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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X파일은 19금,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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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X파일은 19금,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결"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8>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30일 동안의 단식으로 인해 중학교 때 입었던 모시옷이 넉넉하게 맞을 정도로 홀쭉해져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동그란 호빵맨 얼굴이 뾰족한 V라인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극한적인 상황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 때문일까. 삼성X파일, 선거제도 개혁, 진보신당과 민노당 통합 등 여러 사안들에 대한 그의 입장은 홀쭉해져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탄탄하고 튼튼해져 있었다.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면 노 고문의 피선거권은 박탈 돼 내년 총선에 출마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에 대한 심적 부담이 매우 클 것 같다는 질문에 "삼성X파일 사건은 한국 사회의 최대 강자에게 국회마저도 사실상 유린, 농락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재벌의 돈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력인 대선 후보에게 전달하는 것을 모의하는 것인데 이것이 공적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결이다. 아이들에게 사회의 혐오감을 갖게 만드는 반사회적 판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헌법재판소에도 헌법소원을 내었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한 가지만은 내가 장담한다. 내년 4월 총선에 나는 100% 출마할 것이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꼭 지킬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19금 판결을 무책임하게, 비양심적으로 남발하는 이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호빵맨이 외로운 싸움을 하지만 씩씩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싸움만으로도 바쁠 그가 선거제도개혁의 전도사가 되겠다고 나섰다. 왜일까.


"부산 시민 중 54%만 한나라당을 찍고 있는데 왜 부산 국회의원 의석의 94%를 한나라당이 점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전비례대표제로 바뀌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찍은 것만큼 그에 비례해서 의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골치 아픈 후보 단일화 같은 과정은 없어도 된다. 정책이 비슷한 정당끼리 정책공조 및 연대를 하면 된다. 그리고 진보세력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또 집권하는 것이 선거제도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내년 선거에서 정책 공조를 하게 된다면 가장 핵심적인 합의 사항, 그 첫 번째로 선거제도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들이 약속을 하고 정책 공조를 해서 대통령이 당선 후 1년 안에 선거제도를 개혁하겠다고 공헌하면 국민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 본다.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개혁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진보세력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다른 부분의 양보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진보신당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통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으로 따지면 진보신당은 얼마든지 계속 갈 수 있고, 버티는 것뿐만이 아닌 유의미한 존재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그냥 유의미한 존재로 만들어진 정당이라기보다는 집권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진보의 큰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집권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 어쩌면 이 대답 안에 그가 말하고 싶었던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통합해야 할 이유와 선거제도개혁을 해야 할 이유가 다 담겨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는 금기를 타파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노동문제도 그 금기 중 하나이다. 더 이상의 금기와 성역이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보일 수 있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리더십은 시대에 도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십이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라는 것이 버스처럼 기다리면 오는 것이 아니다. 대선 정류소에서 이미지를 관리하며 기다리는 리더십이 아닌 과감한 도전과 시도를 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늘 시대를 앞서보고 미래를 희망해왔던 것일까?

"87년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나는 믿지를 못했다. 내 평생에 못 볼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내 생애는 그런 날이 안 올 줄 알았다. 87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역사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이 되었다"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어머니에게 받은 그 첫 선물을 그의 생애에는 결코 보지 못할 것 같은 것에 걸었던 청년 노회찬이 참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 배웠던 역사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모두가 성역이라고 여기는 수많은 문제들에 명랑하게, 통쾌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덤벼주는 2011년의 노회찬이 참 고마웠다. 자유는 정말이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하지만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처럼 생명력 있고 질겨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힘을 주는 그 무엇인가 보다.

▲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다. 관련하여 30일 동안 단식을 하셨는데, 현재 건강은 어떠한지? 어떤 마음으로 30일 단식을 버틸 수 있었는지?

단식을 여러 번 해 봤다. 그런데 한여름 노상에서 30일 단식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을 강제로 굶기면 나흘만 지나도 못 참는다. 그런데 스스로 판단해서 굶는 것은 또 다른 것 같다. 단식과 같은 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권하고 싶지도 않다. 수단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나 같은 경우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문제의 절박성 때문에 더는 늦출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산까지 내려가서 최루탄을 맞고 시위를 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다. 단식을 시작할 때 바다에 돌 하나 던지는 심정으로 시작한다는 말을 했었다. 파도를 막는 방파제도 바다에 던진 돌이 쌓여서 방파제가 이루어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단식을 시작했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채 단식을 중단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단식하는 과정에서 교섭은 재개되고 조남호 회장도 청문회를 하게 되는 일정한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단식을 끝낸 후에도 장기 단식이어서 바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퇴원해서 36일 만에 집에 들어갔다. 누가 트위터에서 내가 36일 만에 집에 들어간다고 하니 집에서 안 쫓겨났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들어가 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웃음).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힘들기는 하였지만, 쓰러질지언정 스스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인연이 참 묘하다. 재작년 12월부터 조남호 회장이 정리해고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작년 1월에 김진숙 위원이 단식에 들어갔는데 당시 단식 24일째 되는 날 김진숙 위원이 단식을 하는 텐트로 찾아갔다. 내가 "제발 끝내라"라고 말을 하였는데 그 당시 김진숙 위원의 단식 이유가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단식을 말렸던 내가 똑같은 이유로 단식을 하게 되었다. 내가 단식을 하니 이번에는 김진숙 위원이 그만 하라고 말렸다. 인연이 참 기구하고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런 일로 더 이상 단식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한진중공업의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 한국 노동의 문제는 무엇이라 보는지? 관련하여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해결방안과 관련해서는 정리해고가 없는 사회가 오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것을 법으로 허용 안 한다고 해도 다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해고 요건을 엄격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같은 경우, 민주당이 뒤늦게 사용사유제한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일 노동을 한 것에 대해 임금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국가들이 많다. 한국은 어느 정도를 용인하느냐면 법률적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10%만 주어도 된다. 스위스 같은 경우 차별임금은 형사처벌 대상이다. 한국은 그런 제도가 없다.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 임금에 80% 이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만 법적으로 보장이 되어도 많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바꾸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현재 싼 임금에 적응되어 왔던 영세기업 내지 중소기업의 경우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기업들의 경우 사회적으로 특정한 기금을 조성하든지 해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장려하는 인센티브를 주는 대책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세부적인 안도 만들어 놓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삼성X파일 사건관련 대법원 유죄 판결에 대한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어떠했나?

사건은 2005년도 사건이다. 내가 말이 잘 막히지 않는 사람인데, 표현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거대권력들의 결탁에 의한 용서할 수 없는 부패행위라는 것에 대해서 한나라당까지 모두 인정한 상태였다.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로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해서라도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 한다는 데 여야가 모두 동의했던 사안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299명 중에 거의 99.9%가 두 개의 법안, 한나라당이 제출한 테이프 공개 법안과 당시 열린우리당 등이 제출한 공개 법안에 모두 서명을 했다. 그리고 특별검사 도입까지 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제대로 수사된 것도 없다. 누가 수사를 받았나? 나와 이상호 기자만 수사를 받았고, 나하고 이상호 기자만 재판을 받았다. 당시 홍준표 의원도 "노회찬은 무죄다"라고 제일 먼저 말을 하였다.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수사를 안 해서 법무부 차관까지 있으니깐 수사를 하라고 했는데 법무부 차관이 있다는 것을 왜 공개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 진보의 문제도 아니다. 정의에 관련된 문제다. 보수라고 해서 삼성 편 들일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아직 이런 기초적인 정의도 안 서 있다는 것이다. 삼성X파일 사건은 한국 사회의 최대 강자에게 국회마저도 사실상 유린, 농락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 구조하에서라면 100년이 흘러도 이 문제는 실체를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아마 이 테이프는 공개해야 할 사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사건은 끝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관련하여 향후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면 노 고문의 피선거권은 박탈된다. 그러면 내년 총선에 출마할 수가 없게 되는데, 그것은 진보진영에게 있어서도, 노회찬 개인에게 있어서도 큰 손실이다. 이에 대한 심적 부담이 매우 클 것 같다.

예전에 국정감사 할 때, 모 고등법원장이 나한테 법조인도 아닌데 사법에 상당히 해박하다고 덕담을 해 주신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정색을 하고 내가 왜 법조인이 아니냐, 내가 다년간 법무부의 보호와 관찰 하에 고락을 함께 했기 때문에 나도 법조인이라고 농담으로 응수한 적이 있는데 말이 씨가 된 것 같다(웃음). 지금도 내가 법조인이다. 법원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다(웃음). 내가 이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이만한 일은 각오를 했다.

다만 워낙에 대법원의 판결 등이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인데, 판결의 내용이 내가 공개한 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을 왜 공개했느냐는 것이다. 내가 공개한 사안이 공적 관심사가 아니고, 개인 생활에 해당한 문제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재벌의 돈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력인 대선 후보에게 전달하는 것을 모의하는 것인데 이것이 공적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8년 전에 다 끝난 일을 왜 파헤치느냐는 식으로 대법원에서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결이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알려줘서도 안 되는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사회의 혐오감을 갖게 하는 반사회적 판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헌법재판소에도 헌법소원을 내었다. 그리고 파기환송심에서 끝이 아니다. 재벌들은 파기환송심을 몇 번이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재판만능으로 갈 생각은 아니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을 것이고, 한 가지만은 내가 장담한다. 내년 4월 총선에 나는 100% 출마할 것이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꼭 지킬 것이다.

지난봄에 '선거제도개혁의 전도사가 되겠다'라며 1위 다수대표제에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의 개혁에 앞장서겠다고 하셨는데, 그 각오와 의지가 남다른 것 같았다. 특별히 이 문제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한국정치가 많은 국민들에게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신을 받는 가장 큰 배경은 한국정치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인을 위한 정치라는 것이다. 한국정치가 제구실을 하고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현대적 정당정치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법이 바뀌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법,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 비례해서 권력을 나눠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산 시민 중 54%만 한나라당을 찍고 있는데 왜 부산 국회의원 의석의 94%를 한나라당이 점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전비례대표제로 바뀌어야 한다. 스웨덴식, 독일식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찍은 것만큼 그에 비례해서 의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금처럼 골치 아픈 후보 단일화 같은 과정은 없어도 된다. 정책이 비슷한 정당끼리 정책공조 및 연대를 하면 된다. 정당들 간의 합리적인 연대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세력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또 집권하는 것이 선거제도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보정당의 성장과 집권은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선거제도 개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보정당이 제대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도 선거제도 개혁은 관건이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서 오랫동안 문제가 제기되었고, 피로도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선거제도 개혁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선거제도만 제대로 개혁하여도 헌법을 몇 번 더 개정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대개 선거제도 개혁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선거제도를 개혁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즉 국회의원들이 현 선거제도에서 이득을 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선거제도를 바꾸는데 동의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무모한 노릇이라고 포기를 하는데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내년 선거에서 정책 공조를 하게 된다면 가장 핵심적인 합의 사항, 그 첫 번째로 선거제도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들이 약속을 하고 정책 공조를 해서 대통령이 당선 후 1년 안에 선거제도를 개혁하겠다고 공헌하면 국민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 본다.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개혁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감나무 밑에서 감도 아닌 달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진보세력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다른 부분의 양보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9월 4일에 진보신당 당대회가 있다. 민노당과 통합논의가 핵심이 될 텐데 어떻게 예상하고 있나?

최근 실무협상에서, 이른바 부속합의서 등에서 당 운영 방식 등과 관련된 모든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나의 쟁점만 남았다. 국민참여당 문제이다. 어찌 보면 진보정당 사이에서의 문제는 다 해결되었고 다른 당 문제 하나가 남은 것이다. 나머지 문제까지도 슬기롭게 뜻을 모아, 약속한 대로 28일 민주노동당, 그리고 9월 4일 진보신당 당 대회를 거쳐서 9월 중으로는 국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통합진보정당을 출범시켜야 한다. 이 과정들이 잘 진행될 것으로 생각한다.

단식 와중에도 관련된 사람들도 만나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다.

더불어 진보정당 간 통합이 가시화되고 있고 내년 총선, 대선과 관련 진보정당 간 통합을 넘어 야권대통합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나서고 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결과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인데 여기에서 진보신당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야권대통합이 민주당 외에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다들 부정적이다. 이것은 당위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내가 해 볼 수 있는 말은 대통합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또 왜 통합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왜 통합을 해야 하느냐, 이유는 딱 하나다. 선거후보 단일화를 해야 하는데 당이 따로 있을 때, 후보 단일화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을 하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당을 같이 하는 문제와 선거 후보를 단일화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예를 들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결혼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고, 이것을 자꾸 이야기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후보 단일화를 하는 다른 방식을 논의해서 빨리 합의하자는 주장을 2월부터 주장했다. 가설정당으로서 선거연합당을 이야기했고, 국민 참여 경선으로 후보를 선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 민주당도 동의했다.

야권대통합의 목표가 후보 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를 하자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정당 간 통합이 어렵다면 다른 방식을 통해서라도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책임 있게 공식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 2012년 선거 승리를 위한 야 5당 특위를 만들어서 이 문제를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임 있게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노당과 통합과정을 지켜보며 당 내외 많은 이들이 통합의 당위성에 대해서 인정하면서도 진보신당이 스스로 굳건히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분들도 많다. 정당으로서 진보신당의 한계와 가능성, 소속 정당으로서 진보신당을 성찰해본다면?

우리가 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진보신당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통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으로 따지면 진보신당은 얼마든지 계속 갈 수 있고, 버티는 것뿐만이 아닌 유의미한 존재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그냥 유의미한 존재로 만들어진 정당이라기보다는 집권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진보의 큰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신당은 창당 선언문에 계속해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닌 재창당을 한다는 것이 들어가 있다. 시점은 나와 있지 않지만 진보의 재구성, 내용적 혁신, 세력의 재편을 통해서 진보를 뿌리내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신당의 특유의 강점, 특성과 지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또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혼자 혁신하는 것이 아닌 더 큰 집에서 혁신을 주도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통합을 하면서 우리가 누구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정파적 대결 관점은 이미 극복되어 있다. 진보통합정당이 우리가 주장해 왔던 진보혁신의 기치를 내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원들에게도 이야기했는데, 진보통합정당은 진보신당의 창당정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 진보신당의 창당정신을 진보신당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더 큰 진보정치세력들 속에서 그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다는 점과 또 이러한 기회가 매번 오는 것도 아니기에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실현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모가 잘 자란다고 해서 벼를 모판에서 계속 키울 수는 없다. 때가 되면 옮겨 심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사실 미련은 있다. 조금 더 해서 실전에 있어서 성과를 더 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시기를 놓치게 된다. 진보신당은 남다른 사명감이 있다. 그것은 진보신당을 만들 때의 문제의식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진보통합정당에 가지고 가서, 더 넓게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분파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도 문제의식과 그 정신만큼은 진보세력 외연의 확장을 이루며 구현해 나간다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복지담론 등 진보적 아젠다를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로 만들어가는데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신당을 통틀어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그룹이 여전히 미약하다. 일반 대중의 마음을 얻는데 너무 소홀히 한 것 아닌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실제 진보정당이 국민들로 받는 지지율을 보더라도 굴곡이 있다.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고, 또 다시 올라가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완만한 수치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데 일단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이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2004년 말까지 18%, 19%, 20%까지 올라갔다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서 2005년 8월에는 8%까지 떨어진다. 그리고 2007년에는 3%까지 떨어졌다. 내가 2004년 말에 이대로 가면 지지율이 내년에는 8%까지 떨어진다고 이야기했다가 재수 없는 이야기한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웃음). 내 생각에 국민들의 기대감이 높아진 만큼 그 기대감에 걸맞은 정책이나 운영, 활동을 못 보여줌으로써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 힘든 이유들 중에 보통 국민들의 의식, 분단 등 조건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진보정당이 한때 국민들로부터 20%대의 지지율을 받았다는 것은 이러한 조건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20%는 제1야당이 평소에 받는 지지율이다. 이는 객관적 조건의 문제가 아닌 진보세력 주체의 문제라고 본다. 진보세력 주체의 문제를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스스로 혁신을 해 나아가야 한다.

두 가지 방향, 진보신당의 창당정신이기도 하다. 계승할 것은 계승하되 과감하게 내용과 활동방식에 있어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최대한 세력을 규합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에서의 진보정당들이 처음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집권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해 볼 때, 현재 우리가 늦게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더디게 성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근래 진보의 시대라고 해서 너도나도 진보를 이야기를 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조건은 좋아졌다고 본다. 우리가 늘 이야기해 왔던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깊고 의지가 강한 집단이 국민들에게 더 다가갈 기회가 있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더 나은 조건이라고도 본다.

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들 하면 집권과 관련 없는 것처럼 본다. 그러나 흐름을 계속 지켜보면 진보정당의 집권 시기는 다가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머지않아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본다. 진보정당의 집권이 국민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선택사항으로 들어가는 것이 늦어도 2017년 선거에는 가시적으로 드러날 것이라 확신한다.

희망하는 한국사회의 미래상은 무엇인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평화와 공존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의 미래상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본다. 분단된 상황이 극복이 안 되고 있는 문제,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 분단을 빠르게 극복하고,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통일이 평화의 종착지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변경한다든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어 평화체제를 만들든지 여러 가지 방안들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의 국제적 역할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GDP 많이 올라가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많이 따는 것이 국격 내지 국가적 위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처럼 이윤 위주의 기업가 관점에서 나오는 발상이라 보인다.

어느 한 편과의 군사적 동맹만을 맺는 것이 아니라, 주요 강대국 속에서 치우치지 않는 평화적, 국제적 역할을 해 나아가는 것이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길이라 본다. 공존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공존이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만의 공존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과의 공존도 되어야 한다. 자연은 약탈, 파괴의 대상이 아니다. 자연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

손학규 대표를 비롯하여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문재인 이사장 등 대선후보자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미래 한국을 이끌어 갈 리더로 어떠한 인물상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혹은 이 세대에 필요한 리더십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리더십을 말하기 이전에 한국의 대선 전야 풍경에 대해서 말을 해보고 싶다. 미국의 경우 지금 이 시점이면 이미 각 당의 유력후보까지 정해져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전혀 오리무중이다. 한국 정치의 특징이다. 어찌 보면 포스트 3김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3김 시대 전에는 군부독재였으니 대선후보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고, 3김 시대에는 상수로 3김만 후보였다. 3김만 상수인 이상한 선거였다. 3김 중에 누가 먼저 하느냐가 쟁점인 선거였다. 문제는 3김 이후는 너무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3김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이러한 특징이 왜 그러냐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정당정치의 허약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대개 다른 나라의 경우, 당은 그대로 존재하고 선거 때마다 후보가 바뀐다. 그런데 한국은 후보가 나오면 그 사람 주변으로 당이 하나가 생긴다. 후보를 못 내면 당도 없어지고, 후보 중심으로 당이 통폐합되기도 한다. 또 선거에 지게 되면 당이 네 개, 다섯 개 쪼개지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의 정당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정당정치가 정착이 안 되어 있다 보니 선거 자체가 예측불허의 선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후보는 사람이다. 당이 후보는 아니지만, 정당들이 정책에 의해 구별되는 당들이 아니다 보니 사람에 의해, 후보에 의해 받는 영향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선거가 경마하듯이 누가 유력한 후보인지 맞추는 식이다. 또 이미지를 보고 좋아 보이는 후보를 택하는 것이 한국의 선거가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더십 이야기를 해 보자면 사실 현재 한국정치의 상황에서 제대로 리더십을 평가할 수 없다. 리더십이라는 것이 정견과 정치적 경륜, 그리고 여러 가지 역량의 총합으로서 리더십이 평가되어야 하는데 현재 한국정치에서의 리더십은 이러한 것으로 평가가 될 수가 없다. 내가 만든 말인데, 현재 한국정치에서의 리더십이라는 것은 실제 이미지십(image ship)에 불과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검증이 안 된 사람도 상관이 없다. 이미지가 끌고 가기 때문이다. 리더십의 여러 조항이 미확인 또는 확인불가임에도 이미지로 해결된다. 나는 이미지 자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정치에서 이미지의 중요성은 나도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것이 되어야지 그것을 중심으로 대선 후보가 등장하고, 심지어는 대통령이 되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이러다 보니 이기기 위한 이상한 연합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절박성은 이해를 하지만 누구라도 상관없이 연합해서 이기려는 것은 한국정치의 심각한 문제이다. 3김 시대의 극복이란 단순히 3김이 없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새로운 정치유형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나로부터 열겠다는 정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본다. 새로운 리더십은 포스트 3김 시대 정치의 틀을 만들고 규범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당정치의 재편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구시대 정치가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내가 바라는 것은 이제는 금기를 타파하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문제도 그 금기 중 하나이다. 더 이상의 금기와 성역이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보일 수 있는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리더십은 시대에 도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십이 시대를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라는 것이 버스처럼 기다리면 오는 것이 아니다. 대선 정류소에서 이미지를 관리하며 기다리는 리더십이 아닌 과감한 도전과 시도를 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대선은 후보들만의 선거가 아니다. 대선은 유권자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선거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노회찬의 리더십은 무엇이라 할 수 있나

리더십만큼 팔로우십(follow ship)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대개 리더가 이끌어 간다고 하지만 강제로 끌고 간다는 것은 진정한 리더십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인정하고 따라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즉 팔로우십이 있기 때문에 리더십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문제가 높은 지지율을 받은 정치인들이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지율을 유지해 나간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당선될 때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끝낸 대통령이 없다. 그러다 보니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이 탈당하게 되는, 임기 마치기 전에 탈당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사실은 당에서 추출 당한 것이다. 차기 정권창출에 방해가 되니까, 자기를 배출시킨 당으로부터 추출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다. 왜 우리가 이런 비극을 간과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국민들과 함께하는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리더의 철학이라 생각하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이다.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는 선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물은 어디서 왔는지 따지지 않고 함께 흐르고, 또 계속 합해져서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난관이 와도 반드시 돌파하는 것이다. 산이 있으면 휘감아 돌아가고, 낭떠러지가 나오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높은 언덕이 있으면 밑에서 채워서라도 넘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제일 낮은 곳으로 흐르는데 제일 낮은 곳으로 흐르면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정치의 목표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국민들의 행복이라면 바다는 민중, 국민들이다. 리더십의 철학으로 상선약수라는 말을 항상 이야기하고 또 권하기도 한다.

자유주의의 정의에 대해 듣고 싶다.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유주의 논쟁에 대한 생각은?

중요한 문제다. 내가 첫 번째 만든 유인물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유신반대 유인물이었다. 그 유인물에 서울대 4. 19 선언문 첫 문장을 인용했다.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였던 것 같다. 그래서 '자유'라고 하면 그 문장이 기억이 나는데 오랜 기간 한국은 자유가 억압당하는 정치 환경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자유의 획득이 민주주의의 초보적 발전과 등치 되어 왔던 시기를 겪어왔다. 이런 부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억압했다. 즉 반공이 자유를 참칭한 부분도 있다.

현재 극우단체들을 보면 자유라는 말을 참 잘 쓴다. 자유총연맹과 같은 이름에서 자유는 사실 반공이다. 자유총연맹이 아니고 반공총연맹이다. 독재시대에 반독재의 의미인 자유라는 말을 겁도 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공산주의의 반대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요즘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부분도 여기서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 더하기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사실 반공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하더라도 반공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공 없는 민주주의는 위험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냉전의 산물이다. 그리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런 반공민주주의는 극우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 문제까지 이야기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굉장히 혼탁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자유주의라는 것이 양 측면이 있다고 본다. 구체제를 타파하는 데 있어서의 혁명성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 타파된 이후에 스스로 권력을 가지며 보수화되는 양 측면이 다 있었다고 본다.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하는, 각 개인의 천부인권을 인정하는 것도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평등과도 관련이 깊다. 파시즘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상도 자유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고 본다. 심지어 마르크시즘도 그 근간에는 자유주의가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자유주의 논쟁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고찰과 한국적 특성에 입각한 고찰 양쪽을 다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한국사회는 정치적 자유만 보더라도 아직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는 단계다. 또 경제적 자유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왜곡일 수도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갖는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추구하는 바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볼 때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자유에 대한 규제의 역사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번 돈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신의 자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무제한으로 방치하면 사회적으로 굉장히 위험해지기 때문에 각종 규제를 만들게 된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조건이 있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 의지에 따라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이다. 자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본주의 역사를 자본에 대한 규제의 역사라고 말을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동안 규제당해 온 자본의 자유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규제가 강화 아래 위축된 자본의 자유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시장에서의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이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자본과 관련된 규제를 풀어서 자본이 처한 위기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식으로 자본의 자유 확대하는 신자유주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관련하여 사회민주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 말한다면?

사회민주주의라는 기치 아래 추구하는 것과 진보적 자유주의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느냐라는 문제의식으로 묻는 것 같다. 내가 보는 관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성찰로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더 나은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한계나 문제를 보완하는 자유주의, 소위 수정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성찰에 결과로 본다. 예를 들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과 같은 방식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주의가 원래 추구하고자 했던 바가 있는데 그것이 실제 사회주의 실현과정에서 인간의 체온이 없는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기까지 하는 사회주의가 나타났고 이것에 대한 반성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사회주의라는 식으로 발전한다. 진보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점에서 나는 사회민주주의도 앞에 단어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기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가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차이는 출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극복할 것이냐, 아니면 점진적으로 극복할 것이냐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출발은 점진적 방법에 의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출발할 때의 문제의식이 지속되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을 가서 내가 생각이 든 것이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한 나라는 많지만 사민주의적 사회는 지구상에 몇 나라가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사민주의가 하나의 철학과 규범으로 그 사회에 뿌리를 내린 나라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경영연구소 홈페이지에 '자유란?'이라는 코너가 있다. 자유에 대한 간단한 단상을 듣고자 만든 것인데. 노회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나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자유가 무의미하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선물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만큼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라 생각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어린 시절 매우 개구쟁이였을 것 같은데 어떠했나?

어렸을 때 썼던 일기책을 아직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에 "오늘은 잠이 안 온다. 엄마한테 한 대도 안 맞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일동 웃음). 그렇게 하루라도 엄마한테 맞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아이였다. 또 작은 수첩이 있었는데 학교가면 담임선생님께 도장을 받아와야 했고, 집에 오면 엄마한테 도장을 받아야 하는 수첩이었다. 그 수첩이 무엇이었느냐면 내가 사고를 안치면 도장을 받을 수 있는 수첩이었다. 집에 수첩을 가져와 선생님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것이고, 학교 가서 수첩에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동네에서 사고를 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웃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때 산동네에 살며 산에서 뛰어 자란 것이 가장 큰 자산이다. 어린 시절 이러한 경험은 자연과 가족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학창시절 노회찬은 어떤 학생이었나?

학창시절에는 모범생이자 반항아였다.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반장만 했다. 이런 면에서 모범생이었는데 중학교 입학하고, 첫 일요일에 처음 한 것이 교복 입고 학교에 간 것이었다. 왜 갔느냐면 할 일이 없어서 갔다. 옛날에는 축구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컴퓨터 오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른들도 바빠서 혼자 집에 있으면 할 것이 없어서 학교에 간 것이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마다 교실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당시 중3 선배들은 강제로 일요일에 나와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1학년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학교에 와서 공부하니 조금 괘씸했던 것 같다(웃음). 초등학교 때도 내가 제일 기다리는 날이 교과서를 나눠주는 날이었다. 집에 읽을 책이 없어서 교과서가 나오면 받은 그날 다 읽었다. 심지어 음악책까지 한 페이지씩 다 읽었다(웃음).

반면에 굉장히 반항아이기도 했는데, 반장이면서 선생님한테 제일 많이 맞은 사람이기도 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학생을 때리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꽃병, 망치, 주먹 등으로 많이 맞았다(웃음).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사회를 알기 시작했는데, 당시 읽었던 책에서 전쟁을 겪은 소년은 소년이 아니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이 나를 말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유신을 선포했다는 말을 처음에 듣고, 학교에서 배우기를 국회해산은 의원내각제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유신 선포가 방송되어서 국회 앞을 찾아가기도 했다. 당시에 국회 앞을 갔더니 장갑차가 있었고, 또 중앙청 앞에는 탱크가 있었다. 탱크 앞에는 총에 칼이 꽂혀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 광화문에 가서 가판대 신문을 보았는데, 나는 조간이 그 전날 나오는 것을 처음 봤다. 신문에 '국회해산'이라고 쓰여 있었고, 다음 날 나온 신문에는 '유신선포'라고 나왔다. 1972년 10월 17일 자 신문인데 그 신문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날 이후로 내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 신문을 버릴 수가 없다(웃음).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유신헌법 기사가 나왔다. 이때부터 나는 교과서를 안 읽었다. 이전까지 제일 좋아하는 것이 교과서였고, 교과서는 부모님 말씀과 같은 것이었는데, 유신 이후로는 교과서를 안 읽었다. 교과서를 안 믿었다. 대신 따로 보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사상계와 같은 책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모택동, 레닌 책과 같은 판금 도서를 읽기도 했다. 이러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다보니, 대학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당시 나를 지도해 주는 좋은 선배나 선생님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은 한다.

고등학교 때 이집트의 '나세르(가말 압델 나세르)'는 영웅과 같은 사람이었다. 일종의 ND(민족 민주주의)계열인데, 박정희도 많이 따라 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자유장교단'이라는 군부로 정권을 장악한 인물인데 당시에는 영웅과 같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가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일종의 근대화 유형이라 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방식이었다. 미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들도 있고, 비동맹 중립으로 가는 나라도 있었는데 비동맹 중립으로 나간 국가들이 ND(민족 민주주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ND계열 국가들을 소련 같은 국가에서 전략적 제휴를 맺으려고도 했다. 당시 우리끼리 어린 마음에 육군사관학교를 가야 된다는 이야기도 하고, 논쟁도 많이 했다. 토론을 했던 몇 명은 실제 육군사관학교 지원도 하였는데 물론 모두 떨어졌다(웃음).

나의 고교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백기완 선생이 '흥사단'에서 강연을 하면 쫓아가고, <씨알의 소리> 같은 판매금지 당한 잡지도 보곤 했다. 그런데 당시 <씨알의 소리>에서의 함석헌 선생 이야기는 고등학생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사서 보았다. 그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함석헌 선생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내가 <씨알의 소리>를 읽었는데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 만나서 이야기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함석헌 선생이 흔쾌히 허락하셔서 당시 용산에 있는 함석헌 선생 댁으로 찾아뵈었다. 가서 뵈니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수염이 하얀 분이 맞아주셨다(웃음).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책에서 듣지 못했던 부분을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 나중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들까지 해주셨는데 심지어는 사위가 담배를 피워 불만이다, 담배를 피우면 못 쓴다는 이야기들까지 해주셨다(웃음).

그리고 <씨알의 소리>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소설가로도 유명한, 당시 <조선일보>의 선우휘 편집국장이 대담한 것이 있었다. 참고로 당시 <조선일보>는 지금 <조선일보>와는 좀 달랐다(웃음). 당시 남북화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군지,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누구냐?" 라고 물어봐서 "몇 학년 몇 반 누구"라고 이야기를 하고 <씨알의 소리>를 보고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했더니 오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나는 신문사가 그렇게 지저분한 줄은 처음 알았다. 신문사라고 해서 대단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서류 더미만 한 가득이었다. 그 속에서 선우휘 선생이 설렁탕을 먹고 있었다. 만나고 나서 우리 반에 선우휘 선생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씩 외부강사를 초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반 친구들은 한국 최초 세계 일주를 한 김찬삼 교수를 모시자고 했다. 그때는 세계 일주가 아이들 사이에 로망이었다. 꿈을 물어보면 세계 일주였던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그래도 우리가 나이가 몇이냐, 세상을 알아야지!"라고 이야기하면서 설득을 시켜 결국 선우휘 선생을 모실 수 있었다. 그런데 모셔 와서 이야기를 듣는데 나한테 이야기한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하고, 자신이 평안도에서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와 무엇보다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이야기들만 했다. 그래서 내가 모셔오기 위해 친구들을 설득했던 것이 무색해졌다(웃음).

그리고 당시 <다리>라는 월간잡지가 있었다. <사상계> 폐간 이후 그 맥을 잇는 잡지였다. 창간 이후 폐간, 복간, 휴간하다 끝내 없어진 잡지인데 이 잡지를 지금도 다 가지고 있다. 이 잡지를 통해서 '김지하'를 알게 되었고,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그리고 '박현채'와 같은 진보학자들의 논문도 읽어 볼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달이라는 잡지에 다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이해 못 하는 부분이 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반이었다. 궁금한 점이 많아서 책을 훑어보니 주간으로 '김상현'이라는 이름이 있어 전화했더니 오라고 했다. 광화문 당주동 월간 <다리>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김상현 씨가 나를 보고 고등학생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일단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가고, 그다음에 찾아오라고 했다. 크게 실망했다. 이후 김상현 씨가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내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기억을 못하더라(웃음).

당시 온통 관심이 역사, 문학, 남북문제였다.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시기였다. 그리고 보충수업 같은 것이 없어서 수업도 일찍 끝났다. 그 해 발표된 단편은 모두 읽고, 또 그 해 개봉된 영화를 모두 본적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라에서 하는 미술전시회인 국전이 있었는데 인간이라면 다 봐야 하는 줄 알았다(웃음).

그리고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다. 음악을 들으면 그대로 악보에 옮기기도 할 정도였는데, 한 때 음악에 심취도 해서 심각하게 음대로 진학할까 고민도 했었다. 당시 여학생과 교제할 기회들이 많이 없었는데 이화여고에서 축제가 있으면 가서 첼로도 연주하곤 했다. 연주하고 오면 친구들 사이에서 어깨에 힘 좀 들어가고 그랬다(웃음).

우리 누나는 나더러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고생한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이 원해서 한 일 아니냐? 용접공도 내가 하겠다고 해서 했고, 감옥 간 것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웃음).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내가 고생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결혼식에만 나타난 사람"이다. 수배 때문에 가족들 결혼이나 회갑연 등 중요한 일에는 참여 못하고 내 결혼식에만 나타났다고 해서 그렇게 이야기한다(웃음).

▲ ⓒ프레시안(최형락)

시대적 과제뿐 아니라 청년 노회찬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추억들이 있다면 듣고 싶다. 더불어 노회찬이 가장 뜨겁게 눈물을 흘렸던 때는 언제인가?

내가 용접을 배울 때, 영등포 기계공고 부설 용접학교에서 배웠다. 당시 그 학교가 공고도 못 가서 기술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기술을 배우고자 들어오는 학교였다. 공고였지만 학생들이 주로 고등학생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나는 대학 시절에 들어가서 그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전에는 같은 학교에서 주로 만나던 친구들이 전부였는데, 용접학교에서는 전혀 새로운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자취를 했는데 그 친구들이 나를 만나려면 자취방으로 와야 했다. 그때는 핸드폰 같은 것이 없어서 일단 찾아와야 했다. 내 자취방에 경찰이 닥치고 내가 도망가면서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로 7년간의 수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0여 년 연락이 끊어졌는데, 내가 2002년 국회의원 되기 전에 TV 토론회에 나간 적이 있다. 그때 TV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동생이 나를 본 것이다. 동생이 수소문 끝에 민주노총으로 연락해서 나와 연락이 닿아 통화했는데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충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무엇하느냐"라고 물으니 "용접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러 고속버스를 타고 충주로 가는 데 그 가는 길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연애도 해보고, 짝사랑도 해봤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제일 설렜던 것 같다. 약 20여 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났는데 충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후로 부부동반으로도 만나고 지금도 잘 만나고 있다.

그리고 눈물을 많이 흘린 것이 5. 18 때의 광주이다. 5.18 광주사태가 벌어졌을 때 부산에서 일본 TV를 통해 그 참상을 그대로 보았다. 그때 부산에는 일본 전파가 나와서 일본 TV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참상들을 보면서 정말 뜨겁게 울었던 것 같다.

처음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창시절부터 운동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도 하면서 사회에 여러 가지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결국 학생운동으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생운동이 촉발, 또는 촉매제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민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역사의 주인이 주인으로서 일어서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급하지 않았다. 길게 보았고 평생 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걸린다고 해도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평생 해도 그날이 안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고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오를 많이 다지게 되었다.

또 먹고 살아야 해서 용접을 배웠다. 어떤 직업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맞느냐를 고민했을 때 용접이었다. 그리고 용접을 해도 아주 열심히 독하게 했다. 용접하고 1년 만에 용접 5년 경력의 사람하고 기술이 비슷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으면 현장에서 말이 안 먹혔기 때문이다. 용접 실력은 형편이 없는데 점심시간에 "요즘 세상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떠들어봐야 먹히지 않는다. 일단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집에 오면 펜치로 붓을 물어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1년 만에 5년 경력 용접실력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당시 경공업, 키친아트 같은 회사 직원이 1700원 받을 때, 나는 5000원을 받았다. 직업으로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나는 믿지를 못했다. 내 평생에 못 볼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내 생애는 그런 날이 안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87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역사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이 되었다.

지금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진보정당 통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의 한 축으로 제대로 서는 것이다.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바다라고 생각한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이다. 여러 가지로 선배세대로서 미안하다. 우리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청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보다는 우선 자신이 사는 데 집중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살아 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살고 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 좋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갖고 살아보는 것이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자세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모든 것은 하기 나름이라는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려고 덤벼야 한다. 원하는 만큼 바꿀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또 그러한 책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게 재미있고, 신 나게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 친구들 중 굉장히 성공한 친구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자신이 제일 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모르고 산 것이었다. 자신이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기 바란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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