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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쟁세력은 매국세력이다

[협동조합이 대안이다]<6>협동 평화야말로 애국!

남북 전쟁세력의 아주 오래된 적대적 공존

전쟁은 파괴와 매국의 길이다. 협동과 상부상조의 평화는 애국의 길이다. 우리는 총칼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쟁과 경쟁이 아닌 협동과 평화의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나라를 일본과 미국에 팔아넘기는 남북 전쟁세력의 마수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5조는 대한민국 국군이 침략전쟁을 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국토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①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그런데 1948년 남북 분단과 그에 뒤이은 한국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남과 북의 전쟁세력들은 오직 전쟁과 경쟁, 대결만이 애국이라고 소리 높여 외쳐왔다. 다른 일체의 평화와 화해협력은 반역과 매국의 주장으로 언급조차 할 수 없도록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 이승만이 1959년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으로 뒤집어씌워 사형시킨 것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물론 미국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북 대결과 전쟁상태를 유지시키며 한반도를 통제하고 있는 국가 또한 미국이다. 주권국가의 작전권을 다른 나라 군대가 갖고 있다면 이는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권은 무려 60년 넘게 미군이 갖고 있다.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 군산복합체의 전쟁국가이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고 남침을 단행한 북한 또한 사실은 미국과의 적대적 공존을 선택한 전쟁세력이긴 마찬가지이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은 이런 전쟁상태 속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만 저지른 게 아니다. 이들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남북한 인민들을 일제 36년의 거의 두 배나 되는 기간 동안 극단의 반공과 반미 정신병동에 철저하게 가두어 놓은 채 인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매국 기생충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적대하면서 공존하는 '누런 히틀러'들이었다. 남의 권력자들은 민주주의를 외치고 상부상조와 화해협력,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거꾸로 종북 좌익세력으로 탄압하고 죽이던 살인마들이었다. 북의 권력자 또한 정적을 송아지도 웃을 '미제의 스파이'로 뒤집어씌워 죽이는 냉혹한 살인마이긴 마찬가지였다.

▲ 국가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종신 집권을 노린 10월 유신이 단행되었다. ⓒ보도사진연감

박정희는 1972년 국회를 해산하고 영구 총통제를 도입하는 등 불법 친위 쿠데타인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북한의 김일성에게 사전에 2번이나 미리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2009년 우드로 윌슨 센타의 동유럽 국가 북한 관련 외교문서 공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북한의 김일성 또한 2개월 뒤인 12월, 북한 헌법을 개정해 수령론의 주체사상을 명문화하고 주석제를 도입, 국가 주석에 오른다. 사실 1972년 남북한 인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평양방문과 북한 부수상 김성철의 서울 방문, 그리고 그에 뒤이은 7.4 남북공동성명의 화해협력이란 남북 권력자들끼리의 화해협력과 야합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남과 북에는 동시에 절대왕정보다도 더 포악한 극도의 파시스트 독재 체제인 유신체제와 주체왕조 체재가 들어서고 말았다.

전쟁이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까

따라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은 이런 오래된 남북 간의 적대적 공존 체제를 깨고 남북 간 화해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화와 평화협력의 흐름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거에 전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북은 또다시 이전의 적대 관계로 돌아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남북한 협동과 평화 세력의 미약함을 반증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남북 대결정책을 벌이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걸핏하면 전쟁 불사를 외치는 전쟁세력들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지킬 보(保) 지킬 수(守), 그런 보수 세력이 전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과 북 모두 수많은 무고한 인민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는다. 무기 팔아먹는 미국과 일본만 쌍수를 들어 환영할 따름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 환호하는 것은 미사일 방어체제(MD)를 추진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금융 마피아들, 그리고 남한의 전쟁세력들이다. 휴전선과 북방한계선, 동해안에서 남북 간에 국지전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모든 국내 정치는 사라지고 만다.

남북 모두 남북 간의 적대행위와 긴장을 파시즘 체제의 강화와 정권 연장의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이용해왔음을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한의 중요한 선거 직전에는 늘 간첩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늘 북한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각종의 도발 사건이 일어났다. 1997년 선거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이른바 '총풍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때문에 틈만 나면 평양에 탱크로 진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전쟁광들은 애국자가 아니라 애국을 빙자한 매국노들이다. 그런 전쟁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그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인가.

1994년 5월 18일 이른바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은 펜타곤에서 제2차 한국전쟁 모의실험을 했다. 작전계획 5027에 의거하여 미군 57만 명, 전함 200척, 항공기 1200기에 5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하여 미군 전투력의 거의 절반을 투입한다는 가정 아래 치른 면밀한 시뮬레이션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개전 뒤 최초 90일간 미군의 사상자 수는 5만2000명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북폭 개시 이후 사이공 함락까지 10년 동안 미군이 입은 피해와 맞먹었다. 한국군 사상자는 전군의 80%를 넘는 49만 명이나 되었고, 서울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무려 100만으로 나왔다.

더욱 큰 문제는 남한 21기, 일본 54기의 핵발전소였다. 만약 이 가운데 한두 개 핵발전소라도 폭격으로 파괴될 때 전쟁의 참화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었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북폭 계획을 중단하고 전쟁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선택지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세력은 매국노들이다

이처럼 한국의 전쟁세력이란 이미 오래전부터 재산과 자식들을 외국에 도피시켜 놓은 채 수많은 동포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럴듯하게 보수를 내걸지만 실상 그 정체는 무책임한 매국노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수도 서울을 사수하고 있다고 거짓방송을 하고는 한강 다리를 폭파해 수많은 서울 시민들을 죽인 자들, 부산항에 도망갈 배를 마련해놓은 채 부산과 가까운 일본의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세우겠다는 의사를 일본정부에 전달한 뒤 오직 미국에만 매달리던 자들이 다름 아닌 이승만과 남한 단독정부 관리들이었다. 미국은 이미 사모아에 30만 명의 한국인들을 이주시켜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전시작전권 환수에 대해 맨 선두에 서서 반대한 유재흥의 예는 전쟁세력의 실체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일본군 장교의 아들인 유재흥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대위로 해방을 맞이했다. 그리고는 제주도 전투사령관으로서 제주 4.3 학살을 지휘한 주범으로 활약했다.

▲ 유재흥 장군
한국전쟁 초기 유재흥은 7사단장으로서 군대의 기본인 경계를 소홀히 해 7사단 자체가 해체되고 말았다. 지휘관이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부대 자체가 해체되면 사실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면 할복자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유재흥은 오히려 2군단장으로 승진했고, 결국 1950년 말 중공군의 공격 당시 터키여단이 질서있는 후퇴로 병력과 장비 손실을 최소한도로 줄이는 데 성공했음에도 유재흥의 2군단은 그야말로 궤멸돼 2군단 자체가 해체되고 말았다.

유재흥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시 3군단장이 되었고 전 세계 각종 전쟁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현리 전투'의 패배로 3군단 자체를 또 해체시키고 말았다. 당시 3군단은 미군의 제공권 장악과 화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술의 실패로 중공군에 포위되고 말았고, 군단장인 유재흥은 자신의 군단을 버리고 연락기를 타고 탈출해 버렸다. 지휘관이 허겁지겁 도망가자 나머지 지휘부와 병사들이 그야말로 미군 전사의 기록대로 "군기 빠진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3군단 병력의 30%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무기 부족에 허덕이던 중공군에게 군단 화력의 70% 가까이 넘겨줘 중공군 무기 공급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같은 시기에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이었던 영연방 27여 단이 가평 전투에서 포위된 상태였음에도 제공권 장악에 따른 항공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것과 너무나 극명하게 비교가 된다.

오늘날 한국군에는 7사단도 2군단, 3군단도 없다. 유재흥의 빛나는 활약 덕분이다.

바로 이 '현리 전투'의 패배와 3군단 해체를 빌미로 미군은 한국군은 군사작전 능력이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자신들이 직접 유재흥의 보직해임을 결정하고 곧바로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자신들이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후 어찌 된 셈인지 유재흥은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려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한다. 참고로 휴전회담이 진행될 때 한국군 옵서버로 참관한 게 유재흥이었는데, 이 자는 한국군 통역장교가 반드시 일본어로 통역을 해야만 회담내용을 이해했다고 한다.(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이런 유재흥이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에 앞장서고 미국이 계속 전시작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한국의 전쟁세력 실체인 것이다. 참으로 이들이 대한민국 국민인지조차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장기독재도 김일성이 만들었다!

사실 정치권력을 읽고 막 사라지기 직전의 이승만을 되살려 장기집권의 독재자로 만들어주고 남한 인민들을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25일 전인 1950년 5월 30일, 남한에서는 제2대 총선거가 치러졌다. 투표율 91.9%에 평균 경쟁률이 역대 선거 중 가장 높은 10.5대 1에 이를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인민들의 선거 참여는 뜨거웠다. 그만큼 분단 고착화의 주범이자 친일파 일색인 이승만 정권에 대해 인민들의 불신과 심판 의지는 확고했다.

총선 결과 전체 의원 210명 가운데 여당인 대한국민당은 겨우 24명이 당선되는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대신 남북협상파와 중간파가 대거 무소속으로 출마해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의 60%인 126명이나 되는 기염을 토했다. 제헌의원의 재선율은 불과 15.5%로 31명에 불과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의 남한 총선거는 이승만과 친일파 정당 한민당을 제외하고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거의 모든 세력이 대거 선거에 불참했고, 또 선거 자체도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극도의 공포정치 아래 치러진 부정선거였다. 유엔 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는 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선제였다. 이로써 이승만은 사실상의 식물 대통령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곧 제2대 국회가 개원되면 이승만이 아닌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설 판이었다.

▲ 임시정부 한국환영대회에 나란히 참석한 김구선생과 이승만박사가 귀엣말을 나누고 있다. (1945.12.1) ⓒ<대한민국50년> 한국사진기자회

그런데 이렇게 정치생명이 끝난 이승만을 구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었고 김일성이었다. 국회 개원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전쟁 상황에서 임기가 끝났음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던 이승만은 이후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뒤 그 유명한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다음, 온갖 탈법 불법을 동원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고 말았다.

김구, 김구식과 여운형 등은 남북 간의 전쟁을 막고 신생 조선을 통일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쳤다. 이들 애국자들의 주장은 단순한 것이었다.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죽는 것은 일반 인민들이고, 이득을 보는 자들은 남북의 매국노들과 미국, 일본을 비롯한 미소 외세들뿐이라는 것이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38선을 넘으면서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다시 읽어보면 그 정확한 전쟁 예측과 그리고 그 전쟁을 막고자 하는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김구가 개탄하는 그런 현실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제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써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흑왈 남정, 흑왈 북벌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 줄 알았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평화세력이 애국 세력이다

남북한 전쟁세력들은 남북한의 마을공동체를 남김 없이 파괴하고 남북한을 사막사회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경쟁과 전쟁의 노예로, 모래알 같은 돈의 노예로, 북한 인민들은 사회주의마저 내팽개친 주체 왕조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같은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다. 경쟁과 전쟁을 땅속 깊이 묻어버림과 동시에 평화와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남북한 평화체제와 민주주의 정착, 국가주의 극복, 자치공동체의 형성이란 과제는 사실 분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남북의 군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키지 못하면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는 전혀 불가능하다.

분단문제의 해결과 전쟁세력의 붕괴는 무엇보다도 밑에서부터 자립자치의 공동체와 협동경제를 뿌리내리는 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풀뿌리 지역에서부터 협동사회경제의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자라날 때 비로소 평화와 민주주의의 튼튼한 주춧돌이 세워지고 시멘트로 뒤덮인 전쟁세력의 낡은 벽은 허물어지게 된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전쟁의 경제이다. 사회주의 또한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전쟁경제로 치닫고 말았다. 그러나 협동경제는 철저하게 협동과 평화의 경제이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조합원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지역공동체를 복원하고 인민주권을 다시 탈환하는,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한 민주주의의 흔들리지 않는 뿌리이다.

언제까지 인민들이 가진 주권인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몇몇 소수의 유명인에게 위임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위임 민주주의를 계속할 수는 없다.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의 세상인 관료독재 체제를 바라만 보면서 4, 5년마다 한 번씩 에이 찍어줄 놈 하나 없어 하면서 자신의 소중한 주권을 내팽개치는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결국 인민들 스스로 주권을 직접 행사하는 지방자치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 가장 빠른 전쟁세력 붕괴의 길이다.

협동조합은 이제 보수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같은 낡고 철 지난 구도를 확 뛰어넘는 새로운 대안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살벌한 경쟁의 강요를 과감히 부수고 더불어 함께 서로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희망의 촛불들이다.

애국이란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코 전쟁이 아니다. 진정한 애국은 협동과 평화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 경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협동사회경제, 협동조합이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는 2010년 2월 12개 지역공제조합이 모여 출범하였으며, 2009년부터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0년 2010년 12월 5일, 고 리영희 선생님장례식을 주관하면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바가지와 덤터기, 폭리와 리베이트로 복마전이 되어버린 상조회사주식회사 영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대체하는 직거래 공동구매의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전국에 걸쳐 16개 지역공제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조만간 장례산업과 비슷한 구조의 예식산업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바꾸어 혼인계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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