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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신입사원 땐 이렇게 울게 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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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신입사원 땐 이렇게 울게 될지 몰랐다"

[쌍용차 희망버스 연속 기고·①] 쌍용차 20년 노동자 김정욱

오는 1월 26일 오후 3시 평택역에서 '쌍용자동차 희망버스' 행사가 열립니다. 다산인권센터는 희망버스 행사에 앞서 ①대한문을 지키는 남자 김정욱 이야기 ②정리해고에 묻혀버린 비정규직 이야기 ③송전탑에 올라간 남편을 기다리는 가족 이야기라는 주제로 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기고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송전탑 이야기를 꺼내자, 눈물을 글썽인다. 송전탑으로 올라간 이들은 견딜 만하다고 도리어 힘을 주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그는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세상을 등진 23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가족을 생각해도 그렇고,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고 송전탑으로 올라간 한상균·문기주·복기성, 이 세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난다는 그를 만났다.

스물세 살 청년, 김정욱

그는 1993년 7월 쌍용자동차에 입사했다. 그해는 소위 '무쏘 신화'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쌍용자동차가 '잘나가던 때'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부산의 신발 공장에서 살인적인 12시간 맞교대 노동을 버티다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첫 직장으로 그는 쌍용자동차에 입사했다. 그때가 23세. 20년 뒤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때를 그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에 부산에 있는 신발 공장에 다녔어요. 집이 전남 곡성인데, 그 당시 곡성에는 공장이 하나밖에 없어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타지로 나가야 했어요. 그게 대부분 서울 아니면 부산이었거든요. 부산에서 신발 공장 다닐 때 주야 12시간 맞교대를 했는데,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힘든 기억이 있어요."

그와 함께 쌍용자동차에 입사한 동기만 해도 1300명이 넘었다. 그만큼 잘나가던 때였으니 사람도 많이 뽑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공장 생활과 함께 노동조합 활동은 그에게 또 다른 활력이었다. 입사 후 풍물을 배우고, 문예 활동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노동조합 활동까지 시작한 그는 입사한 지 9개월 만에 노조 문화부장 역할까지 했다. 그렇게 노동조합 활동은 스물세 살 청년을 세상에 눈뜨게 했다. 하지만 그 잘나가던 쌍용자동차도 1997년 외환 위기를 버티지 못했다. 결국 1998년 대우자동차로 매각되면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고통이 시작됐다.

"1998년에 쌍용차가 대우로 매각되면서 시작됐어요. 그때부터 사측의 노동자 길들이기가 노골적이었죠. 구조조정, 고통 분담 같은, 그 시절에 회자됐던 우려가 현실화된 거죠. 그리곤 대우 부도 나고 2003년 다시 매각 과정 거치고, 2006년 희망퇴직 받으면서, 현장 노동자들의 불안과 좌절은 극도에 달했던 거죠. 상하이차는 신차 개발도 안 하면서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2009년 회사가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자포자기 상황에 빠진 거죠."

위기의 책임을 떠안은 노동자

▲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김정욱 씨. ⓒ김정욱 제공
수차례의 파업과 투쟁을 통해 고통 분담과 회사를 살리기 위한 대안까지 제시했지만, 사측과 정부는 이들을 외면했다. 가혹하리만큼 노동자들은 공장 밖으로 밀려났고, 살아남아도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2009년 77일간의 '옥쇄파업'은 당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사실 모두 갖는 의문이었어요. (경영 부실에)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누구도 해주지 않았거든요.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라 딱지 붙이면서도 왜 파업을 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경영을 잘못한 게 우리 책임은 아니잖아요. 백번 양보해서 우리도, 회사가 어려우니 회사 살리기 위한 여러 방안도 제시했어요. 근데 무조건 구조조정, 정리 해고로 일관하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결국 현장의 노동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었다. 운 좋게(?) 잘리지 않은 사람은 '산 자'였고, 운 나쁘게 잘린 사람은 '죽은 자'가 돼버렸다.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놓은 현실은 스물세 명의 아까운 목숨이 버려지는 절망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이 절망과 좌절의 책임에 대해 이 사회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그곳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들이대는 것조차 사치일까?

함께 살자

그는 지금 대한문 앞 농성장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는 4월이면 농성을 시작한 지 꼬박 1년이 된다. 2009년 공장에서 쫓겨난 후부터 생각하면 3년째 거리 생활이다. 그동안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다 해봤다던 그는 대한문에서 '희망'을 만났다고 한다.

"대선 끝나고 농성장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방문했어요. 우리가 좌절해 있을까봐 걱정이 돼서 오시는 거예요. 어떤 분은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오셔서 놓고 그냥 가시는 거예요.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해도 그냥 웃으면서 가시더라고요.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조용히 왔다가 손 한 번 꼭 잡아주시고 가는 분들 때문에 그나마 버티고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대한문 앞에서는 '함께 살자 농성촌'이라는 이름으로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과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그리고 핵발전소 반대 투쟁 중인 사람들까지 함께 농성 중이다. 이들이 내건 '함께 살자'라는 말은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걸었던 구호이기도 했다. 그는 이 말이 좀 더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한다. 누구는 짓밟고, 누구는 짓밟히고, 또 누구는 살아남고, 또 누구는 죽어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 함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몸부림치는 것이라 한다.

스물세 살에 쌍용자동차에 입사한 그는 이제 마흔세 살이 됐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묻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헷갈린단다. 2009년 이후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한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2009년 이후의 삶은 그냥 멈춰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정지된 삶, 혹은 정지당한 삶을 살아내는 그의 모습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를 만나러 26일 쌍용자동차로 향하는 희망버스가 출발한다. 아니 우리의 모습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정지당한 우리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 쌍용차로 향하는 희망버스 행사 웹자보 ⓒ다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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