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투쟁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1월 20일 일요일 오후 평택역 앞 천막 농성장에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이하 '비정규직지회') 서맹섭 지회장을 만났다. 서 지회장은 이 천막을 지키면서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해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쌍용자동차 문제를 알린다. 242일 간의 천막 농성 기간 동안 1만4000명의 시민이 서명을 해주었다. 시민들은 <의자놀이>도 900여 권 샀으며, 투쟁 기금도 꾸준하게 넣어주고 있다.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됐다고 뉴스에서 봤는데, 왜 아직도 해요?"
"무급자만 복귀하는 거고요. 그것도 회사가 임금 소송 취하하라고 해서 아직 해결이 다 안 됐어요."
"말씀 좀 묻겠는데요. 안정리 20번 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20번이요? 여기 건너셔 가지고요, 저 가운데 골목 말고 좌측 골목으로 가시면 정류장이 있어요."
▲ 평택역 앞 천막농성장 ⓒ연정 |
그는 평택역 앞을 오가는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국정조사의 필요성과 쌍용차 문제의 진실을 알린다. 때로는 길이나 교통편을 묻는 시민에게 안내를 하기도 한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투쟁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거나 송전탑 농성장에 사안이 생기면 지역 시민단체, 지역 민주노총과 소통해서 대응하는 것도 그가 하는 일 중 하나다. 2009년 쌍용자동차 86일 굴뚝 농성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 비대위원 활동도 하고 있다. 서 씨는 인터뷰 전에 다음날 아침 선전전 때 사용할 유인물을 복사해왔다고 했다. 다음날인 21일 오전에는 평택역을 포함한 수도권 주요 전철역에서 쌍용차 사측과 기업노조(위원장 김규한)가 국정조사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하여, 이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에서는 서맹섭 지회장을 포함하여 총 4명의 쌍용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투쟁을 함께하고 있다. 조합원은 생계 활동을 하는 4명을 포함하여 총 8명이다.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서는 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이 1월 20일로 62일째 문기주·한상균 두 명의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송전탑 밑에서는 비정규직지회 한윤수 사무국장이 고공 농성 조합원들을 지원하고, 서울 대한문에서는 유제선 조직부장이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비록 인원은 많지 않지만, 이들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국정조사 실시와 해고자 복직 등 큰 틀에서 쌍용차 투쟁에 함께하면서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다.
하지만 쌍용차에서 비정규직도 싸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어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당시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 숫자가 정규직 2646명이 아니라 비정규직 350명을 포함한 3000명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왼쪽 문은 정규직,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
전라남도 구례가 고향인 서맹섭 씨는 농사일을 하는 부모님을 돕다가 농고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무와 배추를 심고, 소를 키우고, 트랙터와 경운기를 몰았다. 졸업하고 군에 입대한 후에는 경찰관의 꿈을 키우며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제대 후에 3번 도전했다가 떨어지자 2000년 쌍용자동차에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평택 쌍용자동차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1년 근무하고, 평택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역시 친구들의 권유로 다시 쌍용차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하청업체인 동산기업으로 들어왔다가 2005년에 영일기업으로 옮긴 후에 2009년 5월 해고될 때까지 그곳 소속으로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입사할 때 쓴 이후 거의 쓴 기억이 없다. 업체가 바뀌어도 근속과 고용은 자동 승계되었다.
차체2팀에 들어간 서맹섭 씨는 CO2 용접이나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 작업), '도아'와 휀다(펜더)를 조립하는 일을 했다. 서맹섭 씨는 입사 초기 '무쏘'를 잠깐 생산하다가 이후 거의 '로디우스'를 만들었다. 서 씨와 직장이 가장 먼저 그 일을 배웠고, 나중에 온 정규직들에게 서 씨가 일을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서 씨는 10명 내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있는 차체2팀 로디우스 3직에서 근무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일을 같이 배우고, 교대 근무를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1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차문을 조이는 작업을 했다. 왼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오른쪽 문은 비정규직이 달기도 했다. 다만 용접 일은 옷에 구멍이 난다는 이유로 정규직들이 기피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했다.
2005년 노동부의 '사내 하도급 업체 특별 지도점검'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12개 하청업체 중 동산기업과 영일기업 등의 4개 공정 44명에 대해 불법 파견 판정이 났다. 2006년 각각 벌금 100만 원씩 약식명령이 청구되었다. 당시 서맹섭 씨가 일하던 공정은 불법 파견 혐의로 노동부 조사를 받기도 했었다.
"평택에서 제일 큰 대공장이니까 아무래도 임금이나 복지 면에서 다른 데보다 좋을 거라 생각했었죠. 실질적으로 해보니까 정반대였어요. 한번 몸 닿으니까 딴 데 가서 일하는 게 만만치가 않아서 그냥 견뎌본 건데. 임금은 적어도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했지."
대통령상 받은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을 꿈꾸다
서맹섭 씨는 7년 동안 월차를 두 개밖에 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웃돌았다. 입사 초기 주야 2교대를 할 때, 가장 많이 받아본 임금이 170만 원이었다. 상여금 600%를 12개월로 나눈 금액을 포함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2007년 물량 감소로 주간 작업만 하면서 세금을 떼고 110~120만 원 정도 받았다. 비정규직에게도 호봉제가 있긴 하지만, 호봉 간 차이가 시급 25원(1일 8시간 200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다. 5년 다닌 사람이나 10년 다닌 사람이나 임금이 거의 비슷했다. 늦게 입사한 사람이 잔업·특근을 많이 하면 오래 다닌 사람보다 임금이 많아지기도 한다.
▲ 서맹섭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지회장 ⓒ연정 |
"2005년에 정규직 노동자들하고 같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비용 절감 사례를 발표하는 대회였는데, 쌍용차 생산 과장이 파워포인트를 띄워주고 저랑 직장이 그걸 보면서 발표를 했어요."
서맹섭 씨는 2005년 9월, '전국품질분임조경진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적도 있다. 상패는 정규직 직장이 받고, 메달은 서 씨가 받았다. 같이 출전해서 은상을 받은 정규직들은 2호봉 승급에 특근이 달리는 등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회식 한 번이 다였다. 그래도 그는 수상으로 얻은 고과 점수 덕분에 정규직을 뽑으면 자신이 1순위로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 꿈을 안고 그는 5년 동안 열심히 일만 했다. 2009년 '굴뚝 농성 재판'에서 굴뚝에 지붕이 없어 주거침입죄 성립이 안 되면서 2심까지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그게 그 상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며 서맹섭 씨가 웃는다. 경찰 조사 받을 때 상 받은 것 있냐고 묻기에 노무현 대통령상 받았다고 대답했었단다.
5년 동안 비정규직 1500명 해고와 비정규직 노조 설립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서맹섭 씨는 정규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5월 해고되었다. 서 씨는 '잘하면 해고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쌍용차에서 10년 가까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못해도 해고되고 잘해도 해고되니 중간만 가야 된다'는 그것 하나 배웠단다.
서 지회장이 입사할 당시 쌍용차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700명이 있었다. 5년 동안 1500명의 노동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인 강제 해고로 쫓겨났다. 2004년도에 500명, 2006년도에 500명이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2008년에 정규직 노동조합의 전환 배치 합의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 350명이 쫓겨났다. 그리고 2009년 싸움이 진행될 때도 알게 모르게 1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리도 없이 쫓겨났다.
"2008년 8월에 전환 배치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비정규직들이 일하던 자리에 정규직들이 와서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때 합의서가 두 번 나왔어요. 한 번은 비정규직에게 희망퇴직을 안 받는 대신 휴업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일주일 만에 합의서가 바뀌어버린 거야. 위로금 4개월분 줄 테니까 350명은 이것 받고 나가라는 거야."
2008년 10월 말, 당시 쌍용자동차지부 1기 집행부(지부장 정일권)는 비정규직 347명에 대한 휴업을 전제로 하는 전환 배치에 사측과 합의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비정규직 350명을 희망퇴직시키기로 사측과 합의하는 일이 발생했다.
▲ 2008년 11월 4일, 쌍용차 정규직 전환 배치에 따른 비정규직 희망퇴직 관련 노사합의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
쌍용자동차 사측은 하청업체에 할당량을 주어 강제적인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사측은 '지금 희망퇴직을 하면 나중에 사람 뽑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등의 회유와 협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다. 지저분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 했던 일을 기피했던 정규직들은 2008년 전환 배치 당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들이 하던 힘든 공정에 오게 됐다. 관리자들은 비정규직이 쫓겨난 자리를 두고 정규직들에게 "여기 안 가면 잘린다. 잘려나갈래? 아니면 여기 갈래?"라고 윽박질렀다. 서맹섭 씨가 하던 용접 일도 그가 쫓겨나면서 정규직이 와서 하게 된다.
말 한마디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감시 속에 정규직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2008년 10월 22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참 어렵게 노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동 주체 3명이 이름 걸고 띄웠어요. 정규직 활동가들이 정규직이랑 노무팀 반발을 통제하고 엄호해 주면서 많이 도와줬죠. 그래서 무사히 띄울 수가 있었어요."
▲ 2008년 10월 23일,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설립 보고 대회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 640명 중 150명이 가입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강제 휴업·희망퇴직·전환 배치 철회를 요구하며 싸웠지만, 사측은 업체를 강제 휴업시켰다. 그리고 희망퇴직에 동의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통보하기 시작했다. 서맹섭 지회장은 2009년 5월 해고자가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투쟁
서맹섭 지회장은 그 당시 정규직들이 한 번 더 휴업을 나가더라도 힘을 합쳐서 전환 배치를 막았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고용 안정을 위한 방패로 생각하는 정규직들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번 밀리니까 회사는 걷잡을 수 없이 치고 들어왔다.
"2008년도에 정규직 전환 배치를 막아냈어야 돼. 그게 시발점이 된 것 아닌가. 인건비 싼 비정규직 다 쫓아내니까 그 다음에 쫓아낼 사람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때 우리가 한참 외쳤던 게 '우리 나가면 당신들도 나간다'였어요. 정규직도 칼바람 들어온다, 우리 쫓아내면 안 된다, 전환 배치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못 막아 버린 거지."
▲ 2009년 4월, 회사 내에서 중식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는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
2008년 12월 초에 한상균 지부장이 당선되자마자 사측은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그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조합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잠을 자면서 투쟁했다. 당시 한상균 지부장 집행부는 일자리 나누기(5+5와 3조 2교대)와 비정규직 고용안정기금 12억 원 노동조합 출연 등 정리해고 없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 수 있는 자구책을 제시하였으나,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리해고를 진행하였다. 비정규직지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살기 위한 이 투쟁에 흔쾌히 동참했다.
86일 간의 굴뚝 농성과 휴지 조각이 된 8.6 합의
2009년 5월 13일, 서맹섭 지회장(당시 부지회장)은 정규직 노동자 두 명과 함께 쌍용자동차 내에 있는 굴뚝에 올라가 86일 간의 고공농성을 한다.
"저는 비정규직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서 굴뚝에 올라간 거예요. 살기 위해서 올라간 거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쫓겨났던 게 얼마나 억울해요. '여기 누가 온다니까 너 나가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열심히 일만 했던 사람들인데…. 또, 분사를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안 된다는 요구도 했죠."
▲ 2009년 7월, 86일 간의 고공농성이 진행된 쌍용차 굴뚝 ⓒ연정 |
굴뚝에 처음 올라갈 때,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올라갔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왜 내려왔나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때 야무지게 해결했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철탑에 올라갔겠나 싶어서다. 헬기 소리와 쏟아지는 최루액을 견디며 86일을 버틴 경험이 있는 그는 지금 철탑에 올라가 있는 조합원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고공 농성자들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목숨 걸고 올라가 있는 분들이에요."
굴뚝 농성 50일 즈음부터 서 씨는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속이 다 망가졌다. 2009년 8월 6일 노사 합의 이후 경찰에 연행된 다음 병원에 입원했던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다. 8.6 합의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19명을 10월 1일자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1일자로 복귀시키겠다며 9월에 비정규직 복직 대상자 명단까지 요구했던 사측은 10월에 면접을 보라고 했다. 결과는 전원 불합격이었다. 면접 과정에서 사측은 "도장반에 들어가서 도장똥 제거하다가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등의 말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두 차례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 결과 연배가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큰 상처를 받고 복직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17명이었던 복직 대상자는 8명으로 줄었고, 이 중 생계 활동을 위해 나간 조합원을 제외하고 현재 4명의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정규직으로 공장에 돌아갈 겁니다
쌍용자동차가 비정규직 19명을 복직시키기로 했던 8.6 합의를 이행하지 않자 비정규직지회는 곧바로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평택공장 앞에서 복직을 요구하는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2010년 8월에는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노사 합의서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수원 지방법원 평택지원에 '확약서 이행 가처분신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는 쌍용자동차 이유일·박영태 공동 관리인의 서울 집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당시, 베일에 쌓여 있던 공동 관리인의 집을 찾아냈던 이들이 바로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었다.
"그때 해결 못하고 4년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정말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괴로워요. 슬픈 현실이지.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내려왔는데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비정규직 단 한 명도 못 들어가 있고, 길거리에서 계속 싸움을 만들어가야 하니…."
▲ 2010년 12월 박영태 쌍용자동차 공동 관리인 집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서맹섭 지회장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
비정규직지회는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 그룹이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이후에는 인도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한다. 2011년 말에는 4.11 총선을 앞두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8. 6 노사 합의 과정에 참여했던 평택 지역 국회의원인 새누리당 원유철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장선 의원 사무실 앞에서 6개월 동안 텐트 농성을 했다. 그 결과 쌍용차 평택공장 본관에서 쌍용차 사측과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사측은 "명분상 1~2명 정도 검토해볼 수 있다",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만들어지는 자리가 맞지 않다.", "지금의 만남 형태가 적절하지 않다"는 등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태도를 보여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쌍용자동차는 비정규직을 신규 채용하고 있음에도 2009년 노사 합의에서 약속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 사이 쌍용차는 분사를 진행하여 기존에 희망퇴직한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해 일을 시켰다. 쌍용차는 분사업체에 들어온 노동자들에게 2013년까지 연봉 3500만 원을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연봉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싫으면 나가라'는 태도에 분사업체 노동자들은 불만을 억누르고 근무를 하고 있다. 현재 쌍용자동차 안에서는 800명에 가까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기존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 420명이고, 분사업체 소속 노동자가 약 360명이다.
비정규직지회는 현재 불법 파견 집단소송 중이다. 2011년 4월 29일,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에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및 체불 임금 지급 소송'을 신청하여 2년에 가까운 심리를 진행하고 있는 쌍용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곧 선고를 앞두고 있다.
"이미 회사가 복직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8.6 합의는 실효성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우리는 정규직으로 공장에 돌아갈 겁니다. 2006년도 쌍용자동차가 파견법을 위반해 우리는 이미 정규직이 됐어야 할 사람들인데, 비정규직으로 강제로 쫓겨난 거잖아요. 다들 2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자동 정규직이 돼야 될 사람들인데, 또다시 비정규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얘기입니다."
비정규직지회는 정규직으로 복직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쌍용자동차지부(정규직 노조)의 권유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현재 지부에서도 이 요구안을 안고 함께 투쟁하고 있다. 서 지회장은 재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비정규직 투쟁을 넘어 정규직·비정규직 공동 투쟁으로
2010년 2월 쌍용자동차 정규직-비정규직 노조 1사 1조직이 투표 조합원 97%의 찬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이전에도 같은 금속노조 소속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투쟁을 했지만, 비정규직지회는 금속노조에 직접 가입했었다. 비정규직지회는 지난해 총선까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독자적인 투쟁을 했다.
대한문에 분향소를 설치할 즈음인 지난해 봄, 비정규직 문제를 안고 함께 싸우겠다는 현 4기 집행부(김정우 지부장)의 제안과 설득이 있었다. 이에 공감한 비정규직지회는 그 후 해고자 복직과 살인 진압 책임자 처벌, 회계 조작 진상 규명 등 5대 요구안을 바탕으로 하는 지부 투쟁의 큰 틀 속에서 평택역·대한문·평택 송전탑에서 정규직과 공동 투쟁을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회의 한 번 하는 게 쉽지 않은 단점은 있다. 그나마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어 소통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는 게 다행이다.
▲ 2009년 6월 6일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당시, 평택공장 안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총파업 투쟁 승리 문화제' 상징 의식 장면 ⓒ연정 |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떠나 하나 된 노동자의 힘으로 함께 투쟁하는 것이 소중하다"며 서맹섭 지회장이 쌍용자동차 1사 1조직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쌍용차 정규직-비정규직 공동 투쟁의 의미를 설명한다. 서 지회장은 각자 맡은 자리와 역할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비정규직 얘기가 기대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도 한다. 또, 비정규직 요구 달성을 위한 투쟁의 길이 많이 열려 있지 않은 점도 안타깝다고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지도 잘 몰라요
"형님, 고생 많으시죠. 잠깐 통화돼요? 범대위 선전물 나오잖아요. 아까 내가 메일 들어가서 퍼갔는데요. 내일 아침 평택역에서 쓰려고. 앞면에 타이틀로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라는 글이 있어요. 이것은 약간 안 맞는 것 같아요. '쌍용차 해고자 및 비정규직 정규직화 복직'으로 쓰든지, 아니면 '정규직화'를 빼버리든지."
인터뷰가 진행되던 1월 20일, 서맹섭 지회장이 지역 범대위('살인 정권 규탄! 정리해고 철폐!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관계자에서 전화를 한다. 새로 나온 범대위 선전물 헤드라인에 있는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라는 문구가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비정규직 정규직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거니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우는 쌍용차지부의 경우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복직해야 한다는 내용을 더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는지도 잘 몰라요. 비정규직이 집회 사회를 보고, 발언하고, 송전탑에 올라가 있는데도 몰라요. 그런 게 답답한 거죠. 국회의원들이 여기 철탑에 왔는데도 쌍용차에 비정규직이 있는지도 모르고, 철탑에 비정규직이 올라갔는지도 몰라요."
"느그 걸 왜 느그가 거냐?",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정규직화' 현수막 건 사연
쌍용자동차지부 철탑 고공농성 40일이 되어갈 즈음인 지난해 말, '비정규직 정규직화'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농성 초기에 걸린 '해고자 복직'과 '쌍용차 국정조사' 현수막 사이에 '비정규직 정규직화' 현수막을 건 사람이 바로 서맹섭 지회장이다.
"비정규직 동지가 저 철탑에 있는 한 비정규직의 요구안인 '비정규직 정규직화' 플래카드는 걸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비정규직 목소리만 내겠다는 게 아니라 지부라는 큰 울타리에서 같이하면서 우리 목소리를 내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그 플래카드를 거는 문제로 논의를 해달라고 지부 임원들한테 요청을 했어요.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곳곳에서 투쟁을 하느라 논의할 여건이 안 되었는지 지부에서는 기다려달라는 말만 했어요. '해고자 복직 플래카드가 있는데, 굳이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걸어야 되냐? 우리 내부는 다 정규직화 투쟁을 알고 있다'고 하기에 또 한 번 설명을 해주면서 복기성 비정규직 동지가 있는 한 걸어야겠다고 했어요."
몇 차례에 걸쳐 '비정규직 정규직화' 현수막 거는 것과 관련해 지부 내 논의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지역 단체에도 얘기를 했는데, 얘기해보겠다는 대답만 들었다. 결국 서맹섭 지회장은 직접 현수막을 제작하고, 단체 활동가 한 명과 같이 송전탑에 가서 현수막을 걸었다.
▲ 1월 20일,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 송전탑 고공 농성장. 가운데 있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현수막을 서맹섭 지회장이 걸었다. ⓒ연정 |
비정규직의 요구가 담긴 현수막을 직접 걸면서 서 지회장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송전탑 주변에 있던 경찰은 "느그 걸 왜 느그가 거냐?"고 했단다. 심지어는 경찰이 지부 조합원에게 "정규직, 비정규직 함께 싸운다더니 비정규직 건 다 빼버리고 당신들만 살라고 하냐? 이건 너무 잘못된 것 아니냐? 이건 당연히 걸어야 되는 건데, 정규직이 걸어야 되는 것 아니냐? 여기서도 차별하냐?"고 했다고 한다. 경찰은 앞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걸고, 같이 얘기하라는 훈계까지 했다고 한다.
쌍용차 정규직-비정규직 아름다운 투쟁을 조금만 더 알아줬으면
범대위에서 마련한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5대 요구안에도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는 들어 있지 않다. 다섯 번째 항목에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가 들어 있긴 하지만, 이는 쌍용차 비정규직 문제라기보다는 전체 노동자 문제에 관한 요구안에 가깝다. 범대위에서 만든 선전물에는 비정규직 얘기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야 들어갔는데, 비정규직 350명이 해고되었다는 내용 정도에 불과하다. 범대위 서명 용지에 들어가 있던 '비정규직 350명 해고' 내용이 최근에는 빠지는 일도 있었다. 이 서명 용지에는 (비정규직을 포함한 3000명이 아니라) '노동자 2646명이 쫓겨나서'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무신경이 불러일으킨 고의'로 보인다. 비정규직지회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 지부와 범대위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해주려고 하고 선전물에도 관련 내용을 넣으려는 노력은 하고 있기 때문에 점점 나아지고 있단다.
▲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5대 요구안 관련 최근 범대위 서명 용지. 첫 번째 줄에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를 포함한 3000명이 아니라 '2646명의 노동자들이 쫓겨나서'라는 문구가 있다. ⓒ연정 |
"저는 국회의원들 만나면 얘기해요. '내가 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이고, 2009년 굴뚝에서 86일 동안 있었다. 그렇게 싸웠는데도 우리 비정규직 동지가 또다시 철탑에 올라갔다. 제일 먼저 해결할 수 있는 게 비정규직 문제였는데,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 쌍용차 투쟁에는 정규직만 있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이 함께 있다. 모든 게 다 정규직 중심으로만 부각되고 있는데, 이 안에도 약한 사람이 있다. 약자를 한 번 더 고민해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쌍용차 투쟁에 오는 국회의원들도 쌍용차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이들이 6년째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서 지회장은 그 이유가 각종 보고용 문서 자료나 선전물에 쌍용차 비정규직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쌍용차 안에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있다는 걸 정확하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서울 대한문에서, 철탑 위아래에서, 평택역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쌍용차 투쟁을 하고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될 것이다 될 것이다' 긍정적인 주문을 걸고 있는 날들
서맹섭 씨는 11세, 7세, 3세, 20개월 된 네 아이의 아빠다. 그나마 아직 애들이 어려서 큰돈이 안 들어가는 게 다행이란다. 태어나자마자 심장에 구멍이 생긴 선천성 심실 중격 결손증으로 많은 걱정을 하게 했던 막내는 엄마, 아빠의 정성과 민중가수 박준 씨 등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서 씨는 아이들 때문에 서울에 가지 못하고 평택역 천막 농성장을 맡게 되었는데, 일주일에 집에서 자는 날이 두 번 정도다. 그나마도 밤 9~10시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바로 농성장에 나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 씨에게 묻는 것 중 하나가 생계 문제다.
"지부에서 생계비 받는 걸로 살아요. 애기 기저귀나 분유는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제가 회사 다닐 때도 큰돈은 안 만졌기 때문에 부족하지만 거기에 맞춰서 살아요. 쓰는 것 좀 줄이고, 애들이 많아서 외식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집에서 자장면 시켜서 먹고요."
그는 주말이면 아빠와 놀이터에 가서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뿌리치고 나오는 게 힘들다고 한다. 고공 농성을 하고 천막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은 요즘이다. 그는 요즘 '안 된다'가 아니라 '될 것이다, 될 것이다'라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주문을 걸고 있다. 86일 간의 굴뚝 농성으로 살이 10kg 빠지고, 농성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두두두두' 헬기 소리 환청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불면증의 고통과 싸우며 투쟁을 이어온 서맹섭 씨는 최근 많이 지친다고 했다.
"요즘 많이 힘들고 지쳐요.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 아이들 생각하면서 이 어둠을 뚫어보려고 나도 모르게 지금 힘을 내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애들이 있기 때문에 힘이 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우리 애들이 컸을 때는 이 땅에 비정규직 차별이 없어야 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란 게 없어져야죠. 이런 삶을 또다시 물려준다는 건 부모로서 말이 안 되죠."
▲ 평택 쌍용자동차 앞 송전탑 농성장 앞, 쌍용차지부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들. 첫째 줄 가장 오른쪽이 서맹섭 지회장.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비정규직지회 |
어떤 때는 '너무 지쳤다. 이거 정말 계속해야 되는 건가? 시골 가서 농사나 지을까?'하며 갈등할 때도 있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쌍용자동차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란다. 서맹섭 씨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러움을 느끼지 않고 일터에서 평등하게 사는 날까지 먼저 싸우는 동지들이 좀 더 투쟁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한다.
"평범한 직장에서 일하고, 우리 아이들 아프지 않고 잘 크고,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건 다 벌어서 해줄 수 있는 게 행복 아닌가. 로또라도 한 번 됐으면 좋겠는데, 그건 꿈에도 안 될 거고.(웃음) 나중에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이 있어요. 우리가 지금 많이 힘들고 지쳐 있는데요. 함께하는 동지들이 있으니까 그 힘으로 조금만 힘내서 갔으면 좋겠어요. 올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아니라 모두 정규직으로 공장에 들어가서 막걸리 파티를 꼭 하고 싶어요. 철탑에 있는 세 동지들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게 조금만 더 힘냈으면 좋겠습니다."
- 쌍용차 희망버스 연속 기고 ① "20년 전 신입사원 땐 이렇게 울게 될지 몰랐다" ② 철탑 위 아빠는 딸 입학식에 갈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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