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 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후지코시가 강제 동원 피해자 및 가족들의 정신적 손해액으로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원고들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후지코시에 강제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로, 2003년 일본 도야마지방재판소를 통해 후지코시와 일본 정부에 손해금 및 위자료 지불, 사죄를 요구했다가 패소한 바 있다.
당시 일본 법원은 후지코시의 노동 착취 및 임금 체불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끝났다고 결정해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 동원 피해자 8명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및 임금 지급 청구소송의 상고심에서 반대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합법이라고 전제한 상태에서 내려졌고, 이러한 인식은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와 충돌한다고 밝히면서 부산고법이 내린 원심을 파기해 돌려보내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재소송을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원고들은 기자회견에서 "일본 전범 기업이 대한민국 국민을 강제 동원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피해자들의 행복추구권, 생존권, 신체의 자유, 인격권 등을 침해하며 강제 노동을 강요한 행위는 명백히 민법상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며 "피고 주식회사 후지코시는 피해자들이 강제 동원·강제 노동으로 입게 된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귀국 후 사회의 잘못된 편견으로 받은 멸시 등의 이유로 정신적 고통까지 위자(慰藉)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원고는 강제 동원 피해자 본인 13명과 사망한 피해자 4명의 상속인 18명이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직접 나와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경남 마산 출신의 전옥남(83) 씨는 궁핍한 삶을 살던 1944년 14세('국민학교' 6학년)의 나이로 근로정신대에 참가했다. 후지코시 직원들은 당시 전 씨가 다니던 학교로 와 일본에 가면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꽃꽂이도 배울 수 있다고 꾀었다. 하지만 꽃꽂이를 배운 것은 3일뿐이었고 이후에는 베어링 제작 작업에 투입됐다. 주야 2교대제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다 손가락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전 씨는 기자회견에서 "(당시) 열네 살짜리 애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5킬로그램이 넘는 쇳덩이를 들고 일해 지금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손가락 하나도 비뚤어졌다"며 "(일본 법원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돈을 줬다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이자 쳐서 돌려줘야 한다. 일본 정부가 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에서라도 돌려줘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주(82) 씨의 경우 1942년 부친이 일본군에 징용됐고 언니도 1944년 근로정신대에 참가해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했다. 김 씨 역시 같은 해 '언니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을 믿고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김 씨는 후지코시의 비행기 부품 제작 라인에 투입돼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임금도 받지 못했다. 언니를 만날 수도 없었다. 또 당시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대피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해 고통은 배가됐다.
김 씨는 기자회견에서 "(일본에서 재판 당시) 일본인 단체 회원들이 '한국 정부·국회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해결될 일인데'라고 할 때 부끄러워서 내가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모를 정도였다"며 "김대중 정부 시절 국회에 갔을 때도 경비원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끌려나왔고, 지역구 국회의원을 찾아가도 이후 연락도 없다"고 호소했다.
김 씨의 이러한 지적은 지난해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유사하게 나온 바 있다. 지난해 5월 외교통상부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정부가 당사자가 아니라 개인과 기업 간의 소송"이라고 밝혀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데 정부가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근로정신대 피해자 ㈜후지코시 손해배상 청구소송 원고인단이 14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소장을 접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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