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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분단 한국에서 복지국가 만들려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평화복지국가'의 비전으로 북풍에 맞서라

어김없이 이번 대선에서도 이른바 '북풍(北風)'이 불고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리고 정말 뜬금없게도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들고 나와 재미를 봤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북한이 남한의 정권교체를 주장하면서 저들을 돕는 희한한 장면이 다시금 연출되었다.

다시 북풍이 분다

비록 이 북풍이 예전과 같은 효과를 낼지는 의심스럽고 또 지금은 단일화 바람에 묻혀 얼마간 잠잠해진 듯 보이지만, 짐작컨대 대선이 끝날 때까지 북풍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더 거세질 것이다.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의 단일화 협의가 있던 백범기념관 앞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은 두 후보가 모두 '빨갱이', 곧 친북적 좌파라고 공격했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어떤 공세가 펼쳐질지 참으로 걱정스럽다.

문제는 이런 식의 북풍과 이념 공세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고 '종북 좌파'다.

아니나 다를까 그토록 강렬한 시민적 열망인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관련 아젠다는 이번 대선에서도 단지 형식적이고 수사적인 구호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의 복지국가 운동에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분단이 복지국가 정치에 끼친 이런 식의 부정적 영향력은 정말 심각하다. 지금껏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도 그렇지만, 특히 복지국가에 대한 지향은 언제나 무엇보다도 반공과 안보의 논리에 의해 압도당해 왔던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비민주성이나 형편없이 낮은 복지 수준 같은 것을 모두 지나치게 환원적으로 분단 문제와 연결시켜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꽤나 비판적이다. 그러나 분단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특히 복지국가 건설에 대해 끼친 심각한 악영향에 대한 단선적 무시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 여긴다.

참혹한 이념적 내전을 치른 우리나라 같은 반공 분단국가에서도 복지국가 건설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선거 때마다 부는 북풍이나 '레드 콤플렉스' 같은 것을 어떻게 극복하여 복지국가로 가는 장대한 여로를 제대로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복지국가의 도덕적 기초와 '반공 규율 사회'

내가 생각할 때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의 형성이다.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단일 정당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수구 기득권 진영을 압도할 수 있는 세력 규모를 가진 친복지 진영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연합정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연합정치는 단지 좁은 정치권을 넘어 전체 시민사회 수준에서 형성되는 강력한 연대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시민적 연대는, 흔한 인식에서처럼, 단순히 노동-중산층 동맹 같은 '이해관계 동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어떤 '가치동맹'이어야 한다. 요컨대 필요한 것은, 바람직하게 문명화된 사회적 삶의 양식에 대한 공유된 지향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민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연대와 동맹이라는 거다.

그러나 그동안 분단이라는 조건 위에서 이 땅의 근대적 삶의 양식의 원형을 규정했고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반공 규율 사회'의 삶의 문법은 바로 그러한 가치동맹의 형성을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매우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도덕적 차원에 대한 성원들 사이의 공유된 인식 없이는 성립할 수도 작동할 수도 없다. 물론 여기서 '도덕적'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다. 만약 우리가 도덕을 인간의 본원적 나약함이나 상처 입을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생산적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복지국가는 바로 그런 도덕의 생산성을 사회적 삶의 양식 속에 구체적으로 구현해 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누구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먹고 입어야 하고 배워야 하며 아프면 치료받아야 한다. 그런데 시민들은 그런 필요들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시장에서의 실패나 가난이나 병마나 사고 등으로 이런 저런 장애들을 만나곤 한다. 바로 그런 장애들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여, 모든 시민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가능한 인간적 존엄성의 침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복지국가 이념의 바탕에 깔린 도덕적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분단 기반 반공 규율사회는 정확히 바로 이런 도덕적 지향의 대척점에 있는,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속물주의적인 삶의 문법을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항시적 비상 상황'의 삶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그 항시적 비상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삶은 '영원한 피난민'의 삶이 되고, 그리하여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아남는 게 최고'라는 '걸인의 철학'(백낙청)이 지배적인 사회 철학이 된다. 여기서는 개인들에게 사회적 삶 전체가 맹목적 생존 경쟁과 엄격한 (자기) 규율의 필요라는 프레임 속에서 인지된다. 그에 따라 '힘 숭배'와 약육강식의 논리, 위계질서의 강요와 그에 대한 순응의 논리, 권위주의적 교육과 인성 형성의 필요 등과 같은 문화 문법이 일상을 지배한다.

공적인 삶은 공동화(空洞化)되고 도구화되며 근본적으로 사사화(私事化)된다. 공적인 삶이 개인적인 이익 추구의 장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삶의 문법에서 도덕은, '충·효'의 도덕이 강조하는 것처럼, '위계의 존중과 권위에 대한 순응'의 태도나 규칙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내 생각에 흔히들 지적하곤 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나 '대중 독재' 같은 현상은,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단순히 기득권에 대한 집착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강건한 생활 보수주의와 영남 보수주의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의 문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현대사 초기를 규정했던 경제적 낙후 상황 말고도, 특히 바로 분단이라는 조건과 그에 따른 잔혹한 내전 경험 그리고 그것을 정당성의 기초로 삼은 박정희식 군부 개발독재가 그런 문법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 문법을 민주적-연대적 삶의 문법으로 대체하는 '문화 개혁' 없이는 복지국가로 가는 길은 무척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시민사회의 복지국가 운동은 이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하나의 새로운 도덕적-문화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치, '좌파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고성 같은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의 와중에 지배적인 분단-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부정했던 한 진보 분파가 어떤 정치 문화 속에서 진보 정치를 표방해 왔는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확인한 적이 있다. 그 분파가 보인 위계와 권위에 대한 맹종과 패권주의, 그리고 그에 따른 성찰적 합리성의 부재는 정확히 우리 사회 수구 세력의 문화적 삶의 문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이런 것만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 정치의 근본 지향 자체가 분단 상황의 규정력에 의해 심각하게 굴절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그동안 우리 진보 정치는 큰 틀에서 어떤 'NL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세계관은 통진당 잔류파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종류의 광의의 NL적 세계관은, 반드시 똑 같은 방식도 아니고 현저히 약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개혁 진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80년대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 일반도 사로잡고 있었다. 그들 역시 분단 체제의 강력한 부정적 자장 속에서 형성된 정치적 세계관을 통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성장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 4.11 총선에서 '강정'이나 '한미 FTA' 같은 의제들이 어떻게 좌파-민족주의적 프레임 속에서 전면화하여 복지 의제를 밀어 내었고 또 그것이 어떻게 야권을 패배시키는 데 기여했는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공천 과정에서도 복지 전문가들은 쓴맛만 다져야 했더랬다. 덕분에 이미 그 4.11 총선에서도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의제는 뒷전으로 밀려 났더랬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런 사정이야말로 분단이 이 땅의 복지국가 건설에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올바른 복지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일정한 방식으로 폐색시켜버렸던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개혁-진보 정치가들에게 복지는 여전히 민족 문제 만큼 시급하지 않다고 인식되고 있거나, 분단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이 어떻게 보수적인 안보 논리를 활성화시켜 복지정치의 발목을 잡게 할 것인지가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 땅의 복지국가 정치는 진보 정치의 본성에 대한 이 좌파-민족주의적 이해를 발본적으로 극복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복지국가운동, '평화복지국가'의 비전으로 북풍에 맞서라

분단 문제의 해결 노력 없는 복지국가 정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분단 문제를 통일이나 민족 문제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평화와 인권이라는 도덕적-정치적 지평 위에서 접근해야만 한다고 본다. 단지 이런 도덕적-정치적 지평만이 복지국가 정치와 일관될 수 있다. 그러니까 분단은 어떤 역사적-민족적 과제의 미해결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이 땅의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에 미친 부정적 규정성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되어야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분단은, 항시적 비상 상황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공포로, 기본권의 제약을 위한 상황 논리나 부족한 민주주의에 대한 알리바이로, 우리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해 왔다. 또 국방과 안보의 논리는, 가령 과도한 '국방 예산'과 턱없이 낮은 수준의 '복지 예산'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많은 시민들의 기본적인 물질적 삶의 질과 복지 수준도 억눌러 왔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향해 난 문을 열기 위해서는 그런 장애물들을 민족문제라는 두리뭉실한 포장 속에서 꺼내서 문제의 참된 차원을 제대로 겨냥하여 제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안보 논리를 넘어서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구체적 비전의 확립과 실현일 것이다. 우리에게 평화는 또한 그 자체로 안보이기도 하다. 나아가 평화는, 금강산 관광의 중단이나 연평도 사태의 비극적 결과가 보여 주듯이, 우리 사회의 많은 성원들에게는 곧바로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분단 상황에서도 복지국가를 실현시킨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분단 적대성의 극복과 평화 없는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국가는 '평화복지국가'여야 한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민주진보진영은 '평화로서의 안보' 또는 '평화를 통한 안보'라는 비전을 구체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정책들을 일관되게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평화의 가치가 시민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이고 실질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때,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반북 냉전 안보 논리에 기초한 북풍도 더 이상 불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번 대선에서도 어설픈 '안보 코스프레'보다는 평화복지국가에 대한 구체적 비전만이 북풍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간 민주진보 진영 일반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불투명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근본적 오류라는 점도 분명히 확인되어야 한다. 복지는 국가나 부유층의 시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당당하게 누려야 할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복지가 인권이듯이 평화 또한 인권이다. 결국 평화복지국가는 최고수준의 인권국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런 접근에서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불투명한 태도는 자기모순적이고 자가당착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 인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반인권적인 수구 기득권 세력이 하고 있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친복지 민주 진영은 남북간 휴전 또는 준전시 상태의 영구적 해소, 곧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평화체제의 수립이야말로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긴급한 전제임을 정치적으로 타당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금처럼 수구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서 적절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소통과 대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원칙적이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슬기로운' 접근이 절실하다.

▲ 탈북자 북송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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