 지자체 선거에서 여러 진보개혁적 정당들과 시민사회운동이 연합해서 일종의 '지역연립정부' 같은 형태로 당선된 사례가 많습니다. 서울 외곽의 일산 같은 경우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고 있죠. 그런데 '치적'이라는 점에서 대형개발사업이 중요한데, 그러한 것을 거부하는 진보개혁적 지자체장은 '치적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호사카 : 이 문제는 일본과 한국이 좀 상황이 다른 것 같군요. 일본은, 특히 동경은 대형공공사업을 할 수 있는 남아있는 공간이 거의 없으므로, 대형개발사업이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대형개발을 하는 경우 그것은 곧 사회적 쟁점이 됩니다. 그 이유는 대형개발사업의 경우, 이해관계자들만이 정보를 독점하고, 당사자인 주민들에게는 정작 아무 설명도 없이 비밀리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민들이나 운동단체들이 대형개발사업은 제발 그만두라는 요구를 하죠.

우리 구역 내에서도 현재 대형개발사업이 몇 개 있는데, 오히려 궤도수정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대형개발사업을 재조정하고 중지시키는 것이 오히려 평가를 받습니다. 큰 박물관 같은 것을 지으려고 하면 오히려 비판을 받죠.

조+이 : 그런 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주민들의 대형개발에 대한 태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는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개발주의에 빠져 있으므로, 대형사업이 지차제장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개발업자 등 기득권 층이 주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칸 나오토 내각은 거의 궁지에 몰려가고 있고 내각의 붕괴는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 일본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정계개편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일본 정치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전망은 어떠합니까.

호사카 : 3・11 원전사태 이후 여러가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국가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도 제기되고 있어요. 특히 원전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상태에서 전력회사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위험한 선택이 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일본의 재계에서도 주류 기업들은 원전을 계속 추진하고 있지만,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관광객도 줄어들었고, 일본의 이미지도 붕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국민들이 광범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정한 변화의 기운이 있습니다.

사실 제2의 원전사고가 다시 나게되면 일본은 거의 회복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일본의 상황은 세계를 새롭게 바꿀 수 있는 대표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원전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및 사회의 재구축이 가능하고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에서 자민당과 민주당의 정책적 구별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민당은 현재 사회의 변화를 추동할 힘이 없습니다. 민주당도 리버럴한 유권자의 선택에 부응해서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있죠. 원전사태를 계기로 국민의 생명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환경을 가장 중요한 정책 우선과제로 세우는 변화를 추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 구조 자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사실 일본의 정당들은 군대 조직 같은 정당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이를 부수지 않으면, 재생이 안 될 겁니다. 현상유지만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자민당-민주당 구조로는 일본사회를 바꿀 수 없어요.

조+이 : 3.11 이후 일본사회는 크게 변하고 있다. 3.11이 일본지역사회에 미친 영향과 향후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호사카 : 55년 체제의 당시와 같이 상이한 여러 정당이 있지만 깃발만 다른 식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필요한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정당인지 정치가인지가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본 국회에서 나오는 여러 소식들은 피해지역의 현황 및 지역 주민들의 의식과도 너무나 갭이 많아요. 각 정당의 국회의원들의 의견은 현재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죠.

3.11 사태 이전에 사람들은 원전에 의존하려고 했어요. 자연에너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두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세타가야 구에도 현재 후쿠시마의 원전 피난민들이 많이 와 있습니다. 현재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있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안전을 확보해주고, 새로운 에너지에 대한 지혜를 어떻게 모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탈원전의 정책이념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도 현재는 받아들여지기 좋은 환경이 되고 있습니다. 보수라는 것은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식의 현상유지파적인 기본사고인데, 지금 이대로 가면 지금 이 상태가 유지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상황이 되었어요. 변화하지 않으면, 현상이 유지되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변화를 조직해낼 수 있는 좋은 조건입니다.

일본의 모순중의 하나는, 국가에 맡기면 좋다 혹은 국가에 맡기고 있으면 잘 되겠지하는 식의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식의 사고에 거대한 변화를 요구받고 있죠. 국가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탈원전과 관련된 새로운 인식이, 환경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까지 지킨다고 하는 상당히 깊은 수준의 의식으로 침투하여 변화를 촉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전을 확장하려는 정치가는 당선이 어려워지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국민들의 의식변화가 여론조사에서는 나오나, 탈원전의 흐름을 보수적 미디어가 축소시키고, 일부 정치인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가짜 탈원전 의원도 늘어나고 있어요. 자민당도 탈원전 정책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시민파나 환경파들은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사전에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선거에서 보수패권세력에 지금까지 매번 진 것입니다. 변화를 조직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안적인 미디어전략도 필요합니다. 쟁점을 만들고 계속 논쟁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조+이 : 3.11 사태를 일본 국가와 사회 개혁의 계기로 삼으려는 비전에 대해서 인상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자민당 패권체제로 회귀하지 않고, 일부 정치인들의 위장 탈원전 담론전략도 극복하여, 민주당을 넘는 개혁의 시대를 여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일연대에 대한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한일시민정치가들의 연대에 대한 경험이나 느낌은 어떻습니까.

호사카 : 한국에서 매번 오는 정보를 들으면, 역동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이나믹한 정치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386세대들을 포함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의 역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사회운동이 정체하고 있던 시기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역동적이고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고, 더욱 높은 수준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일본의 원전사태에 대해서는 아직 자기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달리 말하면 일본 재앙의 교훈을 한국사회가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3.11 이후의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후쿠시마 사고도 그렇지만, 한국과 가까운 쿠슈 원전이라던가, 동해에 있는 원전에서 사고가 나면, 바로 한국에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한국에서 원전 사고가 나면 일본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최근에 중국 신간센이 큰 사고를 일으켰는데, 중국의 급부상 속에서 중국의 원전 문제도 심각한 과제입니다.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멀리 있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탈워전 관심이 많아진 것을 보면 역설적입니다. 이제 국경 없이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해요.

한국의 원전 문제에 대해서 재검토가 있어야 합니다. 원전 핵폐기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중요한 공통의 문제이죠. 각 사회의 내부사황이 다르겠지만, 일본에서 이 정도 문제가 발생한 것을 무의미하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아주 솔직한 의견교환 및 관심 그리고 공동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조+이 :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이명박 정부는 일본 원전사고를 호기로 삼아, 한국이 최대 원전수출국이 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좋은 조언으로 들립니다. 나아가 일본 원전 사태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시민사회가 탈원전을 향한 더욱 강력한 연대와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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