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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술 지옥' 박 씨 "날 살린 병원을 없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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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35년 '술 지옥' 박 씨 "날 살린 병원을 없앤다니…"

알코올 중독 전문 '카프 병원', 제2의 진주의료원 사태?

17세 때부터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주사'가 조금 있는 줄만 알았다. 술에 취해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많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24년 전 '알코올 중독' 진단을 받았다.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중독 진단을 받고도 17년을 더 술에 빠져 지냈다. 그렇게 마셔댄 세월이 35년이었다.

국내에서 유일한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인 카프 병원(KARF,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서 치료받았던 박창범(가명·61) 씨 이야기다. 4월 30일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카프 병원에서 만난 박 씨는 환자가 아니라 병원 직원이 돼 있었다. 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 지 2년째, 병원이 직영하는 1층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한 지 1년째다.

박 씨에게 35년 만에 새 삶을 찾아준 카프 병원이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미 지난 2월 여성 병동이 폐쇄됐다. 5월부터는 대기표를 받은 신규 남성 환자 또한 받지 않기로 했다. 박 씨는 "5월에 남성 병동마저 사라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어떤 땐 눈물밖에 안 나요. 치료 초기에 있는 사람들, 중독자들의 그 고통을 알기에 더 눈물이 나요. 여기는 일산의 카프 병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카프 병원이거든요. 이런 병원이 대한민국에 둘만 있어도 좋겠는데, 하나 있는 것도 없앤다니…."

▲ 카프 병원 1층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박창범(가명) 씨 ⓒ프레시안(김윤나영)

국내 유일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재활·예방·연구 병원

박 씨는 "술을 너무 끊고 싶어서" 17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들어가 사지가 묶인 채로 생활해 봤지만, 돌아서면 술을 마셨다. 기도원, 병원에 다녀 봐도 소용없었다. 금단 현상이 문제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하고 우울하고 초조했다. 아들마저 술에 빠져 살자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카프 병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35년 만에 새 삶을 찾았다.

카프 병원은 치료, 재활, 예방, 연구를 하는 유일한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이다. 박 씨는 "치료를 체계적으로 해야지,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혼자만의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카프 병원에는 2-3년에 걸친 재활 예방, 동기 강화, 인지 행동, 분노 관리, 예술 치료, 직업 재활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박 씨는 1년간의 치료 끝에 2006년부터 카프 병원에서 사회복지사, 음악치료사, 노인 상담 지도, 중독 전문가 자격증을 땄다. 가장 최근에 딴 자격증이 바리스타 자격증이다. 지금은 술을 끊은 지 8년째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할 때마다 마음 졸였던 아내와도 "환갑에 신혼부부처럼 산다"고 했다. 재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카프 병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1년 동안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세미나를 했어요. 카프 병원에서 저를 사회복지사, 중독 치료사로 불러서 다시 왔는데, 너무 기뻐서 병원 옥상에서 춤을 췄어요. 생각해 보세요. 병원에서 치료받던 놈이 직원으로 왔으니 기적 아니에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술을 끊은 지 6-7년 됐는데, 작년 봄에 폐암 진단을 받고 2주 뒤에 사망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카프 병원 바로 옆에 있는) 일산 병원에 입원하면서 저한테 '내가 왜 이곳에 입원했는지 아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마음 안다고 했어요. 우리는 힘들 때 카프 병원 건물만 봐도 위안이 되거든요. 그 친구 죽었을 때 무지하게 울었어요."

정철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본부 한국음주문화센터분회 분회장은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퇴직 이후 하루에 소주 한 잔씩을 반주로 삼다가 중독돼 카프 병원에 온 경우도 있다"며 "중독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병원이 전부 폐쇄 병동으로 운영되는 것과는 달리, 카프 병원은 감금 등 인권 문제 없이 환자들이 자유롭게 입·퇴원하는 유일한 성공 사례"라며 "이 때문에 병원에 대한 환자들의 애착이 강하다"고 말했다.

▲ 카프 병원 전경 ⓒ프레시안(김윤나영)

"주류업계와 국세청 퇴직 관료가 병원 매각 추진"

카프 재단이 설립된 때는 지난 2000년이다. 당시 국회는 담배와 마찬가지로 주류에도 '국민 건강 증진 기금'을 부과하려는 법안을 내놓았다. 이에 반발한 한국주류산업협회 소속 29개 주류업체는 자발적으로 200억 원을 조성해 카프 재단을 설립했다. 주류업계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매년 병원 운영비 50억 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보건복지부에 제출했다. 그 결과 2004년 '공익 병원'인 카프 병원이 개원했다. 세금과 바꾼 공익 병원을 만든 셈이다.

알코올 중독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2011년 정신보건사업 안내 자료집'을 보면, 2006년 기준 18-64세 알코올 사용 장애 인구는 전 인구의 5.6%인 179만 명으로 추산된다. 알코올 관련 사망자 수는 2006년 4491명에서 2008년 4643명으로 늘어났다.

건강보험공단이 알코올 중독 환자에게 지출한 부담금도 2006년 1705억 원에서 2010년 2697억 원으로 늘었다. 보건복지부가 2009년 내놓은 연구 용역 보고서를 보면, 음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은 2000년 14조9352억 원에서 2009년 23조4430억 원으로 10년간 8조 원 넘게 증가했다. 주류업계의 '사회적 책임론'이 힘을 받는 이유다.

카프 병원은 개원 이후 10만 명이 넘는 외래 환자를 치료해 왔다. 입소문을 타면서 대기 환자들도 몰려들었다. 2011년 기준으로 카프 병원을 찾는 외래 환자는 하루 평균 18.1명, 입원 환자는 71.1명이었다.

그러나 카프 병원은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거렸다. 이사장과 국세청 퇴직 관료 출신인 사무총장이 번번이 병원 매각을 시도했다. 초대 이사장이던 국세청 출신 성희웅 전 이사장은 취임 6개월 만에 병원 수지를 이유로 매각을 추진했다. 2008년 국세청 출신인 김남문 전 이사장도 병원 건물을 몰래 매각하려다 직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매각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자, 주류협회는 2011년부터 50억 원 지원을 중단했다. 남은 의사와 직원 70여 명은 3개월째 임금을 못 받고 있다.

▲ 카프 병원 외부에 붙은 현수막 ⓒ프레시안(김윤나영)

주류협회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병원 매각 사유는 예방 기능 강화다. 임완혁 주류협회 총무팀장은 "치료 사업보다는 예방 강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수익이 나지 않아서 그런(예산 지원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재단이 너무 병원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예방 기능이 축소됐다"며 "치료 사업 중단 등 경영 정상화 조치가 취해지면 다시 (50억 원) 출연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조는 "병원 매각의 속내는 국세청 퇴직 관료가 장악한 주류협회가 공익사업을 벌일 의지가 없고, 재단을 사실상 해체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예방, 치료, 재활, 연구 가운데 핵심인 치료와 재활 기능을 없애는 것은 사실상 재단 해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철 분회장은 "병원을 운영하면 감독관청이 보건복지부가 되고, 돈을 쓰려면 보건복지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국세청과 주류업계가 복지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원금을 쓰고 싶어서 병원(치료, 재활 기능)을 없애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7년에는 국세청의 묵인 하에 병원 출연금 50억 원을 카프 병원에서 '주류연구원'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국세청은 주류업체 면허권을 발급하고 생산량을 결정하는 등 주류 산업에 폭넓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국세청 관료들이 퇴직 후 주류업계로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조정식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주류산업 회장은 5대부터 지금까지 7명이 국세청 출신이다. 카프 병원의 1-4대 이사장 4명, 1-5대 사무총장 5명, 1-4대 감사 4명도 국세청 퇴직 관료 출신이었다.

정 분회장은 "홍준표 도지사가 수익성 논리로 공공 병원인 진주의료원의 폐업을 발표했듯이, 국세청과 주류업계가 공익 재단이 운영하는 카프 병원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울면서 나간 '여성 병동'의 마지막 수업

정철 분회장은 텅 빈 여성 병동을 가리키며 "2월 말에 치료진과 여성 병동 환자들이 마지막 수업을 했는데, 다들 '나가면 다시 중독된다'고 울면서 퇴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정에 알코올 중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가정 전체가 파탄 난다"며 "알코올 중독자 한 명을 살리면 가족 3, 4명을 살리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정 분회장은 "병원 1층 카페도 외주를 주면 1억 원 이상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직업 재활의 일환으로 환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며 "공공 병원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환자를 위한 공익적 치료를 충실히 해왔고, 알코올 중독자가 완치해서 나가는 걸 보는 보람 하나로 7년을 싸웠다"고 말했다. 박 씨 또한 "유일한 알코올 전문 병원이 사라지면 10년간 축적된 노하우도 사라진다"고 우려했다.

"세계보건기구도 종합적인 알코올 중독 센터를 만드는 추세인데, 왜 있는 걸 없애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것도 주류협회에서 없앤다니 더 그렇죠. 제가 술을 끊은 지 8년이나 지났는데, 아내는 아직도 제가 혹시 전화를 안 받으면 술을 마실까봐 마음을 졸인대요. 이사님한테 소리를 지른 적이 있어요. '이사님 아내, 자식, 부모가 알코올 중독일 때 이사님이 받을 고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라고요."

▲ 현재 폐쇄된 카프 병원 여자 병동 수업 교실. 이곳에서 마지막 수업이 이뤄졌다. ⓒ프레시안(김윤나영)

"알코올 중독 치료, 공공 의료 사업으로 전환하고 정부가 감독해야"

박용덕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지난달 18일 국회 토론회에서 "알코올 정책과 사업 모델은 공공적 개입이 절실하고 민간 의료 기관에만 맡기기 어렵다"며 "주류업계가 낸 세금 또는 사회 보장 기여금을 알코올 문제의 공공 재정으로 사용해서 카프 병원의 치료·재활 서비스를 필수 공공 의료 서비스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사무국장은 특히 "주류협회는 보건복지부에 매년 사회적 책임 비용 50억 원을 부담하겠다는 각서를 제출했으므로, 이에 대한 이행을 복지부가 강제해야 한다"며 "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하기 전까지는 주류협회의 자의적 판단으로 기금을 전용하거나 기금 지급을 유예하지 못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프 병원의 이사회 구성에 대해서 그는 "운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주류협회와 국세청 퇴직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 의사 결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며 "시민 참여가 가능한 투명하고 개방된 공익적 이사회로 구성하도록 재설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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