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유상재 부장판사)는 24일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974년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던 장 선생의 재심을 청구한 장남 호권(64) 씨에게 과거 잘못된 판결에 대한 사죄를 구하고, 장 선생의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 "장 선생께 존경과 감사…과거사 뼈아파"
재판부는 "재심 대상 판결에서 유죄의 근거가 된 긴급조치 1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으로 2010년 12월 대법원에서 위헌·무효임이 확인됐다"며 "형사소송법 325조에 의해 장 선생에게도 무죄를 선고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부는 긴 시간 동안 장 선생 유족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고, 장 선생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재판부는 "오늘 이 자리는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큰 시련과 옥고를 겪은 고인에게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사죄를 구하고, 잘못된 재판 절차로 고인에게 덧씌워진 인격적 불명예를 뒤늦게나마 복원시키는 매우 엄숙한 자리"라고 강조하고 "국민 주권과 헌법 정신이 유린당한 인권의 암흑기에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스스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고인의 숭고한 정신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장 선생에게 유죄를 선고한 뼈아픈 과거사를 바탕으로 국민 권익을 보호하는 사법부가 될 것을 다짐한다"며 "고인의 숭고한 역사관과 희생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사회 구성원에게 큰 울림과 가르침으로 연연히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 "재심 청구 이후 3년이 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점에 대해 유족들에게 사과 드린다"며 "이번 재심 판결이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 조금이라도 평안한 안식과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강조했다.
검찰 역시 공소를 유지할 수 없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장호권 씨는 판결 선고 후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명예회복이 기쁘다"며 "이제라도 사법부가 정의가 살아 있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 다행"이라고 밝혔다. 유족 측은 검찰이 항소하지 않고 무죄 판결이 확정될 경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장 선생의 무죄 판결은 정치권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가 헌법 정신에 어긋났음을 확정한 이 사건이 박근혜 당선인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인 1975년 2월 21일, 민주 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는 장준하. 그 오른쪽은 함석헌. ⓒ연합뉴스 |
장준하는 누구?
장 선생은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끊임없이 비판하다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장 선생은 해방 후 1953년 잡지 <사상계>를 만들어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 베트남 파병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독재 정권은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1970년 <사상계>를 폐간시키고, 10월 유신 후 1974년에는 장 선생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투옥했다. 공소 제기부터 확정판결까지 6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절차가 진행됐다. 당시 장 선생은 유신헌법 개정을 요구하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며 독재 정권에 항거했다.
이후 장 선생은 협심증으로 인해 석방됐으나, 이듬해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원인을 두고 정치적 타살 의혹이 짙게 제기됐으며,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37주기를 앞둔 작년 8월 1일, 장 선생 유해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첫 검시가 이뤄지면서 다시금 타살 의혹이 불붙었다. 고인의 머리 오른쪽에서 외부 충격 결과로 추정되는 6cm 크기의 구멍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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