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싱사가 된 하이힐 '차도녀', 이젠 길바닥 단식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싱사가 된 하이힐 '차도녀', 이젠 길바닥 단식을…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6>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

긴 생머리에 스커트, 7cm의 하이힐을 신고 다니던 차도녀(차가운 도시의 여자)가 공장 미싱사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대학생이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권리에 대해서 알려주는 노동 선생님이 되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단풍이 붉게 타들어 갈 때, 그 노란색과 붉은색 사이에 드러나는 파란 하늘을 누워서 바라보며 자유로움을 느끼던 예쁜 여대생이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는 이들에게 파란 하늘을 되찾아 주겠다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그 시간을 지나며 그녀는 구로공단 남성전기 노동조합 교육부장,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진보신당 전 대표 등을 거치며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동현장 구석구석을 쉼 없이 누벼왔다. 바로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23일째 곡기를 끊고 길바닥에 앉아 있다. 왜?

"87년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쳐 독재 정권을 끌어내렸는데, 그래도 노동은 해방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노동은 더 잔인한 시장에 내던져졌다. 한발 한발 나아가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멈춰선 지점도 바로 거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전국의 사회적 약자들(비정규직 노동자, 정리해고 노동자, 자영업자, 철거민 등)의 생존권이 더욱더 위협받고 있다. 그들의 고통이 2011년이 된 지금에도 그치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노동 현실은 여전히 파란 하늘이 아닌,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임신 중일 때 수배 중이었는데, 배 속에 있는 아들에게 "엄마는 노동운동하는 사람인데 노동운동하려면 전국을 다 돌아다녀야 하고, 또 농성도 해야 하고, 교육도 하러 다녀야 해. 그래서 우리 아들하고 많은 시간을 놀아주지 못할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해주곤 했다. 나중에 생각 하니 그때는 내가 험한 노동운동을 하면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지레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한 것 같다"

그렇게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달래곤 하던 그녀가 지금은 대한문 단식 농성장에 앉아 고 3인 아들에게 간식하나 만들어 먹이지 못하는 미안함을 문자와 전화로 또 달래고 있다. 1990년대의 풍경이 공간과 통신수단만 바뀌어 있을 뿐 참 모질게도 똑같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 사람들이 듣는다. 사람들이 모인다.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한다.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던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비정규직의 설움과 부정의함, 노동문제의 근본적 해결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대한문 단식천막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이건범의 '내 청춘의 감옥'에서 읽었던 '갇힌 자가 흩어진 자들을 모은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한진중공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지 23일째(8월4일자로 단식 23일째)다. 건강은 어떤지?

보시다시피 건강하다. 요즘 트위터에서 숨겨진 미모가 드러난다고 아우성이다(웃음). V라인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조금 더 있으면 V라인도 드러날 것 같다(웃음). 이번 단식농성을 혼자 했으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여럿이 함께하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함께 한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된다. 장기전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몸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아침마다 근처 사우나에 가서 냉온 욕도 하고 해서 컨디션은 괜찮다.

▲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단식하면서 어떠한 생각을 많이 하는지?

아무래도 밥 생각이 많이 난다(웃음).

가장 생각나는 음식은?

감자, 삶으면 속이 하얗고 김이 모락모락 나며 쩍쩍 갈라지는 그런 감자가 생각 난다. 그리고 배추전! 밀가루에 입힌 배추전도 그렇게 생각이 나고, 또 요 며칠은 된장에 부추 썰어 넣고, 멸치 가루 듬뿍 넣어서 끓인 된장찌개에 쓱쓱 비며 먹는 것도 생각이 난다(웃음). 옛날에 어머니가 해주던 맛있는 음식들이 생각이 난다.

단식을 하니까 내 몸하고 대화를 많이 하게 된다. 또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평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쁜 일상에 묻혀서 대화를 못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한진중공업 관련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의 근본적 해결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참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기에는 아직 먼 이야기인 것 같다. 노동운동을 80년대부터 시작해서 30여 년 이상 했다. 지금도 노동조합 같은 곳에 강연을 가서 "여러분 어디 가서 노동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노동자라는 말을 스스로 쓰는 것이 싫지요?"라고 물어보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무언가 하대 받고, 결핍돼 있고, 불편한 그런 단어로 인식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200일 넘게 저 높은 크레인 위에서 저렇게 투쟁하는 모습은 시장만능주의에 떠밀릴 대로 떠밀려서 백척간두에 서 있는 노동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분단 이후에 냉전체제의 가장 큰 희생자는 노동자였다.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못했다. 이는 노동자라는 말을 쓰면 빨갱이 혹은 불순한 사상에 의식화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라는 말 대신 근로자 또는 산업역군이라는 말을 썼다. 한마디로 노동과 노동자는 한국 사회 냉전 반공주의의 포로였다.

이러한 사회현실 속에서 노동자는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권리가 없었고, 못 배우고 무능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적으로 하대를 받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당시 유명한 말이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사회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87년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쳐 독재 정권을 끌어내렸는데, 그래도 노동은 해방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노동은 더 잔인한 시장에 내던져졌다. 한발 한발 나아가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멈춰선 지점도 바로 거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전국의 사회적 약자들(비정규직 노동자, 정리해고 노동자, 자영업자, 철거민 등)의 생존권이 더욱더 위협받고 있다. 그들의 고통이 2011년이 된 지금에도 그치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진중공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의 1만여 명이 넘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부산 영도에 모인 희망버스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버스는 일자리를 보장하고, 노동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 임무인데, 그 임무를 방임하는 국가를 상대로 시민이 나선 것이다. 희망버스는 거대 무소불위의 탐욕 자본을 견제하고 사회경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저항과 연대의 버스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노동의 고통을 줄이지 않고서는 우리의 민주주의도, 희망도, 미래도 가능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우리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노동은 인간이 자기실현을 하는 수단으로 인간을 존재케 하고 존엄케 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따라서 노동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노동이 그처럼 귀중한 가치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인식의 전환 위에 현재 논의되고 있는 노동문제가 야권연대의 핵심적인 의제가 되어야 한다. 또한 한진중공업 문제가 전면에 드러난 상황에서 국회에 노동특위를 구성해 현재의 비정규직법과 정리해고법 등 노동권을 제약하는 제도들을 고쳐나가야 한다. 더불어 최저임금제나 각종 사각지대에 있는 복지의 문제 등 전면적인 노동개혁의 플랜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의제화해 나가야 한다.

최근 진보정당 간 통합이 가시화 되고 있다. 그리고 내년 총선, 대선과 관련 진보정당 간 통합을 넘어 야권 대통합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로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불어 이 상황에서 진보신당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프레시안(최형락)
현재 정당들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것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 요구와 현실정치의 괴리 때문이라고 본다. 정치에서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선거 민심으로 표출이 된다고 생각한다. 작년 지방선거 때는 복지라는 의제로 민심이 표출되었는데, 그만큼 지금은 국민의 민심과 정치가 부합되어가는, 일종의 정치질서의 재편기라고 본다. 한편으로는 한나라당 정권을 반드시 교체해야 한다는 열망이 굉장히 크고, 동시에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닌 이제는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정말 제대로 풀어낼 정치세력이 나와 주길 고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각 정치세력의 자기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당은 비슷한 역사성과 정체성을 가진 정당끼리 통합 재편을 하고, 선거 국면에서는 야권 세력들 간 가장 적극적인 수준으로 연대협력을 하는 방안이 내가 생각하는 방안이다. 지금 민주당과 시민사회 일부 진영 등에서 이야기하는 대통합론 같은 경우엔 당장 내년 총선에서는 효과적이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개혁의 길을 열어가는 데는 오히려 중장기적으로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대선의 경우에 국민이 야권 단일 후보라고 해서 그 후보를 뽑을 것이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만이 아니라, 야권이 실질적인 진보적 개혁 추진의지와 전망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세력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국민이 표를 모아 줄 것이라 본다. 진보적 개혁의지가 함몰된 대통합 정당보다는 민주당과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이 서로 진보적 의제를 가지고 경쟁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또 정책합의를 하고 이러한 의제들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는 확고한 전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국민에게 더 큰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의 인터뷰(레디앙)에서 진보의 독자적 주체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야권통합과는 또 별개의 문제인데,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민주연합당을 말하고, 대통합론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것이다. 정치공세 차원에서 이러한 주장을 계속하기보다 오히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잘 살펴, 이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어 실현할 수 있는 비전과 계획, 방법론을 벼려 야권연대의 기틀을 닦는 것이 훨씬 진정성 있고 책임 있는 태도라 생각한다.

진보세력의 주체형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 건설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전제되어야 할 부분이 통합과 혁신이다. 지금 국민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사회를 주도해 온 성장제일주의, 시장만능주의에 지쳐 있고,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거대 경제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지, 사회경제 민주화를 향한 광범위한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낼지, 이에 대한 방안을 찾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시대적 요구라고 본다. 이 일을 가장 진정성 있게 해낼 수 있는 세력이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진보정치 10년간 해 온 일이 결코 작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지방선거 이후에 박근혜 의원조차도, 또 한나라당조차도 열렬히 복지를 외치고 있는데, 진보정당의 존재와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민주당을 포함한 정당들의 좌클릭이 이렇게 속도감 있게 진행되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지금은 누구나 진보라는 단어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진보정당의 존재와 그동안의 노력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지난 30여 년 이상의 사회운동 기반과 10여 년의 진보정치의 성과를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그래서 진보적 개혁을 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국민이 만들어 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지금의 진보는 분산되어 있어 하나의 힘으로 결집해 있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한계라고 본다. 따라서 이 한계를 극복해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나의 신념보다는 진보정치에 의지하고자 하는 대중에 대한 책임을 더 중시하는 이른바 엘리트 정당에서 대중적인 진보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전통적인 NL, PD 구도의 극복이라든지, 미래 한국사회의 진보정치가 추구해야 할 비전과 프로그램, 그 진보적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주체세력의 형성, 그리고 유능한 정치인들을 양성하는 것. 말하자면 집권 대안 세력으로서 면모를 갖춰 가는 것들이 동시에 병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진보라는 단어에 의지하려 할 때, 제대로 된 진보가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의 주체형성을 확고히 한 뒤 그 토대 위에 자유주의 세력들을 포함한 연합정치 공간을 적극적이고 유연하게 활용함으로써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주체형성을 해야 한다는 말은 진보정치 틀 안에 안주하겠다든지, 또는 연합정치에 능동적,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변화의 폭과 깊이가 매우 넓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그 변화의 열망은 정말 안하무인격인 거대 경제 권력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 추진을 위한 중심을 갖춘다는 의미로 이해했으면 한다. 그것이 진정 정책과 노선중심의 정당정치로 가는 길이다.

한국사회의 미래상과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프레시안(최형락)
한 사회의 문명 정도를 평가하는 것은 그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배려하는가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국회에 들어갔을 때, 장애인들이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을 하는 것을 보았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난 이동권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알아보니 우리나라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중증 장애인들은 이동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제로 그 말이 맞더라. 지금은 그나마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당시 휠체어로 탈 수 있는 저상버스도 없었고, 보도는 10M도 못 가서 둔덕들이 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혼자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2003년 통계 기준으로 중증 장애인 절반 가까이 평생 집 밖을 한 번도 못 나가보고 죽는다는 참담한 현실을 알게 되면서 그래도 명색이 20여 년 노동운동한 사람으로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이건 정말 야만 사회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장애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취급하는 이 한국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해서 사회적 약자들을 다루는 모습이 바로 우리 사회의 문명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복지국가다. 그런데 현대 복지국가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결과물이다. 즉, 노동이 존중되는 복지국가여야 하는데,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에서 갑자기 복지 담론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지만, 2%밖에는 안 되는 노동조합 조직률, 10%에도 못 미치는 진보정당의 지지율,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볼 때 과연 복지국가에 대한 진정성 있는 합의가 가능할 것인가 회의적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열심히 일하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보람을 느끼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정치를 하면서 여야를 불문하고 많은 정치인을 만났는데, 화가 났던 것은 노동문제를 제기하면 항상 민주노총에 대해 비난이나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더라. 노동조직들이 부족하고 잘못한 것들도 있고, 잘못한 부분들은 비판받아야 또 마땅하다. 하지만 노동문제는 노총의 과제 이전에 국가의 기본 임무이고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동문제가 늘 정치의 주변적 관심사로 내몰리고 오히려 노동조직의 일로 치부하고 마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났었다.

비정규직 문제도 그 주체가 자신의 기본권 행사가 가능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단결권이나 교섭권, 파업권이 법과 제도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이 존중되는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비례대표제의 확대 등 진보정당이 더 성장할 수 있는 제도개선과 환경을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 국민이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겪어본 만큼 겪어봤기 때문에 이제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 보다도 그 대통령이 얼마나 제대로 잘할 수 있느냐에 국민의 관심이 가 있다고 본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박근혜 의원이나 손학규 대표 모두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이분들이 과연 강력한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바람에 적합한가라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두 분 모두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만들어 낸 한국사회의 굴곡, 즉 OECD 국가 최고 수준의 양극화, 그리고 저출산, 또 대학을 졸업해도 정규직 일자리가 30%밖에 안 되는 이런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두 분이 주장하는 민생과 양극화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분적인 해결 정도의 접근으로는 국민의 개혁 열망에 부응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계속해서 이야기했지만, 변화에 대한 국민 요구의 핵심은 노동의 가치를 복원하라는 것이고, 노동의 가치를 복원한다는 것은 결국 현재 한국의 재벌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벌에 대한 견제는 시장을 거스르는 정치행위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내버려두고 재벌과 대립하지 않고, 노동에 대해서 부분적인 손질만 하는 수준으로는 근본적인 민생도 복지도 이루어내기 힘들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의원이나 손학규 대표가 재벌들에의 의해 오랫동안 눌려져 왔던 노동의 가치를 되찾아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년 대선에 출마할 계획이 있는지?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웃음). 지금으로서는 출마한다고 해도, 또 안 한다고 해도 무책임한 발언이 될 것 같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이 굳건하게 세워지고, 국민이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진보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정치에 무한한 책임을 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진보 정치의 성숙을 위한 요구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분들처럼 내가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웃음).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를 듣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자유주의의 최대 공적은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인권과 만인평등 사상, 이런 사상이 삼권분립이나 법치주의와 같은 제도를 발전시켜 왔고,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의 가치가 부유층이나 중산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고루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를 원천적으로 비판하고 배제하는 급진주의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현실은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가 중산층 이상에게만 많이 적용되는 것 같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는 물질적인 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중산층 이상에게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것 같다.

한국의 경우 분단 이후 냉전적 자유주의가 보수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다고 본다. 그리고 경제란 결국 경제적 자유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인데, 그 자유라는 것이 결국 거대 자본, 탐욕의 과잉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가 대안적 정치 이념으로서 한국사회에 실천적 힘을 갖기 어렵다고 본다. 역사적으로도 자유주의는 전간기(戰間期,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때까지) 대공황 이후에 실질적인 힘을 잃었고, 유럽의 복지국가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대안 이념으로서 갖는 것은 복고적이고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세력과는 민주주의 과제에서 연대하고, 또 사회경제적 자유를 확충해 가는 영역에서 경쟁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의 과제이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에 대한 내 생각에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웃음).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담으려고 하는 실천적 과제는 복고적 자유주의에서 훨씬 더 나아가 있는데, 그것을 왜 굳이 자유주의라는 이름에 담음으로써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지향으로서 그것이 이루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하느냐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한편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이야기하고, 한편에서는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는데 이 두 방향은 기존 정치의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자유주의 세력의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진보적 자유주의가 나왔고, 진보진영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면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사민주의 복지국가 담론이 나왔다. 나는 이 두 방향의 담론이 잘 조화될 수 있다면 대안 세력의 결집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심상정에게 자유란?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보람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 자유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자기실현을 하며 성과를 내고 싶어 하지 않는가? 보람이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그런데 그 보람은 나의 보람만이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보람을 느낄 때 진정한 보람이 아닌가 한다. 나 때문에 타인이 열패감을 갖는다면 불편하지 않겠는가? 함께 보람을 공유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에서 평등은 전체주의의 가치인 것처럼 호도됐다. 평등이 마치 자유의 적인 것처럼 주입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논리는 극우에 가까운 논리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무엇이 자유를 가장 억압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병원 못 가서 죽어야 하고, 천정부지로 집값이 오르면 길거리로 내몰려 서울역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역시 경제적 자유, 물질적인 능력이 자유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기제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천은 갈수록 더 심각하게 확장되어 가는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장 자유로웠다고 생각되는 시절은?

역시 대학 시절이었다고 본다. 그 당시 대학 진학률이 20%밖에 안 됐다. 당시 대학은 독재 정권 아래 많이 탄압을 받았지만 그래도 낭만과 지성의 대학이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단풍이 붉게 타들어 갈 때, 그 노란색과 붉은색 사이에 드러나는 파란 하늘을 누워서 바라볼 때의 행복감. 그때 비로소 이 세계와 단독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진정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만 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젊은 시절은 노동조합 교육부장에서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등 노동운동과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년 심상정의 가슴에 품었던 꿈에 대해 듣고 싶다. 더불어 청년 심상정이 꾸었던 낭만, 사랑,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청년일 때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곧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 당시 대학생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인의 소명에 대한 논의가 강했고,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회에 환원하고 기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또 그것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농활이 있지만 내 대학 시절 때는 '공활'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장활동이라는 것인데, 방학 때 1개월씩 공장에 취직해서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80년 겨울 방학 때 구로공단에서 야학하던 친구를 쫓아서 들어갔다. 당시 내가 공장에 들어가 겪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시에 8시간 노동이라는 개념은 사실 없었고, 전업 특근이라는 말로 보통 12시간 또는 14시간씩 일을 했다. 그렇게 일을 하면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았다. 당시 내가 미싱사 1급으로 들어갔는데 전업 특근을 해서 8만 원 정도를 받았다. 가리봉동에 닭장집이라고 자치방들 칸칸이 만들어 놓은 집들이 있는데, 당시 그런 집 월세가 3만 원이었다.

내가 본 현장의 노동자들은 너무 근면하고 또 정직했다. 그리고 원망도 안 하는 사람들이었다. 닭장집에서 정말 제대로 누울 수도 없어서 세로로 새우잠을 자면서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또 그 박봉을 쪼개서 부모님께 보내드리고, 동생들 학비 보냈다. '이러한 노동자들이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제대로 권리를 갖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좋은 사회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공활을 가서 내가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교육자가 되고 싶어 사범대를 간 사람인데,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존엄과 가치를 알리고, 자신의 노동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마음의 결단을 하고 25년 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말 그대로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의 주인이자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서야 한다는 용솟음치는 열정이 있었다.

기억에 남는 추억은?

나는 원래 어울리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요즘에는 못하지만 예전엔 잡기에도 능했다(웃음).

'잡기'라 함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프레시안(최형락)
밝힐 수 없다(웃음). 탁구도 하고 볼링도 하고, 고고장에도 많이 갔다. 고등학생 때부터 종로 '태화관'에 있는 교회 서클에 다니기도 했다. 내가 재수를 해서 종로학원에 다닐 때 한 친구가 나를 쫓아다녔다. 그때 백원담(현재 성공회대)교수도 나랑 같이 학원을 다녔는데 눈치도 없이 내 보디가드가 돼주겠다고 해서 종로학원에서 광화문까지 늘 같이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웃음).

내가 어떻게 운동권이 됐는지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말을 했다. 나는 교육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운동권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대학생 때는 머리도 생머리로 기르고, 구두도 7cm 이하는 신지를 않았다. 지금은 많이 망가졌는데 이전엔 얼굴도 예뻤다(웃음). 커트 머리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획일적으로 신고 다니던 운동권 여학생들이 당시에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운동권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보고 다가가면 그도 영락없이 운동권이었다. 그러다 진짜 마음에 들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동권에 들어가야 했고, 또 그 친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운동권이 되었다.

그때부터 열심히 데모 쫓아다니고, 최루탄 맞고, 아스팔트에 퍼질러 앉아 있어야 하고, 그렇다 보니 긴 생머리와 하이힐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렇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을 지내며 어느덧 나도 커트 머리에 청바지가 편한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인생 여정을 보면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개인보다는 공동체, 사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며 살아왔다. 지금 하고 있는 단식도 그렇고, 그렇게 역사와 시대가 심상정을 부를 때마다 계속 응답하며 왔는데, 가끔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그 시대적 요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럴 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우리 시대는 사명감의 시대였다. 나는 1978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79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80년도에 광주항쟁이 있었다. 당시에는 운동권이 따로 있다고 볼 수 없는, 사실 대학 전체가 운동권이었다. 그 시대 한국사회는 자신의 삶보다 사회와 역사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독재정권 말기 시대 교체기였고, 지식인과 대학생의 사명이 많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개인의 삶보다 사회와 역사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게끔 한 배경이었던 것 같다. 386세대라는 것이 이러한 사회적 상황 가운데 나온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평소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평소 내가 가졌던 지향과 시대상황이 맞물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길을 내가 가는데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그러나 나를 계속 고뇌하게 했던 것은 역시 어머니, 아니 그냥 늘 엄마라고 부르니까(웃음) 엄마였다. 내가 지명수배받고 다닐 때 엄마가 반신 마비가 되시고, 나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또 힘들었을 때는 자신이 없을 때다. 해야 할 과제와 문제는 너무나 막중하고 큰데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왜소하고 무기력할 때, 그럴 때 도망가고 싶다(웃음). 그렇지만 그 때마다 잘하려고 하기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말로 마음을 다잡곤 한다.

워낙 공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서 여자 심상정, 아내 심상정, 어머니 심상정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여자 심상정, 아내 심상정, 어머니 심상정은 각각 언제 가장 행복하고 또 언제 가장 슬픔을 느끼나?

사실 이 질문이 제일 어려웠다(웃음). 사실 나는 사명감의 시대를 살았다. 엄마로서의 역할은 낙제점이라고 본다. 아니 낙제점보다는 조금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보통 한국 사회에서 인식되는 여성으로서의 삶은 거의 살지 못했다. 뭐랄까, 일하는 여성으로서 나는 가장 힘든 과정을 밟아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했던 노동조합도 금속노동조합이었고, 95% 이상이 남성이었다. 다녔던 학교도 절대적으로 남성 위주의 학교였다.

돌이켜보면 여성으로서의 비주류의 삶이 나를 오늘날까지 오게 한 가장 큰 요소가 아니었나 한다. 학교 다닐 때 남성 선배 운동권들이 대단한 도덕적 자부심을 내세우며 여성을 비하하는 경우를 종종 겪었다. 예를 들어, 어디 정보가 유출되면 베갯머리를 조심하라는 등, 여학생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에서 매우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들을 자주 봤다. 그래서 이러한 것에 맞서서 서울대에서 최초로 여학생 총학생회도 만들었다. 노동운동하면서도 여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구와 의제들이 노동운동 내에서 주변화 되고 배제되는 걸 보면서 서러움을 많이 느꼈고,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문제의식이 '정치인 심상정'을 만들어 가는데 크게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리고 아들을 임신 중일 때 수배 중이었는데, 배 속에 있는 아들에게 "엄마는 노동운동하는 사람인데 노동운동하려면 전국을 다 돌아다녀야 하고, 또 농성도 해야 하고, 교육도 하러 다녀야 해. 그래서 우리 아들하고 많은 시간을 놀아주지 못할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해주곤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리고 임신 당시 일했던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이 건물 5층에 있었다. 건물이 오래돼서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계단을 씩씩거리며 올라갔다. 그때도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 "엄마 사무실에 올라가는 건데 사무실이 좀 가난해서 엘리베이터가 없단다. 잘됐지 뭐, 너랑 같이 운동도 하고"라고 대화를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그때는 내가 험한 노동운동을 하면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지레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한 것 같다.

그리고 보통 엄마처럼 아이를 잘 챙겨주지 못해주는 것이 아이에게 그늘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지금 아들이 고3인데 평소에도 해준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고3인데 공부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맛있는 간식이라도 만들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사실 단식 농성하면서도 잘 지내는지 아들과 계속 문자를 주고받는다. 간혹 셋(남편과 아들)이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일요일 아침 또는 저녁을 같이 먹는 것으로 행복해하고 있다. 빨리 부지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해서, 은퇴를 하고 못다 누린 가족과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들과의 사랑에 푹 잠겨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할 때면 많이 든다.

특별히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 또는 보람을 느꼈던 때, 그리고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셀 수 없이 많다.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소중한 인연을 잘 만나 왔던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념이나 사상에 의지하기보다는 주로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 인연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존경하는 분이 너무 많다. 대부분 생존해 계셔서 누굴 빼놓으면 섭섭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긴 어렵다(웃음).

다만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새삼 새롭게 느껴가고 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우리 친정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가 여든셋이신데 시골부자는 일부자라고, 시집오셔서 시어머니 대소변을 26년간 받으셨다. 그리고 고모 다섯과 자식들 넷, 모두 9명의 자식을 시집, 장가보내셨다. 그러다 내가 지명수배받을 때 안면 마비가 되셨고, 고된 일로 인해 척추가 휘어서 척추를 잘라내고 새로 다시 묶는 10시간 대수술도 하셨다. 그러면서도 국선도 7단이시다(웃음).

아직도 자식들을 불러들이는 일이 없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신다. 또 어머니가 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셔서 돼지를 키우셨는데 시골 동네에서 돼지를 제일 많이 키우게 돼서 돼지 운동장도 만들고 하셨다. 요즘에도 집에 가면 꽃이 마루에 한가득 있다. 거의 죽어가던 꽃들이 어머니한테만 가면 살아난다. 그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꽃도 사람과 같아서 물만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해. 아침마다 일어나서 방긋방긋 웃어주고 사랑을 주기 때문에 잘 크는 거야"라고 말씀 하시곤 한다. 평소에 만나고 전화하면 만날 싸우는 엄마와 막내딸 사이지만 마음속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 어머니가 너무 존경스럽다.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현재 꿈이 있다면?

진보정치가 집권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활짝 웃음). 우리 국민이 정치를 잘하니까 우리에게 큰 의지가 된다. 그래서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서 냉소와 회의로 정치를 오도하는 사회분위기가 아닌 제대로 된 정치를 통해 정치인에게도 존경심을 나타낼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비정규직의 증가, 청년실업, 반값 등록금 투쟁 등 사회구조로부터 나타나는 부작용들을 청년들이 그대로 떠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 주도적인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들이 고3이기도 해서 더욱 청년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젊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자기중심이 매우 허약한 것 같다. 어려서부터 입시를 위해 관리, 준비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세상 트렌드를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를테면 공부 잘하면 사법고시를 보고, 돈 많이 벌려면 삼성에 들어가고, 공무원이 안정적이면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처럼 물고기가 먹이를 쫓아가듯 따라가는 삶은 나의 개성과 잠재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사회흐름 속에서 탈락자는 많을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몇 년 전만 해도 성공신화를 쫓아서 열심히 희망을 품고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 대학생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암울한 것 같다. 희망에 가슴 벅차해 있다기보다 제발 열패자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분위기가 청년들 내 전반에 깔려있는 것 같다. 시류를 쫓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속된 말로 미쳐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 분야에서 자기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게 자기의 재능을 발견해서 그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도 더 다양해지고 건강해진다. 너무 한 방향으로만 달리지 말고, 나를 찾아 그 길을 달려가는 것이 오히려 세속적 의미로서도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유하게 되고 이런 것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 본다. 자기 길을 가며 세상과 넓게 호흡하고 자기실현을 해나가는 젊은이들이 많을수록 사회에 대한 분별을 갖게 되고 변화에 대한 실천을 이룰 수 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라는 것, 쉽지 않지만 그럴수록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

[에필로그]

ⓒ프레시안(최형락)
심상정 상임고문 인터뷰를 준비하며 어떻게 저렇게 한결같은 모습과 마음으로 노동운동을 해왔을까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늘 포근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녀가 해바라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는 해바라기, 희망 바라기. 그래서 정말 부족한 그림실력이지만 작은 해바라기를 하나 그려갔다. 계속 해를, 희망을 바라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니 그래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단식 중에 그 해바라기 그림이 그녀에게 작은 위로나마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늘이 단식 23일째일 텐데, 그녀가 어서 빨리 단식을 풀고, 산적해 있는 노동문제를 풀기 위해 정치권과 시민사회 현장 곳곳을 뛰어다녔으면 좋겠다.

(인터뷰 및 정리: 김경미, 양태성 정치경영연구소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