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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기지 같던 그곳에서 맛본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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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브이 기지 같던 그곳에서 맛본 '서울의 봄'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1> 영등포역과 한국 근현대사

프롤로그 - 연재를 시작하며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동네엔 철길이 있었다. 집을 나서 불과 20여 미터만 걸으면 기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단선 철로가 놓여 있었다. 이 철로를 기준으로 아이들의 놀이 영역도 나뉘었다. 철로를 넘어서는 것은 인디언이 다른 구역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늘 주의가 필요했다. 언제든지 갑자기 출현할 수 있는 철길 건너편 아이들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되어 철길 건너편의 제법 힘이 센 아이가 우리 구역으로 넘어올지라도 우리는 주인답게 눈을 쏘아붙이거나 위협을 가했다. 그렇다고 항상 적대적으로 지낸 것만은 아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이기 위해 한창 놀고 있는 아이들을 납치해 갈 때까지 신나게 뛰어놀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에 우리는 신사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 신사협정은 내가 속한 구역의 아이들이 더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철길 건너편에 우리 구역엔 없는, 아이들이 단 하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만화 가게 그리고 '쫀드기'와 줄줄이 사탕을 미끼 상품으로 진열한 문방구가 두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를 싸게 볼 수 있는 극장 초대권을 살 수 있는 마른 국수면발을 파는 집과 반찬 가게도 있었다.

큰길에 있는 연흥극장이나 경원극장 같은 영화관의 상영 프로그램이 바뀔 때면 자전거 프레임에 둥글게 묶은 영화 포스터를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포스터맨 아저씨가 있었다. 전봇대나 가게 문짝에 능숙한 솜씨로 옛 포스터를 제거하고 새 포스터를 붙이는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초대권 구걸을 할 때에도 주로 철길 건너편 구역에서 해야 했다. 가게 철시 후 덧문을 닫기 위한 나무 문짝 위에 영화 포스터 아저씨가 다다닥 소리를 내며 박는 포스터 전용 스테이플러를 어른이 되면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이 철길은 지금의 영등포역에서 쪽방촌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난 선로로 경인가도를 지나쳐 문래동 경성방직을 가로질러 이어진 일종의 산업용 작은 지선이었다. 유년 시절 정말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지만 기차가 마을을 지나가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을 했다. 기차는 아주 느린 속도로 한두 량의 화차를 끌고 마을을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영등포역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영등포역으로 사라지는 기차 뒤를 따라가다가 기차가 영등포역 구내로 들어가고 거대한 철문이 닫히면 일제히 쇠창살에 달라붙어 저마다 괴성을 지르거나 쇠문을 흔들다가 역 직원이 달려오면 일제히 도망을 갔다. 아이들 사이의 소문에 의하면 걸리면 100만 원을 물어줘야 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었는데 학생 버스비가 50원도 안 됐던 당시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황당한 헛소문이었다.

이 철문은 종종 무임승차자들의 비밀 통로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표가 없는 사람들은 영등포역의 지하 통로를 통해 개찰구로 가는 게 아니라 몰래 이 철문을 타고 넘었다. 때때로 역무원들이 잠복근무를 하다가 철문을 넘는 사람들을 검거하기도 했고 달리는 열차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을 단속하기도 했다. 나 역시 이 쇠문을 종종 넘어 다녔다. 선로 위에 못을 올려놓고 열차가 지나간 뒤에 수거해 언제 나타날지 모를 무장간첩을 잡을 표창을 만들기도 했다. 서울 지하철이 처음 개통되었던 1974년 8월 15일에는 초등학교 2학년생의 몸으로 대낮에 과감히 쇠문 밑을 기어서 통과한 후 전철 승강장까지 잠입해 지하 청량리역까지의 왕복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적도 있다. 한번은 집에 놀러온 중학생 외삼촌을 쇠문으로 안내해 인천행 전철을 태워 함께 경인선을 유람하기도 했다. 경인선 양옆으로 펼쳐진 논밭을 보면서 달리는 것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에 꽤 괜찮은 여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등포역이 품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산업화 시기 전국에서 몰려온 도시 빈민들 중에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영등포역 주변.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유소년 시절을 보낸 게 기차와 나의 첫 인연이다. 이왕 영등포역 말이 나온 김에 영등포역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영등포역은 부산의 초량역과 동시에 1901년 8월 21일 경부선 철도 기공식이 열렸던 서울의 중요한 기점이었다. 영등포역이 경부선의 주요 기점이 되었던 이유는 이미 개통된 경인선을 통해 경부선 철도 건설을 위한 자재를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도권 광역전철이 운행되고 구로역에서 경부선과 경인선이 갈라지지만 한국 철도가 개설될 당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영등포역이 분기점이었다. 서울이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해 영등포구는 영등포역 일대와 여의도를 포함하는 구역이 됐지만 과거에는 지금의 구로구나 금천구, 강서구, 양천구, 동작구, 관악구가 다 영등포구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한 교통수단은 철도가 절대적이었다. 현재 16% 정도인 철도의 여객수송분담률에 비하면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70%에 가까운 수송분담률을 점유했던 철도의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등포역은 경부·호남·전라·장항선 등 서울로 향하는 주요 간선들을 모두 아우르는 역이었다. 영등포는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난 대(大)이주의 시기에 열차를 이용해 수도 서울에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포털이었다.

농촌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대이주의 행렬이 서울로 밀려들면서 영등포역과 그 주변은 가장 붐비는 곳이 되었다. 영등포로 들어온 가난한 이주민들은 서울의 흑석동, 봉천동, 난곡, 목동 등의 산자락에 들어가 달동네 판자촌을 형성했다. 안양천을 따라 가리봉동과 안양, 경인가도 쪽으로는 개봉동, 오류동, 광명시, 부천, 역곡, 인천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울역이 종착인 대부분의 열차들은 영등포역에만 도착하면 예정 시간을 넘겨 정차하기가 일쑤였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승객들이 내리고 나면 텅 빈 객차에 몇 명 남지 않은 승객을 태운 채 서울역으로 향했다.

한국 철도 최초의 노선인 경인선을 따라 새로운 공장들이 들어섰다. 이 공장들은 경인선 철로와 나란히 경인국도를 따라 영등포역에 이르렀다. 한국 경공업의 중심지가 된 경인가도의 공장에서는 수많은 기능공들이 선반이며 밀링 작업을 하며 쇠를 깎았다. 공장들에서는 아직 소년티를 벗어버리지 못한 초보 견습생부터 우람한 근육질을 자랑하는 숙련공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했다. 불에 달궈진 철편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용접공들이 만들어내는 불꽃들이 곳곳에서 타올랐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마주치는 공장들에서는 얼굴에 새카맣게 검정이 묻거나 그을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노란 양은 도시락을 쇠망치질 하는 받침대 같은 곳에 올려놓고 단무지나 마늘 장아찌, 김치가 전부인 반찬에 보리밥을 떠먹었는데 그 치아만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공장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지나칠 때면 "너도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하면 저렇게 돼"라고 가르치는 산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다.

국가가 산업역군이라 이름 붙인 이들은 희망과 두려움을 담은 보따리를 가슴에 품고 영등포역에 내렸을 것이다. 특히 구로동에서 광명시 경계까지 자리 잡은 구로공단에는 전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공돌이, 공순이"가 됐다. 이들도 영등포역 광장을 가로질러 "초보자 환영, 식당 및 기숙사 완비"라고 적힌 전단지를 들고 구로공단으로 향하는 보성여객이나 보영운수 등의 시내버스를 탔을 것이다.

영등포역은 정말 멋진 역이었다. 백화점이 들어선 지금의 조악하고 볼품없는 민자 역사하고는 차원이 다른 기품이 있는 역이었다. 멀리서 보면 시립미술관이나 음악당처럼 웅장하게 서 있었다. 당시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마징가제트나 로보트태권브이의 기지라고 해도 괜찮았을 만큼, 거대한 직사각형 기둥들이 역사를 받치고 경사진 광장을 품은 채 영등포 로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형 건물이었다. 역 안은 높은 천장을 갖고 있었고 유리창에 구멍을 뚫은 매표창구 좌우로 타는 곳과 나오는 곳이 있었다. 만약 영등포역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파리의 오르세 같은 훌륭한 미술 전시관도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 옛 영등포역. 1965년 1월 12일 준공되어 몇 번의 증·개축을 거쳐 민자 역사로 재건축되기 전까지 이용됐다. ⓒ철도청(<사진으로 본 한국철도 100년>, 2003년)

1980년 5월 영등포역에서 맛본 '서울의 봄'

이곳에서 내린 사람들 중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은 역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수도권 전철 영등포역으로 가야 했다. 역을 나오면 공중전화 박스가 길게 늘어서 있고 칸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통화 차례를 기다렸다. 공중전화 박스를 지나면 제법 큰 광장이 영등포 로터리 쪽을 향해 약간의 경사를 지고 조성되어 있었다.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천연 눈썰매장이 되었지만 역무원들이 뿌려놓은 연탄재로 아이들의 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역 한쪽에는 육교가 있어서 역사의 반대쪽, 그러니까 신길동과 도림동 쪽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 놨다. 여름이면 무더위를 피해서 역 주변의 주민들이 돗자리를 육교 가장자리에 깔고 앉아 밤이 늦도록 라디오를 듣거나 아예 담요를 가져와서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자기도 했다. 사내아이들은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육교의 철망 사이로 소변을 보기도 했는데 밑으로 열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확산된 소변 파편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영등포역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일 중의 하나는 1980년 5월의 일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영등포역에 대단한 구경이 났다며 모두 달려나가는 동네 아이들의 행렬에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의 손을 잡고 끼었다. 경사진 광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있었고 시장이 있는 영등포 로터리 쪽에서는 어깨동무를 한 긴 대열이 끝도 없이 광장으로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나 택시를 비롯해 모든 자동차가 그대로 멈춘 채 도로는 마비되어 있었다. 여의도 쪽으로 연결된 도로로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대학생 시위대였다. 광장을 가득 메운 대학생들을 구경꾼들이 둘러쌌다.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걱정 어린 눈으로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동네를 돌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던 아저씨가 어느새 나타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도 보였다. 대학생들은 역 광장에 자리를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하기도 하고 손뼉도 쳤다.

역 광장에서 벌어진 일에 정신을 놓았다가 동생을 잃어버려 이리저리 찾기 시작했는데 동생이 몇몇 동네 꼬마 녀석들과 광장 맨 앞쪽의 대학생들이 들고 있는 대형 태극기 한쪽 귀퉁이를 같이 들고 서 있었다. 방송사 기자 마이크 뒤에서 웅성거리는 개구쟁이들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시위대 맨 앞의 태극기를 잡고 깔깔대고 있는 동생을 붙잡아 구경꾼들 사이로 데려왔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같이 늙어가고 있는 동생은 술이라도 한잔하게 되면 자신이 1980년 5월 민주 항쟁의 시기에 그 어린 나이에도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민들을 이끌었다고 너스레를 떨곤 한다.

영등포역 시위가 있고 나서 며칠 뒤 학교에 가려고 영등포역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 광장에 가득 찬 군용 트럭과 M16 소총을 멘 군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또 며칠 뒤 학교 애국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이 '공수부대가 사람을 죽인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고하라'는 훈화를 했다. TV 뉴스와 신문을 비롯해 곳곳에서 유언비어라는 말이 난무하자 수업 시간에 유언비어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일부 선생들은 광주에 간첩들이 너무 많아 순진한 시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했다. 이때 영등포역에서는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없었다. 긴 겨울을 앞둔 짧았던 서울의 봄이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뉴시스
몇 년 전부터 내가 아는 철도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 철도는 정부 담당 부처로부터 국가 재정을 좀먹는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다. 비효율과 이로 인한 과도한 적자를 타개하겠다는 정부 철도 정책 담당자들의 눈은 한국 철도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대안은 경쟁과 사유화였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철도에 입사하게 되고 매일 영등포역을 지나는 기관사가 되었다. 그리고 노조 집행부의 간부를 하면서 맡은 분야가 철도 민영화를 막아내는 일이었다. 노조 간부를 그만두고 현장의 기관사로 복귀해서도 10여 년을 정부의 경쟁과 사유화에 대한 반대 지점에서 공부하며(사실은 빈둥거리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철도에 대해 하나둘 배워나가다가 샛길로 빠지게 됐다.

철도가 인류 역사에 등장한 이후 철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기관차, 선로, 역, 철도원들뿐만 아니라 사랑과 이별, 전쟁, 역사, 예술에 이르기까지 철도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여행은 기차를 타고 달리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또 운이 좋아서 세계 여러 나라의 철도를 경험하고 그곳의 철도 노동자들을 만나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할 이야기도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나는 여행을 독차지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기차의 빈 옆자리를 선뜻 내어주듯 내가 경험하고 배운 것들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 글은 두 가지 차원의 여행기이다. 하나는 철도가 달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고 하나는 내가 경험한 철도 여행기이다. 자유로운 여행이, 특히 열차 여행이 으레 그렇듯이 눈부신 속도로 달리기도 하고 걸음걸이처럼 서행하기도 하고 고장이 나서 한참을 서 있어야 할 수도 있다. 때론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할 터인데 모든 것을 기관사에게 맡기고 차창 밖에 펼쳐진 세계를 함께 즐기길 당부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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