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빠뜨리기 어려운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장준하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서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한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철권통치를 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장준하는 박 전 대통령과 한창 대립각을 세우던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로부터 37년. 장준하 타살 의혹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관련 기사 : "고 장준하 선생 머리에 6㎝ 구멍"…'타살' 의혹 재점화)
'친일'과 '독재'라는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겨냥한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장준하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44년, 26세이던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이때 장준하는 목숨을 걸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장준하는 잠시 중국군 진영에 머물다, 6000리 길을 걸어 충칭으로 간다. 충칭에는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가 있었다. 그곳에서 장준하는 고대하던 광복군으로 거듭난다. 광복군 장교 장준하는 국내 진공을 꿈꾸며, 동료들과 함께 미군 OSS(CIA 전신)에서 특수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하면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실행되지 않는다. 해방 후 한반도는 분할 점령되고,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러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상황이 임정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던 이때, 장준하는 귀국해서 김구의 비서로 활동한다. 김구의 곁을 떠난 후, 장준하는 이범석이 만든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몸담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장준하는 정치 일선에서 한 걸음 떨어져 문화 사업에 힘을 쏟는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잡지 <사상계>를 만든 것이다. 1953년 장준하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이던 <사상>을 인수해 <사상계>를 창간한다. <사상계>는 자유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선도 지키지 않던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던 지식인들은 <사상계>에 호응했다.
김건우 박사(서울대)는 연구서 <사상계와 1950년대 문학>(소명출판, 2004년)에서 <사상계>의 이념이 기독교에 바탕을 둔 '문화적 민족주의'이며, 1920년을 전후해 태어나 월남한 '서북'(평안도) 출신 지식인들이 <사상계>를 주도했다고 밝혔다. 장준하, 김준엽, 함석헌 등 <사상계>의 편집위원 및 필자들의 다수는 평안도 출신이다.
평안도는 조선 말기 이래 기독교가 널리 퍼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한 곳으로, 해방 직후까지 우익 세력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반공 성향이 강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에 기본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사상계> 그룹의 분위기도 이러한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인 1975년 2월 21일, 민주 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는 장준하. 그 오른쪽은 함석헌. ⓒ연합뉴스 |
장준하와 <사상계>, 그리고 박정희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고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선 후, 장준하는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고 박정희가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그 후 장준하와 박정희의 본격적인 대결이 펼쳐진다.
하지만 사상계연구팀이 펴낸 <냉전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사상계>(소명출판, 2012년) 등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장준하를 중심으로 한 <사상계> 그룹이 처음부터 박정희 세력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함석헌을 제외한 <사상계> 그룹 인사들 사이에는 5.16쿠데타 직후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상계> 경제 부문 편집위원들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및 각 부처 장관의 고문 등을 맡은 것도 그러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이와 달리, 함석헌은 "이제 해방이 되려는 이 민중"의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며 5.16쿠데타 세력을 경계했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라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5.16 주도 세력이 4월혁명의 성과를 이어받기를 기대한 심리는 일부 <사상계> 인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5.16 직후, 서울대 총학생회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혁명 과업' 수행에 미온적이던 민주당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쿠데타 직후 그 주도 세력에 대한 일정한 기대감으로 표현된 셈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이집트 등 제3세계 국가에서 군인들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민족주의 성향의 정책을 폈던 것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분위기 형성에 일조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사상계>는 쿠데타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사상계> 그룹으로 분류되던 인사들은 새로운 집권 세력에 비판적인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뉘는데, 장준하는 전자의 인사들과 함께 박정희 세력에 맞선다.
1962년 7월부터 <사상계>에는 박정희 세력을 비판하는 글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쿠데타 세력이 애초 공언했던 것과 달리 민정 이양을 미루는 등 4월혁명을 이어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계속하면서 생긴 변화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장준하는 더 강도 높게 박정희를 비판한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각계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한일협정을 추진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광복군 출신 장준하는 전국을 돌며 '박정희 정권이 대일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장준하는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자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장준하는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그룹과 박정희 대통령의 유착 의혹이 짙게 제기된 사안이다.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놔두지 않았다. 거듭 장준하를 체포하고 옥에 가뒀다. 1970년에는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10월유신 이후인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장준하에게 15년형을 선고했다.
가석방된 후에도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그리고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대에 그러한 의혹을 공론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37주기를 앞둔 8월 15일 타살 의혹에 힘을 실어주는 내용이 세상에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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