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쌓일수록 야구는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며 계속 발전해 나간다.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스크루볼 투수), 멸종 위기에 놓이는(너클볼)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진화의 결과로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와 생태계 전체에 변화를 가져온다. 프로야구 초창기 포크볼이, 그리고 90년대 이후 싱커와 체인지업이 가져온 변화가 그런 예다. 때로는 무시무시한 외래종(외국인선수) 포식자들이 건너와 생태계 질서를 뒤흔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변화는 살아남은 종의 생존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또 병풍이나 약물 사태, 파업처럼 생태계 존속을 위협하는 재해가 찾아올 때도 있다. 한번 파괴된 생태계는 자정을 거쳐 다시 회복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병풍 직격탄을 맞은 프로야구가 다시 예전의 인기를 되찾은 것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내년 시즌, 프로야구 생태계에 또 한 차례 파괴적인 위협이 찾아온다. 기형적인 9구단 체제 하에서 펼쳐지는 페넌트 레이스 일정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30일, 2013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경기 일정을 확정 발표했다. 9개 구단으로 거행되는 2013년 프로야구는 3월 30일(토) 개막해 팀 당 128경기, 팀 간 16차전씩 총 576경기를 치르게 된다. 전반기에는 팀간 3연전이 집중적으로 편성됐고, 후반기 8월 6일부터는 팀간 2연전이 편성된 것이 특징이다.
문제는 9개 구단 체제인 관계로, 8팀이 경기하는 동안 한 팀은 휴식일을 갖는 파행이 불가피하는 점이다. 실제 일정표를 살펴보면 팀마다 각각 6차례에 걸쳐 휴식일이 편성된 것을 볼 수 있다. 휴식일은 경기가 없는 월요일까지 포함해서 전반기에는 최대 4일, 후반기에는 2~3일씩 주어진다.
휴식일은 각 팀의 투수 운영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휴식일 이후 치르는 3연전(또는 2연전)에 팀의 1-2-3선발 투수를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두산 베어스의 경우 니퍼트와 노경은으로 주말 경기를 마무리한 뒤, 4일 휴식을 갖고 다음 주말 3연전에 다시 한 번 니퍼트-노경은-김선우를 내는 식의 투수 기용이 가능하다. 넥센 역시 나이트와 벤 헤켄을 수-목 경기에 내보냈더라도, 4일 휴식을 가진 뒤 다시 나이트-벤 헤켄을 내는 운용이 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4일 휴식 전후로 1선발투수가 등판해서, 한 투수가 '2경기 연속 선발등판'하는 진풍경도 나올 수 있다.
이에 따라 2013년에는 4선발과 5선발 투수가 나오는 경기수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실제 스케줄표를 5인 로테이션 기준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각 팀 1선발투수는 최대 30~31경기까지 선발등판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팀이 치르는 경기(128)의 약 24%를 에이스 투수 혼자서 짊어지게 되는 셈이다. 반면 올 시즌 각 팀 1선발 투수들의 평균 선발등판 경기는 28경기로, 133경기 중에 책임진 경기 비율은 21%에 불과했다. 여기에 2선발 투수도 최대 28~29경기를, 3선발도 26~27경기를 나와서 던질 수 있게 된다. 선발투수 세 명이 팀이 치르는 경기의 최대 68%를 던지게 되는 셈이다. 그에 비해 5선발 투수가 나올 수 있는 경기는 팀당 17경기 정도로 대폭 줄어들게 된다.
▲9구단 체제로 내년 프로야구 시즌이 꾸려짐에 따라, 롯데는 불리한 일정을 안게 됐다. 지난 10월 22일 오후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5차전 SK 와이번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3-6 패배한 롯데 선수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뉴시스 |
이렇게 되면 선발 로테이션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해진다. 좋은 선발투수 5명을 보유한 팀보다는, 확실한 에이스급 3명을 보유한 팀이 유리하다. 극단적으로 신생팀 NC 같은 경우 용병 3명을 모두 나이트-주키치-니퍼트급으로 뽑는데 성공하면, 4-5선발에 관계없이 기존 팀들과 대등한 투수싸움을 가져갈 수도 있다. 과거 빙그레도 창단 초기 비슷한 효과를 누렸다. 7개 팀 체제하에 드문드문 경기일정인 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이상군, 한희민 두 에이스가 1986년에는 64경기, 87년에는 63경기에 나와 던졌다. 팀이 치른 108경기 중 무려 60%를 투수 둘이서 책임진 셈이다. 여기에 1988년에는 한용덕이, 1989년에는 송진우가 가세하면서 빙그레는 창단 4년 이내에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NC 역시 외국인 3명을 전부 정상급 투수로 뽑고, 변칙 스케줄을 활용하면 예상외의 성적을 낼 가능성이 있다. 확실한 외국인 듀오를 보유한 넥센과 LG도 내년 순위 싸움의 복병이다. 이는 5인 로테이션이 정착된 현대 야구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변칙 스케줄은 불펜 운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선 이기는 경기에 확실하게 '올인'하는 투수기용이 주를 이룰 것이다. 또 휴식일을 앞두고 열리는 3연전에서는 필승조 불펜투수가 총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다소 무리하더라도 휴식일 동안 체력을 보충하고 컨디션을 조절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천으로 취소되는 경기가 많은 장마철 투수기용 방식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FA로 정현욱을 보강한 LG의 경우 3연전에서 정현욱과 유원상이 사흘 연속으로 6, 7, 8회를 틀어막고 싹쓸이하는 시나리오도 노려볼 수 있다. 선발과 마찬가지로 불펜도 양보다는 질이, 선수들의 고른 기량보다는 연투 가능한 필승조 2~3명의 보유 여부가 더 중요해진다. 여기에 로테이션을 거르게 된 4, 5선발투수를 필요하면 불펜에 동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버릴 경기,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를 구분해서 이길 수 있는 경기에 총력을 쏟아 붓는 감독의 판단력도 중요한 변수다.
변칙 스케줄로 9개 구단들 간에 희비가 크게 엇갈리게 됐다. 일단 각 팀별 상위 선발투수들의 예상 등판횟수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막 휴식일을 치른 팀과 상대하게 되는 경우다. 한번 3~4일 휴식을 가진 팀은 다음 경기에서는 무조건 1, 2선발부터 내보낼 수 있기 때문에, 상대팀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 물론 휴식일로 인한 경기감각 문제가 있긴 하지만, 우천취소 때처럼 불규칙한 스케줄이 아닌 미리 나와 있는 일정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하다. 가능하면 휴식일을 누린 팀과 적게 상대할수록 유리하고,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불리해진다. 특히 운명의 장난처럼 팀이 연패중이거나 4-5선발투수가 나오는 시리즈에서 상대 1-2-3선발을 만나게 되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시뮬레이션 결과, 내년 시즌 휴식일을 마친 팀과 가장 자주 상대하는 팀은 롯데(12회) 자이언츠다. 상대팀 원투펀치를 무려 24번이나 추가로 상대해야 하는 가혹한 스케줄이다. 특히 전반기에는 2012 우승팀 삼성이 4일 휴식을 가진 뒤에 만나는 횟수만 자그마치 3번이나 된다. 게다가 스케줄상 삼성과의 세 차례 대결에서 모두 3-4-5선발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서, 이 9경기에서 거두는 성적이 전반기 롯데의 농사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롯데는 다른 팀과 달리 유독 먼 이동거리 문제까지 안고 있어서, 더욱 힘든 스케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롯데 외에도 올해 최하위에 그친 한화와 두산이 각각 8차례, 신생 NC가 7차례씩 푹 쉬고 나온 상대 에이스들과 만나는 불운을 겪게 됐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한화와 NC로서는 스케줄까지 훼방을 놓는 모양새다. 반면 SK와 KIA, LG와 넥센은 각각 4차례로 비교적 무난한 일정표를 받아들었다. 다만 KIA는 올스타 휴식기 바로 직전에, LG는 직후에 휴식일이 배정되면서 약간의 손해를 본다.
내년 스케줄표의 가장 큰 수혜자는 삼성이다. 삼성은 2013년 휴식일을 가진 팀과 딱 1차례만 상대한다. 그것도 후반기에, 이틀 휴식을 가진 LG와의 2연전 딱 한번만 치르면 되는 기가 막힌 일정이다. 이에 올 시즌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승을 이뤄낸 삼성은, 내년에도 상대 에이스들을 절묘하게 피해가면서 3년 연속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됐다. 알려진 대로 삼성은 롯데와 함께 10구단 승인에 가장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구단이다. 하지만 롯데는 9구단 스케줄에서 피해를 입고, 삼성은 이익을 본다는 점이 내년 일정표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들쭉날쭉한 기형적 스케줄의 피해자는 롯데만이 아니다. 리그 타자들도 스케줄 때문에 큰 피해를 볼 전망이다. 에이스급 투수들을 상대하는 경기가 부쩍 늘어나면서, 자연히 타율이나 홈런 등 기록 면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불펜에서도 필승조 투수와 선발요원인 투수들이 무더기로 등장해서 타자들의 개인기록을 사정없이 깎아내릴 것이다. 여기에 프로야구 전체적으로 선취점과 1점 싸움이 중요해지면서, 경기 초반부터 번트를 비롯한 득점 '짜내기'가 펼쳐질 가능성도 높다. 이래저래 타자들의 기록생산에는 불리한 조건이다.
잦은 휴식일 역시 투수보다는 타자들에게 아주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한창 타격감이 절정에 달했는데 4일을 쉬게 된다고 생각해 보시길). 휴식일에 잘 적응하는 타자와 팀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경기 감각을 찾지 못해서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2013년에는 올해보다 더 심한 투고타저 시즌이 예상되는 이유다. 아마도 내년은 20승 투수와 2점대 방어율 투수가 무더기로 나오는 시즌이 될지도 모른다. 반면 타격에서는 3할 타자와 20홈런 타자 구경하기가 깨끗한 정치인만큼이나 희귀해질 가능성이 있다. 황소개구리가 떼로 등장하고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는 환경 홀로코스트가 프로야구에서 재현되게 생겼다.
프로야구 10구단이 2015년부터 리그에 참여한다고 가정하면, 최소 2014년까지는 기형적인 들쭉날쭉 스케줄로 페넌트레이스를 치러야 한다. 그래도 2년 정도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구단들의 몽니로 10구단 창단이 좌초되는 경우다. 이럴 경우 9구단 체제를 앞으로도 오랜 기간 계속해서 봐야 한다. 리그의 투타 밸런스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30년 동안 어렵게 구축해온 프로야구의 생태계가 완전히 망가질 위험성이 있다. 지나친 투수-수비 위주의 경기로 팬들이 흥미를 잃고 프로야구를 외면하는 것도 예상되는 부작용이다. 9구단 체제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10구단 체제를 완성해야 하는 이유다. 롯데, 삼성 등 반대 구단들이 굳이 9구단 체제의 폐해를 직접 온몸으로 사무치게 느껴보겠다고 내년 까지 결정을 미루는 일이 없길 바란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굳이 맛을 봐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www.futuresball.com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